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을 전한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에도 그 잎은 푸르고,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자신만 호의호식한 채 그 집 앞에서 비참하게 고생하던 라자로를 외면한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는다. 그 반면 죽은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으면, 대칭적인 무늬를
만드는 회화 기법인 '데칼코마니'가 생각납니다. 데칼코마니의 한편은 현세이고, 다른 한편은 죽은 뒤의 삶입니다. 현세에서 부자가 겪는 즐거움과
라자로의 비참함이 죽은 뒤의 삶에서는 서로 역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한쪽을 보면 다른 한쪽을 그려 낼 수 있습니다.
죽은 뒤의 삶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가련한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라자로를 가르는 메울 수 없는 골짜기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현재의 삶에서 죽은 다음에 만나게 될,
건널 수 없는 골짜기에 대응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수신자는 바로 부자입니다.
저승에 있는 골짜기는 부자가 살아 있는 동안 현세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뜻이 이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그 골짜기는 다름 아니라
스스로를 다른 이의 고통에서 분리시켜 놓는 무관심하거나 무정한 마음을 통하여 서서히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리'라는
포콜라레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온 세상 곳곳에 수많은 강이 흐른다/ 길고 깊게 흐르는 강
우리를 가른다/ 서로 물 건너 마주 바라보지만 만나지 못한 채/ 그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 어찌 강 위에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에 다리를 놓아 서로 만나지 않는가/ 어찌 다리를 놓지 않나."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은 자신을 쉽게 남들과 구별 짓고
그들이 닿지 않는 곳에 있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불행의 골짜기를 만드는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강을 이어 주는 다리를 놓아 서로 진솔하게 만나는 삶, 서로의 짐을 덜어 주며 돌보는 삶,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무나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햇살이 비치는 쪽을 향해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실내에 두어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밝은 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 역시 밝은 쪽을 좋아합니다. 이는 밝은 햇살뿐만 아니라, 성격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보다는 밝고 쾌활한 사람에게 훨씬 호감과 관심이 간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비추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밝고 쾌활하게 살아야 할까요?
이렇게 밝고 쾌활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물질적인 이득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남을 향한 사랑과 남을 위한 배려에서 얻는 행복은 매우 오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함께 살아가야 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 톨게이트 직원에게 저는 먼저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또 계산이 끝난 후 떠날 때에도 큰 소리로 “수고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먼저 인사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화내는 것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도 더 밝은 목소리로 제 말에 응답해주십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작은 배려 하나만으로도 모두가 즐거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만 행복하길 원할까요? 나만 행복할 수는 없는데 말이지요.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살아 있을 때는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되지요. 반면 라자로는 살아 있을 때는 온갖 고통 속에 있었지만, 죽어서는 아브라함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 붙는 지옥 속에 살고 있는 부자가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자기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경고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때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부자라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웃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저승에서 고통을 받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구걸할 힘도 없어서 비참하게 누워있었던 라자로였지요. 그러나 이 부자는 이 라자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의 라자로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 무관심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자기만 즐겁고 자기만 호화롭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참하게 보였던 라자로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사람인 것이지요.
우리 주변의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만을 생각해서는 그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사랑도 실천할 수 없음을 기억하며, 나를 위해서라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지함을 두려워하지 마라. 엉터리 지식을 두려워하라(파스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을 뒤바꾸시는 하느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부자를 탓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축복이 곧 하느님의 축복이고 지상에서의 불행은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그들은 누군가가 나병이나 중풍병 같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그가 뭔가 크게 잘못했기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걸로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입니까?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건강할 때도 있겠지만, 어쩌다보면 본의 아니게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환자 입장에서 참으로 억울했습니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병고와 맞서 싸우느라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세상은 자신을 중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바리사이들의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하신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다음 세상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세리들은 천국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착한 사람들에게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이 술술 잘 풀려야 하고 악한 사람들의 인생은 무조건 꼬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누군가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면 곧 그 사람이 악하다는 표시로 삼았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비인간적 사고방식, 무자비한 논리를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뒤바꿔놓으십니다. 지상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았던 부자는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극도의 갈증 속에서 물 한 방울조차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상에서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해오던 라자로라는 거지는 하느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런 모습은 요즘 이 지상에서조차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는데 하루 지나고 나니 지옥입니다. 어제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렸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우여곡절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오늘 부자라 할지라도 자만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유세 부리지 말고, 없는 사람 무시하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베풀고 나누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노력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 삶이 아무리 힘겹다 할지라도 하느님 자비의 품이 멀지 않기에 좀 더 힘을 내며, 좀 더 인내하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한 가지 하느님의 시각과 우리 인간의 시각을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인물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우선적인 평가 기준 가운데 하나가 재물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가 기준은 우리 인간의 기준과는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언젠가 우리네 인생의 제2막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다 바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지상에서의 첫째가 꼴찌가 되고 맙니다. 부자가 가난해지며 권세 있는 자들이 낮아집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권세를 얻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하게 됩니다.
