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금) - 7(월) 일 정 : ○ 9.4(금)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 9.5(토)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 9.6(일)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천안문 광장(天安門 廣場)과 국가박물관 특징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광장은 청(淸)나라 황성(皇城)의 정문인 천안문(天安門) 앞에 만들어진 널따란 광장이다. 천안문(天安門)은 명나라 때인 1417년(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년(영락 18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지붕에 황색기와를 얹고 처마 귀퉁이가 하늘로 치켜든 패루(牌樓)였으며 이름도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에 화재로 훼손된 것을 1465년에 재건하면서 정면 폭이 9칸인 문루식(門樓式) 패루로 만들었다. 이 문루식 패루는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끈 농민봉기군이 베이징을 공격할 때 소실되었으며, 1651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조 패루에서 성루(城樓)로 증축하고 승천문을 톈안먼(天安門)이라고 변경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광장의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이, 서쪽에는 인민대회당(한국 국회의사당과 같은 기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 그리고 광장 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모택동이 비(碑) 위에 ‘인민영웅영구불후’라고 썼다)가 우뚝 서 있다. 그동안 국가적 대행사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이 사용되어 왔다. 1919년의 5·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많이 이용되었고, 1949년의 중국정권 수립식도 여기서 행하여졌으며, 매년 5월 1일 노동절을 비롯한 국경일의 의식도 이곳에서 행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문 중앙에 마오쩌둥(毛澤東)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고, 양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人民共和?万?)'와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万?)'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 관광버스는 우리를 천안문광장의 건너편에다 내려놓는다. 광장에는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 두지 않은 모양이다. 건너편 광장까지는 지하도를 통해 연결된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와 자전거 사이로 보이는 광장은 한마디로 넓다. 과연 세계 최대의 도심광장(都心廣場)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다.
▼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 티엔안먼꽝창)은 베이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1651년에 설계된 광장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면서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체 면적이 44만㎡으로 동시에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광장의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이, 서쪽에는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과 같은 기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 그리고 광장 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 천안문(天安門)은 명나라 때인 1417년(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문을 만들기 사직한지 올해로 꼭 600년이 되는 셈이다. 꽤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안문의 진정한 의미는 현재에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은 모두 이 문 앞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5월 4일에는 중국의 학생, 지식인이 중심이 된 ‘5.4 운동’이 일어나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했던 곳이다. 또한 1960년대 중국 전역을 전염병처럼 휩쓸고 지나간 문화 대혁명의 출발지 역시 이곳이다. 1989년 이곳에서 또 한 번의 역사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4월 15일 호요방의 죽음은 그동안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던 학생, 지식인층에 민주화 요구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많은 학생들과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거센 민주화의 요구와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6월 4일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천안문의 민주화는 좌절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중국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무참히 무너졌고 지금의 중국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도 뒤지지 않는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흥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엘리트 집단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는 반면 길거리에는 손을 벌리는 꾀죄죄한 빈민들의 모습과 공원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이용 앵벌이를 행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 광장의 중심부에는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 Monument to the People's Heroes)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총 높이 37.94 m의 기념비는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쪽 층계는 동서 너비 50.44m, 남북 길이 61.54m이며, 위층 대좌에는 2개의 불상 받침이 있다. 아래쪽 사면(四面)에는 호문소연(虎門銷煙: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하다), 금전봉기(金田起義), 우창봉기(武昌起義), 5·4운동, 5·30사건, 난창봉기(南昌起義), 항일유격전쟁, 승리의 양쯔강 도하 등 1840년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역사를 표현한 8개의 부조(浮彫)가 있다. 그리고 승리의 양쯔강 도하 부조 양쪽에는 중국혁명에 공헌한 인물 170명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 정면에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 직접 쓴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 영웅은 영원불멸이다)’ 8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뒤에는 저우언라이(周恩?, 주은래)가 쓴 비문이 있다. 1만 7,000천 개의 화강암과 한백옥으로 1958년에 만들어졌다. 비의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격인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이다.
▼ 동쪽에 있는 국가박물관이다. 2003년 2월28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959년에 세워진 중국 역사박물관과 1961년에 세워진 중국 혁명박물관이 합쳐져 만들어졌으며, 건물높이 33미터, 길이 313미터, 너비 100미터의 웅장한 기세를 가졌다.
