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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전 CIA 요원, 『CIA요원 마이클 리』 저자)
계엄군과 대치하는 시민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들의 무장 폭동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43년이 넘도록 국내에서는 그것이 민주항쟁이다(Democratic Uprising), 아니다 북한이 개입한 민중 폭동이다(People's Insurgence), 하며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데, 나는 결론적으로 딱 잘라서 그것은 틀림없이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이었다고 단언한다.
사건 경위를 추적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찬·반 양측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대로만 이론을 전개하고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내용만을 골라서 말하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들이 모두 중요한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발사한 총알이 어디에 맞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해명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필연코 소멸한다.
1979년 후반에 북한에서는 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 총책이 김중린이었는데 소위 남조선에 자리를 잡고 되어있는 혁명역량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잠복 간첩들과 동조자들로 구성된 지하 세력이 총동원하여 남조선 민중봉기에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령을 내렸다.
동시에 북한의 특전대인 제17공수여단이 그해 여름부터 치열한 특수훈련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1980년 여름 이전에 남조선 해방을 위한 대사변이 일어나는 데 우선 서울과 마산과 광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남조선 지하에 구축해놓은 혁명역량이 주도하되 표면적으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표방하고 이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인민해방시민군이 북조선에 무력 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때 북에서는 제17공수여단과 특전부대를 남파하여 1950년 6·25사변 때 실패한 조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외 근무 중에 이 정보를 최초로 접수하고 워싱턴에 보고한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이 정보를 접수한 미국 정부는 1980년에는 남한에서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요가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미국 정부는 이 정보를 한국 정부와 공유했을 것으로 믿는다.
2. 최은희와 황장엽의 증언그와 비슷한 시기에 북으로 납치되어간 영화배우 최은희의 증언에도 동일한 내용이 암시되어있다. 즉, 1978년에 노동당의 고위급 간부 한 사람이 말하기를 약 3년 이내에 남조선이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뒷이야기를 제쳐놓고는 5·18 광주사태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가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울과 마산에서는 불발했고, 좌우지간 1980년 5월 18일에 예상했던 대로 민중 소요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후일에 필자가 탈북자 여러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들도 정확하게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그들은 이런 말도 하였다. 즉, 1981년 6월, 인민군 특전부대 정치 담당 간부 학습 강의에서 김일성이 언급하기를 “지금까지 우리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3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사태가 제일 아깝다.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과 그의 동반자 김덕홍도 <월간조선>의 김용삼 기자에게 북한이 광주사태를 지휘했고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일꾼 상당수가 광주사태 직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3. 공작대원들의 산발적 침투그동안 탈북자들이 누차에 걸쳐 북한 특공대원들이 남한에 잠입하여 5·18 광주 소요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그 규모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이 460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600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2013년 5월 18일, 광주사태 33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는 북한 특공대 개입 여부를 놓고 언론계에서 치열한 공방이 있었는데,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북한이 개입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개입하였는지를 더 정확한 분석과 판명이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언론인들은 광주사태에 동원된 북한 특공대가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처럼 일시에 집결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런 일은 불가능함으로 북한 개입을 아예 부정하기도 하지만, 북한 특공대는 오래전부터 2인조 3인조 형식으로 침투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에 집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79년 10월 부마사태 때에 잠입한 북한 공작원들과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탄광 노사분규 때 침투한 공작원들도 북으로 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사태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광주사태 작전 지휘부는 목포에 있었다고 한다.
4. 현역 특수군이 아닌 민간인 특공대광주사태에 북한 특수군의 개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 광주에 동원된 북한공작대는 현역군인이 아니며, 물론 여러 인민군 부대에서 차출되어 동원된 현역군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남 공작부서에서 현역군보다 더 무서운 훈련을 받은, 군부대의 단대호(單隊號)가 없는, 민간인 대남공작 특공대였다.