그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그릇된 생각을 뒤바꿔놓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 판단해왔는지를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지상에서의 삶이 견디기 힘들만큼 혹독한 분들, 극도의 가난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고통을 겪어 오신 분들, 부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힘내시기 바랍니다. 더 큰 희망으로 무장하고 끝까지 견뎌나가시기 바랍니다.
‘고통받는 이’를 위한 사람 -신헌문 신부-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를 아시지요? 그는 저와 같은 수도회 사제로서 로마 유학동기이며, 서품동기입니다. 유학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방학에 한국이 그리워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그는 선교를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 체험을 하고 싶다며 수단으로 떠났습니다. 2개월 후 그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왔고, 저는 한국에서 가져간 김치와 젓갈로 일주일간 죽을 끓여 간호를 했습니다. 건강했던 그는 금방 일어섰고, 그 후에 아프리카 체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꼬마에게 약처방이 필요해 약을 주며 하루에 세 번, 밥 먹은 후에 먹으라 했답니다. 근데 그 꼬마는 눈만 깜빡일 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답니다. 영어를 잘 못했나??? 궁금해하다 아차 싶었답니다.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아이에게 끼니 때마다 먹으라 했으니…. 그래서 ‘해가 저쪽에 있을 때 한 번, 머리 위에 있을 때 한 번, 저쪽 넘어 갈 때 한 번!’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가더랍니다. 그는 결국 그런 아이들의 눈동자에 이끌려 아프리카 수단 톤즈로 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에 해당하나요?
혹 가난한 라자로를 거절한 부자는 아닌지요?
비유 속의 부자, 이어지는 이야기 -김태완 신부- 부자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날마다 호화롭고 즐겁게 살면서 자신의 대문 앞에 사는 라자로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라자로와 저승에서 만났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편히 쉬고 있는 반면 자신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차마 자신을 고초에서 구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다만 라자로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들로 배를 채우려고 했던 것처럼 라자로가 손끝으로 물을 찍어 혀를 식히는 최소한의 배려만을 청합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부자는 뜨거운 불에서 단련을 받습니다. 조금씩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갑니다. 자신의 형제들이 생각납니다. 형제들만은 이러한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라자로가 그들한테 알려주어 형제들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청합니다. 아브라함의 거절에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이야기는 끝이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더 말씀하셔서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드리는 청 다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게 알려주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끝으로 다른 사람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 십자가로 모든 이를 끌어안으신 것처럼….
그렇다면 부자의 절규를 마음에 새깁시다. 부자의 말을 믿읍시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나섭시다. 그들을 도와줍시다. 우리 모두 고통스런 곳으로는 가지 맙시다.
누가 우리의 라자로인가? -김찬선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말이 있지요.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상빈벌부賞貧罰富라는 말도 가능할까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부유한 사람에는 벌을 준다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병들고 가난한 라자로와 부자의 얘기는 상빈벌부의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가 진짜 겨냥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특히 회개의 사순시기에 이 복음을 읽는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고, 바뀌지 않으면 라자로와 부자처럼 인생 역전한다는 얘기고, 마음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 행불행이 바뀐다는 얘기며, 이승에서 바뀌지 않으면 저승에서 결정적으로 바뀐다는 얘깁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얘깁니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깁니까?
