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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0월29일 목요일 [(녹)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청주] 한 마리 여우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로마 8,31ㄴ-39
+ 복음 루카 13,31-35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봅니다. 우선 이 말마디의 의미가 이중적인 것 같습니다.
전체 문맥 안에서 이 문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환난과 박해와 순교를
이겨 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이고, 또 이 말씀이
순교자 축일에 자주 인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떤 위험을 겪더라도
우리를 이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배반하여 도망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보다 앞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나 충실함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친아드님을 내어 주신 사랑, 그 아드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당신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그
무엇도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항구하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혹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교까지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열렬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그 사랑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최선이 접목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주님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의 길을 달리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말씀은 한줄기 빛으로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어떤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처방을
내린다고 합니다.
“14일 만에 좋아질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정해서
매일 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처방은 실제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 의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과도한 생각이 우울증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요즘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삶에 있어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이겨내지 못해서 정신적인 아픔들을 겪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그 정신과
의사의 생각처럼 자기 자신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남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만을 바라보려 하고, 그래서 혼자 있는 ‘나’,
어려움 속에 처해있는 ‘나’에 대해 힘들어 하는 것이지요.
점점 더 개인화가 되어 가는 사회, 남보다는 내가 중심이 되는 사회,
사람보다는 물질이 더욱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지는 사회 안에서 이러한
증상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증상이라고
그냥 받아들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남’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앞서 정신과 의사가 말한 ‘매일 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등의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는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분명히 나만을 사랑할 때 느끼지 못했던
진정한 기쁨을 그 변화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과연 다른
사람들일까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으로 인해 꼴찌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셨지요.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열심히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함에
불안해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의 권위를 잃고 지금까지
누리던 것들을 빼앗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치
그분 편인 것처럼 말하면서 자신의 지방에서 쫓아내려고 헤로데의 위협이
있으니 떠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남을 위한 척 말은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한 말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던 위선을 스스로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그들이
과연 행복했을까요?
점점 더 정신적으로 어렵고 힘들어지는 세상 안에서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줄기 빛으로 비춰집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위하는 삶에서
‘남’을 바라보고 또 그들을 위한 삶으로의 변화가 진정으로 필요할
때입니다.
행복이란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데서 싹트는
것이다(윌리엄 조지 조던).
위 글에서 말한 정신과 의사는 100년 전의 심리학 거장, 알프레드
아들러입니다.
찬란한 이집트 문명(‘좋은생각’ 중에서)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원래 아프리카 북부에서 수렵 생활을 했다.
하지만 5~6,000년 전 아프리카 북부에 걸쳐 있던 강우 전선이 북유럽으로
이동하자 아프리카 북부와 남아시아 지역은 빠르게 사막 지대로 변해
갔다. 당시 그들이 환경 변화에 대응할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떠나지 않고 수렵 생활로 연명하기.
둘째, 수렵 대신 유목이나 농경 생활로 살아가기.
셋째, 거주지와 생활 방식 둘 다 바꾸기.
위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첫 번째, 그 자리에 남아 수렵 생활을 계속했던 부족은 오래가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두 번째, 생활 방식을 바꾼 부족은 스텝 지역의 유목민이 되었다.
세 번째,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밀림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농경과
목축 생활을 한 부족은 찬란한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일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가혹한 환경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사례로 이집트 문명, 수메르 문명, 미노스 문명, 인도 문명, 안데스 문명,
중국 문명을 든다.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민족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지금에 멈춰 서
있으면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조금씩
나빠지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찬란한 문명은 완전한 변화를
수용했기에 가능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젯밤 신부님들과 함께 했던 조그마한 선술집. 안주가 너무
맛있었어요.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37)
인생살이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복병을 만나기도 하고 위기도 겪고 아픔도 겪습니다.
때론 환난도 고통도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뒤를 돌아다 보면 그 난관들을 어떻게 이기고
여기까지 왔는지 신기합니다.
누군가 나를 숨어서 지켜봐 주고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준 덕택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됩니다.
바로 그분이 주님이시랍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도움을 주신 겁니다.
직접 혹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제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닥쳐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분이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주님께 깊이 감사드립시다.
또 그 주님이 대신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들을 기억합시다.