원래 계획은, 광주폭동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었다면, 1980년 5월 27일에, 6·25사변 때처럼 현역 군대를, 즉 비정규전 특전대 병력이 대거 남침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예상만큼 광주시민들의 협력이 미흡했고, 사태가 27일 오전에 진압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분명한 확증은 북한 학생교과서에, ‘광주사태는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지령한 과감한 거사’라고 기록되어있고,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는 1980년 8월에 세워진 광주작전 희생자를 위한 <렬사 추모비>가 있다.
그 비석에는 158명 희생자 이름이 적혀있고, 다른 문헌에는 희생자가 총 490명이라고 되어있다. 북한에서도 그들을 인민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남공작대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현역군인도 끼어 있었지만, 조직 자체는 군부대가 아니었다.
5. 무등산의 진달래북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참모장 상장 박승원이 광주 5·18작전에 왔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2000년 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북측 차석대표로 제주도에 왔던 인물이디. 그는 마식령 스키장 건설과 관련해 공이 크다며 북한 정부로부터 노력영웅 칭호와 금메달, 국가훈장 1급을 받은 바 있다.
그는 1988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대남영웅대회’에서 (인민문화궁전 지상에서는 ‘전국영웅대회’가 열렸고 지하에서는 ‘대남영웅대회’가 열렸음) 토론자로 출연하여 5·18 광주항쟁 참전의 공훈담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5·18 광주참전 ‘대남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된 <무등산의 진달래> 노래 제작에도 기여한 바가 있다. 그런데, 김일성을 찬양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처럼, 이 <무등산의 진달래>가 지금 평양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 광주에서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가.
6. 거사(擧事)인가 거사(巨事)인가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의 국가 안위가 심각하게 위태로웠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이 또다시 무력 남침을 계획했으나, 전두환 주도 세력이 혼란을 수습하였고 나라를 바로 지켰기 때문에 광주작전을 실패한 북한과 남한 좌파 세력이 지금까지 전두환 대통령을 그토록 증오하였다.
역사를 바로 평가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1979년 12월 12일 애국적인 거사를 ‘신군부’라고 매도하고 그에 대한 반감을 민주화 열망으로 착각하였다. 설령, 광주에 민주화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북한의 개입이 없이 광주시민들만의 순수한 민주화 투쟁으로 진행이 되었더라면, 혹 불미스러운 혼잡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품어야 하는, 거사(擧事)가 아닌, 역사적인 거사(巨事)가 되었을 것인데, 광주사태에 가담한 인간들은 광주의 애국시민들이 아니고 감대중 추종 좀비들이었으며 북한의 시각으로도 순수 광주시민들의 협조는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광주사태를 언급할 때 광주시민들을 일괄적으로 싸잡아서 폭도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깁대중 추종 세력과 유공자로 행세하는 인간들을 시민들로부터 분리해서, 같은 하늘 밑에서 숨을 쉴 수 없는 민족 반역 세력으로 관리해야 한다.
7. 폭동이냐 민주화 투쟁이냐의 표준5월 21일 오후에 불과 4시간 사이에 44개의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5,408정의 무기를 탈취하고 트럭 3대분의 폭약과 뇌관과 도화선을 탈취하고, 170여 명의 좌익사범을 포함하여 2,700여 명의 죄수가 수용되어있는 광주교도소를 다섯 차례나 야간습격하고, 사망자 중 총에 맞아 사망한 116명 중에 진압군의 M16에 맞은 희생자는 36명이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에 맞은 사람은 80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을 민주화 투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80명은 진압군 주둔 지역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희생되었다. 우리는 절대로 광주시민군이 광주시민을 쏘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폭도들을 태우고 가던 트럭의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시민에게 전남 도청의 위치를 물어본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8. 북한 대남공작에 도둑맞은 광주의 명예광주시민들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지키고 바로잡기 위한 애국심은 온 국민이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명예를 지키고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개입하여 광주시민들을 혼미의 소용돌이로 유도하고 김대중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민주화 투쟁으로 표방하고, 국가전복을 목표로 하는 민중봉기의 형식으로 작전 조작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광주시민들의 ‘순수’가 북한의 ‘대남공작’에 도둑맞은 것이다.
