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방인 사건과 좌천
허조는 권근의 문하로 열일곱 살(1376)에 진사과에, 그리고 열아홉(1378)에 생원과에 급제하여 관문에 들어섰다. 태조 때 좌보궐의 직을 받았으며 조선 초기 조선의 예절제도를 구축하는 일을 담당했다. 태종이 즉위하는 그 해 사헌부의 직을 수여하였지만 태종과의 첫 만남은 매우 좋지 않았다. 태종으로부터 사헌부 정 5품직인 잡단(雜端)에 임명되고 얼마 되지 않은 날 퇴근길에 태종의 매를 관리하는 응방인과 사헌부 정5품 잡단인 허조 사이에 길거리 마찰이 발생했다. 허조는 허조 대로 왕명을 감찰하는 사헌부 중급관리이니 권위를 세울 법했고 응방인은 응방인대로 태종의 비호를 받는 처지니 사헌부 잡단쯤이야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조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거들먹거리는 응방인의 종 10여명을 가두어 버렸고, 응방인은 그 사실을 임금께 고해 바친 것이다. 태종은 즉각 허조를 불렀다. 7명의 아전을 데리고 입궐하려던 허조를 파수병이 세워 막았다. 한명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 난 허조는 꾹 참고 대궐로 들어가 태종을 뵈었다. 태종이 자기의 특별한 허가를 받은 응방인 종을 가둔 이유를 물었다. 사헌부 관리는 모두 왕명을 받드는 직책이므로 사헌부 관리를 능욕하는 것은 왕을 능욕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가두었던 것이고, 오래 풀어주지 않은 이유는 아파서 결근을 했기 때문이라고 허조가 대답했다. 그리고 대궐을 나오자마자 자기를 막아 세웠던 파숫군의 종 10명 마저 가두어 버렸다. 태종은 그 소리를 듣고 화가 치밀어 허조의 종 10명을 하옥했고 허조를 완산판관으로 좌천시켜버린 것이다.
박현모교수의 글
왕위에 오른 후 태종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휘하 세력들 간의 충돌이었다. 즉위한 직후인 1401년 1월 허조·김종남의 대립사건이 그랬다. 사헌부의 관리 허조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왕에게 매를 바치러 오던 응인(鷹人·궁중의 매사냥꾼)인 김종남 일행과 맞닥뜨렸다. 규정에 따르면 응인은 말에서 내려 사헌부 관리에게 길을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김종남 일행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탄 채로 궁궐로 들어가 버렸다. 허조는 사헌부 아전들을 시켜 김종남의 종을 잡아 감옥에 가뒀다.
얼마 후 김종남으로부터 이 상황을 보고받은 태종은 허조를 불렀다. 왕의 호출을 받고 들어가려는 허조 일행을 이번에는 궁궐지기 장교가 막아섰다. 데리고 들어가는 아전 7명 중 1명만 데리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허조는 다시 그 장교의 종을 하옥시켰다. 응인을 석방하라는 왕명에 대해서도 허조는 ‘사헌부를 능멸한 그들을 풀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태종은 순군(巡軍), 즉 경찰을 동원해 허조의 종들을 가두게 했다. 비유하자면 청와대 직원과 검사가 충돌했을 때 대통령이 경찰을 동원해 검찰청 직원을 구속시켜 버린 것이다.
이 조치를 두고 사헌부의 관리들이 항의했다. ‘사헌부 관리가 길을 갈 때 사람들이 길을 양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왕명을 받드는 관리이기 때문인데, 응인과 궁궐지기가 허조에게 독직(瀆職·직책을 업신여김) 행위를 한 것은 곧 왕명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상소 내용이었다. “신하들의 곧은 기운(直氣)이 꺾이면, 꼭 말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물쭈물해 감히 진언(進言)하지 못하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고도 했다. 태종은 이 상소를 읽고 자기 뜻을 거스른 관리들을 일단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가 돌아오게 했다(허조는 그다음 해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 그는 또한 사헌부 관리를 업신여긴 김종남을 10여 일 뒤 지방으로 내쫓았다.
2016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태종)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던 유아인(위). 세종이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42년 세운 태종 헌릉 신도비.
처음에는 ‘국왕을 능멸했다’며 사헌부 관리를 꾸짖던 태종이 생각을 바꿔 응인을 처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목(耳目)이 수족(手足)보다 중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왕의 눈과 귀에 해당하는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이 존중받으면 왕이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손과 발에 해당하는 측근 신하들의 사사로운 언행도 예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목의 관리를 발탁해 예기(銳氣)를 기르고 그들에게 중한 권세를 빌려주는 것은 장차 간신(奸臣)의 싹을 꺾기 위해서’라는 믿음이 34세의 군주 태종으로 하여금 왕의 자존심보다는 국가 기강을 우선시하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