그 얘기는 거의 결코 아닙니다. 부유하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모르기 쉽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어느 정도 맞겠지요. 그러나 그런 게 아니고 부자는 무조건 가난해져야 한다는 거라면 분명 그리고 정말 “아니올시다.”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외면하는 행복은 사실은 불행이기에, 돈이 없는 게 불행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게 불행이기에 나눔이 없는 단절에서 가진 바를 나누는 삶으로 바뀌라는 얘기지요. 이렇게 바뀌어 라자로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게 회개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라자로입니까?
내 문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지금까지 문을 닫아걸었던 사람들, 관계를 끊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문밖의 사람들이 되어버린 ‘내 가족이 아닌 사람들’. 아니, 가족이지만 너무 가까워 서로 너무 찔러 대니 서로 각방 쓰거나 내 마음 밖으로 밀어낸 내 남편 또는 내 아내. 너무도 괴롭긴 하지만 병들고 냄새 나서 도저히 집에 모실 수 없어 노인 요양원에 모셔 버린 나의 부모.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서 도와주어야 하지만 도울 수는 없고 마음만 괴롭게 하니 차라리 못 본 체 외면하는, 노숙인들, 외국인 노동자들, 새터민들과 북녘의 우리 동포들.
이들이 다 우리의 라자로입니다.
부족함을 느낄 때 만족함이 필요한 이유 - 송동림 신부- 우리는 ‘부족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능력 · 노력 · 실력 · 재력 · 사랑 · 관심 등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채워지면 마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 간절히 바라던 것이 채워졌을 때 일순간 만족할지는 몰라도 오래지 않아 또 다른 결핍을 느낀다. 문제만 다를 뿐 다시 목마름을 느낀다. 이는 완전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한편 신앙인의 기도 내용을 보면 대부분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가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만으로는 만족에 이를 수 없다.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한 청원과 더불어 이미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한 감사가 균형을 이루며 기도할 때 만족하게 되고 더 풍요로워진다. 특히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거저 주어진 본능적 축복이다. 마음을 바꿀 때 곧바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족함 안에서도 행복을 느끼지만 그렇지 못하면 부족함이 채워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삶의 기쁨은 만족하는 사람한테서 넘쳐난다. 그러기에 부족함을 느낄수록 만족하려 하고, 반면 만족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에만 시선을 두면 결코 나누지 못하고, 자신의 만족함에만 마음을 두면 있는 것마저 썩어간다.
오늘 복음에서 살아 생전 욕심 많던 부자는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 그는 뒤늦게 깨닫고 살아 있는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 우리가 조금만 비우면 자신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해질 수 있다. 물질적으로 만족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거나, 정신적으로 부족함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만족해할 때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는 듯하다.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었습니다.
“야, 넌 요새 무슨 일 하냐?”
이 물음에 그 친구는 뻔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 그냥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지 뭐.”
“그래? 그런데 니가 전에 뭐 했더라?”
그러자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네요.
“놀았잖아.”
남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위축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스스로 실패자라고 하면서 심한 자책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하긴 이러한 말도 있더라고요.
20대가 취직하면 가문의 영광, 30대가 직장 다니면 동네 잔치할 일, 4,50대가 아직 퇴직 안했으면 국가적 경사, 60대가 아직도 은퇴 안했으면 세계 8대 불가사의.
그러나 이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입니다. 실패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 갇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어쩌면 이미 왔는데 내가 둔해서 아직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포기와 좌절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희망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 행복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라자로의 이 세상 삶은 어떠했습니까?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은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 곁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였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시 상황이 역전되어 불길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따라서 우리는 오늘 독서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바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희망을 간직하며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이 바로 내가 되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외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내적 사고의 표현이자 완성이다.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려면 생각이 훌륭해야 한다(윌리엄 엘러리 채닝).
