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동쪽에 땅을 분배받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 지파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모두 마친 후에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요단강 서쪽 지역의 강가에 단(壇)을 쌓았습니다(10절). 누가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큰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파 반이 쌓은 단으로 인하여 요단강 서쪽에 정착한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의 백성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요단강 동쪽의 지파들이 우상을 섬기려는 단을 쌓은 것이라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단(壇, Altar)은 히브리어로 미즈베아흐(מִזְבֵּחַ)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단은 두 가지의 목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이나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만들고, 그 성막 안에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을 건축하여 성전 안에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제사와는 상관없이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특정 계약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단강 동쪽에 정착하게 된 두 지파 반이 이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이나 다른 신을 제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지파 반이 요단강 동쪽에 땅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것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4절~29절).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요단강 동쪽의 지파들이 무지하게 큰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요단강 서쪽의 아홉 지파 반의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동쪽의 지파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단을 별도로 만들었거나,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서쪽의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에 모여 요단강 동쪽의 두 지파 반과 싸우러 가려고 준비했습니다(12절). 그러면서 우선은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Phinehas)와 각 지파에서 지도자(천부장) 한 명씩을 뽑아 요단강 동쪽의 두 지파 반에게 가서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지적하게 합니다(13절~15절). 그리고 이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단을 쌓아 범죄하려고 하느냐고 질책합니다(16절). 그러면서 브올(Beor)의 죄악과 아간(Achan)의 죄악을 예로 들면서 그러한 죄악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악행인지를 지적합니다(17절~20절). 브올의 죄악은 민수기 25:1~9에 기록된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Shittim)에 머물 때 모압과 미디안 여인의 유혹을 받아 바알을 숭배하게 된 범죄의 사건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 염병이 돌아 24,000명이 죽게 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여호수아 7장에 나온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을 부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두 고통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큰 단을 쌓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비록 오해한 것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죄악을 범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까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죄악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요단강 서쪽에 땅을 분배해 줄 테니 요단강 서쪽으로 넘어와서 살라고 말합니다(19절). 이미 분배받은 땅을 더 나누어 요단강 동쪽의 지파들에게 주면 소유지가 더 줄어들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이 죄악을 저질러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공동체에 속한 그 누구도 죄악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서로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혹시 죄악에 빠지려고 한다면 잘 붙들어서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죄악에 빠졌다면 그 죄악에서 벗어나 잘 회복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한 공동체가 정결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 교회공동체의 지체들을 그러한 마음으로 돌보고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정결한 공동체로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서로 돌아보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돌봐야 할 지체는 누구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