▼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중국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문 앞에다 넓디넓은 광장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중국 현대사의 산실이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 광장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의미들을 갖는다. 일상에선 삼삼오오 모여 태극권을 하는 장소이지만, 때론 역사의 흐름을 뒤바뀌게 했던 사건의 현장이었다.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엄격한 통제가 따른다. 하지만 천안문 앞에 직접 선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 베이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은 과거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중 하나였다. 성의 정문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하였기에 대표적인 성문이자 광장이 되었다. 명·청나라 때에는 큰 법률이나 황제의 명령을 공표할 때 이 문을 거쳐야만 했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황제가 살피며 격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 인민군의 열병식을 국가 주석의 지휘 아래 이곳에서 치른다. 현대에 들어서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여기서 시작되곤 했다.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이곳에서 선포했다. 그로부터 40년 후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서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지자 간부들의 부패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었으며, 경제난과 실업률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천안문에서 큰 시위를 일으켰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펼쳐진 자유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광장은 거의 절반을 꽃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한 것이 여간 신경을 쏟아 부은 것 같지가 않다. 무슨 기념행사라도 있는가 보다.
▼ 광장의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이 있다. 높이 33.6m에 가로 세로가 105m인 정방형의 건물로 1977년 9월에 지어졌다. 대추색의 화강암으로 지어진 기념당은 북청과 첨앙청(또는 배례실, 拜禮室), 남청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방부(防腐) 처리된 모택동의 시신은 첨앙청 내에 있는 수정관에 뉘어져 있는데, 주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귀한 꽃들이 관을 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청 상층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의 개국원로의 혁명업적이 나열되어 있단다. 기념당의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수정관 안에서 잠자고 있을 호치민과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사상을 한번이라도 더 되새겨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이젠 중국국가박물관(中??家博物?)을 둘러볼 차례이다. 천안문 광장 동쪽에 위치하는 종합박물관이다. 동일한 건물에 ‘중국 역사박물관(中??史博物館)’과 ‘중국 혁명박물관(中?革命博物)’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박물관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2003년에 합병해 ‘국가박물관(?家博物館)’으로 개편하였다. 국가박물관은 4층 건물로 높이는 40m, 폭은 149m이다. 총면적은 65,000㎡로 양 익(兩翼)의 사이에 있는 중앙 부분에는 12개의 거대한 방주(方柱)가 둘러싼 회랑(回廊)이 설치되었다. 회랑을 사이에 둔 양익은 남북대칭으로 설계되었다. 2010년 확장공사가 끝나면서 국가박물관은 총면적이 25만㎡가 되었고, 2011년4월부터는 더욱 완숙해진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 입장료는 무료란다. 하지만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것도 꽤나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진다. 안에 전시되고 있는 유물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로비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1층에 ‘고대중국 기본진열’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장 내려가는 우(愚)는 범하지 말자. 로비 중앙에 있는 안내데스크에서 팜플릿(pamphlet)을 꼭 챙겨가라는 얘기이다. 비록 1위안을 지불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관람을 위한 동선(動線)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를 지키지 못했던 난 역(逆) 방향으로 관람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앞뒤의 맥(脈)이 자꾸만 끊기게 되면서 새로 받아들이는 앎에 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 48개의 전시실과 106만 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은 중국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별로 포괄적인 전시를 하고 있다. 전시는 크게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로 나뉘어져 있고, 상설전시구역은 ‘고대중국 기본진열’과 ‘부흥지로 기본진열’로 구분된다. 지하 1층에 위치한 ‘고대중국 기본진열’의 전시는 북경원인을 만나면서 관람을 시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상고시기(?古?期)-하,상,서주시기(夏商西周?期)-춘추전국시기(春秋???期)-진,한시기(秦??期)-삼국,양진,남북조시기(三??晋南北朝?期)-수,당,오대시기(隋唐五代?期)-요,송,하,금,원시기(?宋夏金元?期)-명,청시기(明??期)로 구분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부흥지로 기본진열’에 가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현대까지의 중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 모든 전시물들은 상고시기를 제외하고는 시기별로 전시코너를 정치, 사회경제, 문화, 과학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 해 외교, 의학, 생활 등등 교과서적으로 나누어 놨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진한시기 이후로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로서의 중국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고구려나 발해뿐만 아니라 서하, 티벳 등 모든 민족들을 가능한 아우르려고 하고 있으며 특히 당은 다민족국가의 통일을 엄청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대중화가족론,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대놓고 선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명·청시기도 황제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주었던 책봉자료들을 엄청 많이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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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