기다려보세요 -김효준신부-
두 개의 물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과 희망과 건강과 부유함의 물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슬픔과 절망과 질병과 가난의 물통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이런 두 개의 물통을 함께 가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기쁨과 희망과 건강과 부유함의 물통이 주어질 것입니다. 물통이 채워진 만큼, 기쁨과 희망과 건강과 부유함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게서 슬픔과 절망과 질병과 가난의 물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물통 역시 내가 삶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채워질 것입니다.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왜 이런 고통과 절망의 물통만이 주어지냐고 울부짖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평하신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시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러니 애태우며 조급한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거두는 분이시고 또한 베푸는 분이십니다. 무관심과 단절의 지옥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예레미아서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의 대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당연히 하느님께 떠나 있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사막의 덤불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는 하느님의 복을 받아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덤불과 물가에 심긴 나무.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사막의 덤불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막의 덤불이 되어본 사람, 영적인 사막의 그 쓰디씀과 메마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대조입니다. 잘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부자와 가난한데다 종기투성이로 하루 살기가 괴롭기만 했던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는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 됩니다. 부자는 저승의 불길 속에서 라자로가 손가락으로 찍어주는 물 한 방울을 애타하는 처지가 되었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에서 위로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역전이 되었습니까?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루카의 관점이 다분히 배어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다른 어느 복음보다 루카 복음에서 더 강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표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기에 저승에서 고초를 받고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나쁜 것을 받았기에 위로를 받는다지만 속 내용은 무관심과 단절이 인생 역전의 이유입니다.
첫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쉬움 없었기에 하느님 나라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저승에서 천상의 물 한 방울에 갈증을 느끼듯 이 세상에서 천상의 물을 갈망했다면 하느님 나라와 그렇게 담 쌓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라자로와의 단절입니다. 아니 라자로로 대표되는 문 밖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자로는 부자의 문간밖에 살고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라자로가 간절히 바랐다는 것은 부자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부자가 잘 주었다면 간절히 바랄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겠지요.
라자로의 가난은 부자가 주지 않은 결과로서의 가난입니다. 우리는 깊은 숙고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그의 운명이거나 그가 벌지 않아서 가난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그야 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가난은 우리가 주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내 집 안에서 나의 가족과 아무 부족함 없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나는 내 문 밖의 존재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이 단절이 누구도 건널 수 없는 저승과 천국의 단절이 되고 이 세상에서 라자로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부자는 저승에서 물 한 방울조차 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저승에 간 이유는 부자였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줄 수 있었음에도 주지 않았던 그 이유가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이 사순절, 우리의 사랑 실천에 대해 돌아봅니다.
무신론자 -전삼용신부-
예전에 청년 레지오를 할 때였습니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우리들은 그 집에 가서 밤새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족 간에 싸움이 붙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한 아저씨가 고의로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우리는 그 분을 집 밖으로 데려나와 싸우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습니다. 계속 들어가 싸움을 벌이려고 하자 저도 힘으로 그 분을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그 분은 힘으로 우리를 뚫고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야.” 우리가 성당 다니는 청년들임을 알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나는 너희들이 믿는 예수가 아니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라면 당신 자신처럼 행동하시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렇지만 당신은 믿는 사람이 아니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것은 이런 말을 신앙인들에게서도 자주 들었습니다. 가끔은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는 식으로 말을 들으면 “난 예수님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교만한 것인 양, 혹은 예수님은 인간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인 양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 분과 한 몸을 이룬다고 믿습니다. 그 분과 한 몸을 이루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과 한 몸이 아니고 그 분은 그 분이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 분이 하셨을 것처럼 살려고 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신자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처음의 예에서 정말로 믿지 않으시는 분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과 한 몸은커녕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어떠한 기적도 그 사람에겐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은 거지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겉으로는 믿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인공이 거지 라자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부자이고 예수님은 그를 통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성경말씀대로 살았다고 한다면 거지 라자로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절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먹고 즐기라고 가르치지 않고 구약에서조차도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살려내어 자신의 형제들은 자신처럼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겉으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제가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당신 때문에 나도 지옥에 왔다고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자신 때문에 구원받게 된 사람들 때문에 더 행복하게 될 것이고 지옥에서는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오게 된 사람 때문에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비유말씀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라자로’라는 이름을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라자로를 죽음에서 불러 살려내십니다. 그러나 역시 바리사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즉,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성경을 믿지 못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들도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은 ‘나는 예수님이 아니니까.’라는 식으로 넘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먼저 믿지 못하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나의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먼저 성경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성체만 영한다고 다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체는 말씀이고 말씀은 성체로써 우리 몸과 하나를 이룹니다. 