오, 주님! 나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랑으로 온갖 것을 무릅쓰고 걷는 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루카 13,31-35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사랑으로 온갖 것을 무릅쓰고 걷는 길
길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관계를 발생시켜줍니다. 길은 어떤 목표를
기준으로 출발점과 도착점이라는 이름을 지니기도 합니다. 길은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표지요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멈추거나 방향을 바꿔야 할 때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무릅쓰고 계속’ 걸어야 할 길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사랑으로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생활 끝 무렵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역설적으로도 그분을 반대하던 바리사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헤로데가
죽이려 하니 어서 그곳을 떠나십시오.”(13,31) 하고 닥친 위험을
알려드립니다.
헤로데 뿐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경탄하고 그분께 몰려들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빼앗길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두려움과 걱정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셨음에도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만을 생각하시며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13,33) 이
말씀에는 죽는 한이 있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소명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무릅쓰며
걸으셨고 기꺼이 목숨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죽어야 할
나의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지금 바로 여기 함께 살아 숨쉬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삶의 자리일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버겁고 늘 고통과
걱정거리가 밀려오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오직 사랑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랑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일상의 수고로움을 견뎌내고 자신의 십자가와 이 시대의 고통과 짐을
지고 갈 힘은 결코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와 이 사회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굳건히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희망의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1-35)
떨어지는 고운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진지한 마음으로 물어보게 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된 여정의 끝임을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언지를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오늘도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삶이 무언지를 당신의 마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다시 깨우쳐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부분은 아직도 주님의 뜻에
응답하지 않는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들 곁에는 우리를 사랑으로 모으시는 우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모으시는 주님 사랑에
동참하며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여 봅니다.
모든 십자가에는 하느님 사랑이 스며있습니다.
십자가로 모으시는 주님의 뜻에 응답하는 길은
우리또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은
참된 사랑을 일깨워주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십자가로 다시 돌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모으시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십자가의 회개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우리의 주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오늘입니다.
십자가의 오늘은 모든 것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모든 것을 바치는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한 마리 여우|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 13,31-35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가12,50).
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 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가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입니다.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영화 ‘마션’을 보았습니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대원이 살아서 지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극한의 날씨를 이겨내고, 외로움을 견디어내고, 다가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삶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대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구에서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서 구조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8000천만 킬로 떨어진 화성에 남겨진 대원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구와의 소통이었습니다. 지구에서 알고 있다는,
지구에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은 결국 살아서 지구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어느 날 보석을 만드는 세공인을 불러 자신을
기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답니다. “내가 큰 승리를 거둬 환희를 주체하지 못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동시에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 하나를 반지에 새겨 넣어라.” 보석세공인은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런 양극의 상황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촌철살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인은 결국 지혜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반지에 새겨 넣으라고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솔로몬 왕자가 말했답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 중에 그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께서도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내용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한국에서는 호세아 수녀님께서 이 글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드셨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고통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외로움에 잠 못 이루는 분이 있다면 한번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노래를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도 같은 의미의 말을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냉담의
원인은 ‘환난, 박해, 위험, 칼, 굶주림,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악의 세력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신문과 방송’은 제2의 신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의 종교에 익숙해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종교와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칫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열쇠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품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도 참 다양합니다. 학교 공부 때문에, 회사일이
바빠서, 오랫동안 안 나가니까 두려워서라고 말들을 합니다. 또 많은
분들이 나중에는 성당에 나오겠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나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의 마음도 안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건강,
재산 모두 다 언젠가는 놓고 가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실패해서 2억여 원의 빚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모두 갚았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7가지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신문에 광고지 넣는 일, 신문 배달하는
일, 학원버스 운전하는 일, 길에 버려진 폐지 줍는 일, 목욕탕 청소 하는
일,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바쁘게 하루를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들은 월급날이 한 달에 한번인데 자신은 여러 번이라 더 기쁘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자신을 위해서 저금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가겠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에 7가지의 일을 하면서도 누굴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한
분이 신앙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더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헛되이 버린
시간들은 없는지, 내가 나의 영혼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도 지난봄부터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의미 있는 일에, 보람 있는 일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에 나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우시면서 하신 말씀에 감탄!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로 감싸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경계하는 암탉을 보면 마음속에서 조용히 감탄의 향기가 피어납니다.
사람도 그래요. 평생 내리 사랑을 자식들이 얼마나 알아주던가요.
하느님이 입김을 불어 영혼을 넣으신 인간에게 내리 사랑 당연하지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보여주신 예수님, 우시면서 하신 말씀에 감탄!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자체로 내리 사랑을 이렇게 보이시니 또 감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카 13,3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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