광주의 일부 시민이나 5.18 관련 단체들이 아직도 북한의 개입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신드롬(Stockholm Syndrome, 인질이 범인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편집자 주)’이다. 북한의 개입이 없이 순전히 광주시민들만으로 궐기하였다면 광주사태의 모양새는 그렇게 거칠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광주사태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북한의 개입을 부인하지 말고 온 국민이, 특히 광주시민들이 새로운 인식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광주시민들이 앞장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9. 5·18과 김대중 그리고 김영삼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에 전국적으로 국가안보 상황이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을 때 마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좌익세력에 의한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면서 정부는 1980년 5월 17일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은 민주화 촉진 선언문을 발표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퇴진과 전국의 군인과 공무원들의 정부 명령 불복종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7일에 그가 체포되었고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에 발발하였다. 김대중은 이미 광주사태 발발 이전에 광주사태가 국가전복으로 종결될 것을 예견하고 혁명정부 수립을 위한 내각을 조직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1981년에 대법원은 광주사태가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 무장 폭동으로 확정판결을 하였고 김대중은 광주사태 배후 조종 역할로 사형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런데 그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그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평생 조용히 살겠다는 조건부로 특별사면을 탄원하고 사면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 망명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약속을 어기고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1998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0년 6월 15일엔 평양에 가서 대한민국을 김정일에게 헌납할 흉계를 모의하는 등 평생을 대한민국의 역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아야 할 일이 있다. 1993년 이후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의 스캔들을 아우성치는 호남 세력의 잡음을 잠재우기 위하여 1995년 12월 21일에 그가 광주 5·18 국가전복 무장 폭동을 민주화 민중봉기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같은 망국 범죄를 지원하기 위하여 386운동권 세력이 북을 쳤고,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협력한 대표적인 인사는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와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였다.
그때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헌법재판소가 평결할 때 9명의 판사 2/3, 즉 6명 이상이 동의해야 합헌으로 처리되는데 합헌 4명 위헌 5명인데도 김영삼이 합헌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1996년 1월 23일에 5·18 특별법 재심을 위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 후 대법원이 1997년 4월에 광주 5·18 무장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뒤집고 1981년 판결을 폐기했다. 슬픈 일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바르게 분간할 줄 모르는 학자나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는 분명히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 무장 폭동이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정부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처사다. 이 문제를 놓고 진짜와 가짜 찬반양론으로 오랫동안 혼란스러웠으나 지난 2020년 5월 12일 부로 결론이 내려졌다. 미국 국무부가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5·18 광주사태는 북한 공작원들(North Korean Agents)과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이 합동하여 전문성있게(professionally), 다시 말하면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하고, 자행한 폭동(riot)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 공작원들’이란 표현은 북한의 현역 특수군이 아니고 필자가 지적한 대로 민간인 대남 공작원들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정규전 대남 특공대다. 국무성 문서에는 단순히 ‘폭동’이라고 하였지만, 김대중이 자기 주도의 혁명정부 수립을 위한 내각을 구성하였다는 사실과 수많은 탈북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 폭동은 대한민국의 전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국무성 공개내용은 필자가 그동안 한국 언론에 발표한 내용과 100% 일치한다.
10. 광주의 명예를 광주가 지켜라광주의 명예를 지키려면 광주가 앞장서야 한다. 그 일은 이런 순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개입을 인정하라. 순수 민주화 열망과 북한의 대남공작에 동조한 세력을 구별하라. 광주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혜택을 폐쇄하라. 그들이 받은 모든 보상을 회수하고, 자수하고 협조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처리하되,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법처리하라.
광주 시내에 건립 중인 김대중 치적 기념관을 용도 변경하라. 가장 열렬한 반공애국 시민은 광주에 많이 살고 있다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하라. 광주가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광주의 불명예와 오명은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이며, 대한민국 정부도 이 일을 바로답지 못하면 국가 정체성이 파괴되고 중환자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면서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