몸만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하나를 이루어야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그대로 살려고 한다면 나를 버려야합니다. 그렇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애야,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지 않았느냐?"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토록 심한 고통(타는 불꽃 속에서의 갈증)을 겪고 있을까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너무도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닌 재산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 재산을 이용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았습니다. 의식주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이 있으면 액수를 따지지 않고 사다가 먹었습니다. 옷은 오로지 최고급 명품으로만 잔뜩 치장했습니다. 집은 임금님 대궐처럼 지었습니다. 매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냥 즐겼습니다. 오직 제 한 몸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즐겼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진귀한 음식을 즐기고 있던 바로 그 식탁 밑에만 하더라도 라자로라는 거지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엎드려서 "언제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동네 개 보듯이 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뜯고 있던 닭다리 하나를 크게 선심 쓰듯이 밑으로 던져주었습니다. 비유에 전개된 상황을 머리 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치가 떨리지만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자의 가장 큰 과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잘 나누어 쓰라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돈이면 다인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하게도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가서는 지옥불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불평등과 불의, 의인의 고통,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움을 우리 역시 나몰라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성실히, 꾸준히, 정직하게 일해서 획득한 부와 명예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부자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난 후의 처신은 더욱 중요합니다. 본인이 열심히 일한 탓으로 부자가 되기도 했겠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그 부는 너무나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떳떳하고 영광스런 부와 영예, 재능 앞에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신 그 부와 명예, 재능을 하느님께 도로 돌려드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부자,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부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누지 않고 제 한 몸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부자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예수님께서는 잘 묘사하고 계십니다. 이 지상에서 너무나 호의호식했기에 저 세상에 가서는 물 한 방울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물 한 방울만 주셔서 타고 있는 혀를 축여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고, 작은 손길이라도 보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오늘 하루가 되길 빕니다.
장례식장에서 검시관이 죽은 시신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구의 시신을 보는 순간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신들의 얼굴을 보면 빙그레 웃는 표정이었거든요. 이 사람은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데 이렇게 웃다가 죽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첫 번째 사람은 너무 가난하게 살았는데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었습니다. 몇 십억을 벌게 되었으니 너무 좋아서 웃고 춤추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조사를 해 보니 아들이 3년간 재수를 했는데 3년 만에 서울대에 합격을 해서 너무 좋아서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세 번째 시신도 “히~” 하고 웃고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번개를 치는데 누가 자기를 사진 찍어 주는지 알고 “히~” 하고 웃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 이야기를 보면서, 누구나 이렇든 저렇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백억의 인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 중에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우리 역시 조상님처럼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언젠가는 떠날 것인데,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을 잘 준비하고 사는 것일까요? 먼저 살다가 떠나가신 조상님들이나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금 우리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라자로는 살아 있을 때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부자는 반대로 부유하게 살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큰 죄를 지었을까요? 라자로는 단순히 가난하게 살았던 이유만으로 죽어서 복을 누리는 것일까요?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라자로는 비참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어떤 원망이나 불평이 없었습니다.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그는 무력했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께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즉, 그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말없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들어서서 고통을 받자마자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라자로하고는 현저하게 차이난다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부자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바랐다는 내용의 성경 말씀으로 보아, 부자 곁에 라자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자로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갓 동물인 개가 그를 핥아도 가만히 놔두는 무관심을 보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바로 사랑에 있었음을 복음에서는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깊은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담긴 사랑. 그 사랑의 크기로 인해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할까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강하고 고결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진정한 용기다.(몽테뉴)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양승국신부-
<기회>
그리스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에 가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부조 조각화 한 점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작품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들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명과 깨달음을 주곤 한답니다.
주인공의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외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났든지, 아니면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던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축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좋은 기회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해 어려운 이웃도 돕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십시오. 라자로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가 자신의 식탁 바로 아래 기어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기회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우리 역시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다시금 새 출발할 있는 기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불행한가?-김찬선신부- 루카 복음에만 있는 이 이야기는 오해와 논쟁의 소지도 많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많은 생각 중의 하나는 누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가입니다.
이 복음은 라자로가 가난하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난하고 고생만 하면 무조건 천당 간다는 그런 얘기를 하려 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부자가 불행하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불행한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동생들이 회개하지 않아 자기처럼 지옥에 떨어 질 것을 염려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 부자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부자가 주인공이고 라자로는 조연임에도 부자는 이름이 없고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지옥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처소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름이 없음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고요.
그러면 왜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것은 그가 담장 안의 부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집 대문 앞에 있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에게는 빵부스러기도 주지 않을 정도로 자기 가족밖에는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장 안과 밖의 관계는 끊어지고 소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으며,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담장 밖에 아무도 없고, 죽고 난 뒤에는 그의 집 높은 담장만큼 깊은 심연이 나자로가 있는 천당과 부자가 있는 지옥 사이에 가로놓여 부자가 천당에 갈 수도 없고 나자로가 지옥에 가 부자에게 물 한 방울 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단절, 이것이 부자의 불행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돈이 없는 것과 사랑이 없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불행한가? 돈이 많은 것과 사랑이 많은 것 중 어떤 것이 더 행복한가?
줄 수 있는 돈이 없음도 불행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줄 마음이 없음이 진짜 불행이고 줄 사랑이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불행합니다.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정배 목사-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에서 내려온 율법, 특히 가난한 이들을 홀대하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을 환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죽은 후 상황이 반전되는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고 부자는 마실 물 한 모금 없는 지옥 불에 던져져 있습니다. 부자는 이런 정황을 자식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해 뭇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지요. 이미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듣지 않은 결과가 바로 부자의 운명이란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아주 소박하게 재삼 힘주어 말하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누군가가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이 함께하는 자리는 다음 세 곳 뿐이라고 하더군요. 하나는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례의 자리이며 마지막 하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부자와 거지 라자로로 대변되는 사회인 것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벌어지는 현실이 고통스럽습니다. 사순절 기간을 보내는 우리는 지금 부자의 절규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고통 받는 곳으로 그들이 오지 않게 하소서’.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에는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셔서 한 달에 한번 영성면담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성지도 신부님 중에서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사제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영성면담을 하면서 이 신부님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영성 면담하는 방식을 말씀드려 볼게요.
우선 신부님 방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신부님께서 시작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딱 세 글자만 말씀하시지요.
“말 해 봐.”
그러면 저는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영성적인 면들 또한 생활적인 면들... 기타 아무 이야기나 한 시간 동안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말이 한 시간이지, 상대방은 고개만 끄덕이고 있고 저만 한 시간 동안 말을 한다는 것이 쉬울지……. 저는 지금의 고민을 신부님께서 좋은 방향으로 제시 좀 해 주셨으면 했는데, 신부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들어주실 뿐이었지요.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신부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건 직무유기다. 어떻게 아무런 지도도 하지 않고 나만 말을 하게 하는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신부님이야말로 가장 좋은 상담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글쎄 제가 1시간 동안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의 문제는 나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1시간 동안 신부님께 이야기하는 과정 안에서 정리를 하고, 그 해결책까지도 스스로 얻을 수가 있었지요.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한 시간 동안 듣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한 번도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모두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듣는데 많이 인색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을 하는 데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외면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이웃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떠올릴 때,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은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 부자를 떠올려 보세요. 그 부자가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복음의 후반부에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을 볼 때 분명히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승에서의 고통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힘들게 자기 집 앞에 왔으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자기만 드러내는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만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이웃의 말을 얼마나 듣고 있었을까요? 즉,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고 있었을까요? 그러한 무관심이 나를 저승의 고통 안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제1독서의 하느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 봅시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빠다킹신부
교회의 사랑 -허찬란 신부- 라자로’란 이름 자체가 가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을 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거로움과 병충해 처리문제, 가격 등을 이유로 관행대로 농사를 지었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뜻을 따랐습니다. 빚도 많았고 몸도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결국 농토는 우리농촌살리기를 위한 기준을 채웠고 농산물도 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전국 생협과 우리농뿐만아니라 도시본당 직거래를 실시하였고 인기도 높았습니다. 우리는 목포로 배를 타고 건너와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새벽 2시경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강남대로를 한 바퀴 돌다가 잠잘 곳이 없어 결국은 일원터널 위나 양재로의 어느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와 라자로 형제, 곧 불쌍한 농사꾼을 받아주는 강남의 여관은 없었습니다. 복음의 부자, 아니 세상의 사람들이 갈 곳 없는 라자로, 상처가 박힌 라자로를 외면했듯이 라자로 형제와 저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새벽까지 술에 흥청망청이었고, 잘 곳을 찾다 도로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기껏 두세 시간 자다 보면 청소차가 와서 잠을 깨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농산물을 받아주는 교회의 사랑에 깊이 감사했고 어디를 가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무관심이라는 죄 -이동훈 신부- 필자가 사목하는 ‘살레시오의 집’은 정신지체장애우 시설이다. 장애우 50명에 그들을 돌보는 직원이 34명이다. 직원 수가 다른 시설에 비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직원들이 장애우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며 세세하게 마음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큰 사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장애우들이 서로서로 돕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다. 부자가 생전에 악하게 살았다거나 거지인 라자로가 착한 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부자는 지옥, 거지는 천국이라는 도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부자의 죄는 헐벗고 굶주리는 라자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라자로의 모습을 보면서 ‘거지니까 해어진 옷을 입고, 병들고, 땅에 떨어진 것이나 주워 먹고 사는 것이지’라는 생각으로 그가 겪는 어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사실, 이 무관심이 부자를 지옥에 떨어지게 한 죄다. 똑같은 유리지만 창문에 달린 유리는 밖을 볼 수 있고, 거울은 자신만을 비춘다. 창문에 달린 유리는 투명하기 때문이고, 거울은 뒷면에 아말감을 바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도 맑지 못하고 무언가 끼어 있으면 자신만을 바라보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돕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속 때부터 닦아야 한다.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 이웃의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는 사랑을 실천할 때다. 우리의 도움으로 그들이 부활의 삶을 살고, 우리 또한 그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 -강영구신부-
스승 예수님, 당신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루가12,15) 그렇습니다, 예수님. 돈이나 재물이 생명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생명을 보장해주십니다. 하느님께 歸依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빠져서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처럼 멸망에 이릅니다.
돈과 재물은 물과 같습니다. 독사가 마신 물은 毒이 되고, 꿀벌이 마신 물은 꿀이 됩니다. 毒은 사람을 죽이지만 꿀은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탐욕에 빠진 사람이 지닌 돈과 재물은 毒이 되어 자신을 죽이고, 이웃과 형제도 죽입니다. 탐독貪毒은 사람의 영혼과 가슴을 병들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탐독貪毒은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탐욕에 빠진 자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이웃과 형제들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배고프고 가난한 형제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貪毒은 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를 만듭니다.
꿀벌이 꿀을 만들듯이,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는 돈과 재물로 천국을 만듭니다. 하느님께 귀의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돈과 재물로 하늘에 보화를 쌓습니다. 그의 돈과 재물은 배고픈 형제의 밥이 되고 빵이 됩니다. 그의 돈과 재물은 병든 형제를 치료하고, 아픔을 낫게 합니다. 그의 돈과 재물은 가나난 형제의 따뜻한 옷이 되기도 하고 집이 되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과 재물로 너와 나 사이의 구렁텅이를 매웁니다. 돈과 재물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다리를 놓는 사람은 하늘나라로 건너갑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아서 청정심淸淨心의 빈자貧者가 되게 하소서. (一明)
이웃을 위한 마음과 눈과 귀 -박상대신부- 마태오, 마르코와 함께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루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루가 고유의 특수사료들이 많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선 예수의 전사(前史)가 그렇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여자들, 죄인들에 대한 자비와 관심을 소재로 삼은 대목들도 그렇다.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는 모습과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루가복음의 고유성에 속한다. 루가는 세상의 재물을 놓고 부자와 빈자, 소유와 포기에 관한 문제를 큰 관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죄인들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에 관한 다양한 비유들도 빼놓을 수 없는 루가의 특수사료들이다. 특히 루가복음 15~16장에는 다른 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유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잃었던 은전의 비유’(15,8-10), ’잃었던 아들의 비유’(15,11-32), ’약은 청지기의 비유’(16,1-15), 그리고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6,19-31)가 그것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선 부자와 빈자에 관한 비유이다. 오늘의 비유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부자와 빈자가 처해있는 이승의 모습을, 2부는 저승에서의 역전된 상태를, 그리고 3부는 이승과 저승의 관계를 보여준다. 1부에서 부자와 빈자의 대조가 매우 날카롭고 격한 색조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빈자는 빈털터리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고, 게다가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을 만큼 비참한 삶을 인내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19-21절) 그런데 2부는 죽음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후에 부자와 빈자의 상태가 완전히 역전된 것으로 전개한다. 빈자는 죽자 바로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아브라함 품에 안기었다는 것과 부자는 죽어 그냥 땅에 묻혔다는 대비(對比)가 역전의 전초전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똑같은 저승에서 빈자의 상태와 부자의 상태가 큰 구렁텅이(카스마)를 사이에 두고 전혀 교류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이는 3부의 이승과 저승의 관계로 다시금 강조된다. 저승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 부자가 이승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이승에서의 삶은 이승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부자이건 빈자이건 간에 어떤 모양으로든 교류가 가능하다. 오늘 비유에서 치부(致富)나 부유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관건은 사람자체에 있다. 바로 자신이 가진 부(富)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 말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즉 자기 집 문간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부스러기나 주워먹고, 개들에 의해 종기까지 핥음을 당하는 한 거지를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그 신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부자 말이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하느님 나라에 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모세도 예언자도, 누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부자는 철갑을 뚫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동(動)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비록 이승에서 부자였지만 저승에서는 참으로 가난한 빈털터리였던 셈이다. 세상을 살면서 타인을 위한 눈도, 귀도, 마음도 없는 자는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라자로의 처지가 천국에 빗대어 표현되었으나 부자의 처지가 굳이 지옥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비유가 빈부의 극심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다만 저승에서 반전된 처지를 통하여 이승의 부자들을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비유는 사실 ’예수의 말씀을 비웃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16,14)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앞서간 대목들을 함께 살펴보면 재산의 소유가 제자로서의 예수님 추종을 줄곧 위협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하게 함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재물의 소유가 이승에서는 안위와 행복을 약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모르는 저승에서의 고통과 불행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승에서의 빈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빈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의지요 선택이며 사랑이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루가 16,19-31) -유 광수신부-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이마로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개들만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부자가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 곳 가고, 갖고 싶은 것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돈 가지고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부자가 되면 얼마든지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니 부자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부자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물이 곧 하느님이요,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란 어떤 사람이고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란 이기적인 인간을 말하고 가난한 라자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우선 이기적인 인간인 부자에 대해 묵상하자.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가 12,16-21) 복음에서 부자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남과 나누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기적인 인간을 말한다. 즉 부자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부자들이다. 생명, 시간, 건강, 능력, 이웃, 아름다운 자연,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연인,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많은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친구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저녁에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 온갖 다양한 아름다운 꽃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가? 부자란 이 모든 것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다." 부자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즉 부자란 하루 24시간을 몽땅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루 24시간을 자신이 먹고 마시는 일에, 친구를 만나는 일에, 자기 취미생활에, 일을 하는 데에, 여기저기 구경하는 일로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에,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부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 많은 시간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또는 하느님에게는 인색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가난한 라자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가난한 라자로인 예수님은 부자인 인간의 문 앞에 버려져 있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와 계신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인 눈을 가난한 이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으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 35-40) 왜 예수님은 가난한 라자로가 되셨는가? 예수님이 처음부터 가난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셨기 때문에 가난한 분이 되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삶에 대해 바오로는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고린 후 8,9)라고 설명해 주셨다. 결국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얼마나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부자요, 이웃에게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늘 부자로 살 것이고, 가난한 이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비록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늘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생활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요, 정말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늘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물 한 잔도 청하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아니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도 인간을 위해서 다 흘리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철저하게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이 지상의 생활하시는 동안에도 가난한 삶을 살으셨고 죽으실 때에도 몸에 걸쳤던 옷까지도 다 벗기우신 채 가난한 죽음을 맞으셨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라고 끝까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그 순간에도 당신의 죽음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 가는 왼쪽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