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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우(三胎牛)와 나
김 선 구
삼태우란 우리 시험장에 키우던 소 이름이다. 음양오행에 따라 작명한 것이 아니고 한 번에 송아지를 세 마리 낳았다 하여 부쳐준 이름이다. 그 소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이다. 원출생지가 그 곳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낳은 후 팔려 와서 그 곳에서 자랐는지는 모른다. 해방 후 김화군은 북한 땅에 편입되어 버렸으나, 휴전선 이남에 남은 일부 땅이 철원군에 편입되어 김화읍이 되었다. 그 곳 마을 한 농가에서 한우 암소가 송아지 세쌍둥이를 낳았다.
성모 마리아가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곧 마을에 화제가 되었다. 한배에 두 마리 낳는 경우도 드믄 일인데 세 마리를 낳았으니 집안의 대 경사였다. 이 사실을 어느 신문기자가 기사화 하는 바람에 국무총리 실에까지 알려졌다. 소 한 마리가 농가의 큰 자산이던 시절, 소를 증식시킬 수 있는 기술개발이 필요한 때였다. 국무총리실에서 “삼태우를 확보하여 시험용으로 사육하고 소 증식방안을 연구해보라.”는 지시가 내렸다.
그 때가 1974년 이른 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첫 직장으로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축산시험장에 첫발을 디밀었다. 제주에서 가족들과 잘 지내다가 육지에 나와 보니 차갑고 살벌한 기후도 그렇고 식사문제며 생활자체가 낯설고 어설펐다. 새로 일하게 될 환경에 호기심과 기대가 컸지만 나그네처럼 외롭고 쓸쓸한 신세였다.
정착할 집이 마땅치 않아 편의 상 축사 숙직실 한 귀퉁이에 잠자리를 마련하여 거쳐하고 있었다. 어디 살가운 친구라도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차에 삼태우를 인수해 오라는 명을 받았다. 난생 처음으로 강원도 철원, 그것도 휴전선 가까이까지 가보게 되었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베들레햄으로 가는 동방박사라도 된 양 기뻤다. 아니 멀리 신부 감이라도 맞으러 가는 양 마음이 들떴다. 삼태우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마 대신에 소를 실을 트럭을 준비하여 운전기사와 함께 삼태우를 맞으러 갔다. 삼태우는 몸단장을 마치고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망졸망 송아지 세 마리는 이미 젖을 떼어 잘 길들여 놓았는지 더 이상 어미와의 이별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송아지 세 마리에게 젖을 주느라 고생한 삼태우가 수척해 보였다.
먼저 삼태우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봤다. 나무로 된 코뚜레가 얼굴 전면을 감싸고 있었다. 양쪽에 대칭으로 뻗어나간 뿔과 함께 균형을 잘 이루었다. 시원한 눈망울, 커다란 콧구멍과 주변의 습윤한 물방울이 건강하게 보였다. 주둥이 둘래가 넓은 것을 보니 먹성이 좋을 듯도 했다. 얼굴의 넓이와 길이 그리고 크기를 가늠해 보니 잘 생긴 얼굴이었다. 노란 털의 감긴 가마가 얼굴 가운데 정좌하여 강한 개성미를 나타내었다.
가까이 가서 엉덩이도 두드려 보고 살갗도 꼬집어보았다.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질도 어질게 보였다. 앞다리 뒷다리가 곧게 뻗은 모습, 젖꼭지의 간격과 유방의 크기, 뱃구레의 크기와 긴장감, 등과 허리의 이어짐 등, 마치 미스코리아를 콘테스트 하듯 두루 살폈다. 암소로서 이상적인 체격 조건을 갖추었다고 판단되었다. 결격사유가 없는 신부 감으로 낙착되었다.
소를 싣고 내려오는 길은 춘설이 휘날렸다. 봄이라 했지만 한파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철원에서 서울 쪽으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인가도 거의 보이지 않고 황량한 들판만이 이어졌다. 털모자를 눌러 쓴 경찰관이 차를 세워 검문하려했다. “총리의 특별지시로 운반해 가는 소”라고 하고 서류를 보여주자 바로 통과 시켰다. 귀하신 몸이 지나가는 길이었지만 왠지 쓸쓸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한 다음 우리는 수원으로 이어지는 차도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 차량은 길을 잘못 찾아서 종로로 접어들었다. 그때에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는 화물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구역이었다. 그런데도 우리차량은 종로거리를 유유히 질주하고, 남대문을 돌아 퇴계로를 거쳐 다시 동대문으로 돌아 온 후에야 제 길을 찾아들을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삼태우에게 장안구경을 시켜준 셈이었다. 혹시 교통순경에게 제지라도 받으면 어떻게 할까하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급하면 총리실을 들먹여 볼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행이도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시험장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소는 내가 머물고 있는 숙직실 앞쪽에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삼태우는 길이 잘 들여져 있어서 일을 잘했다. 아무리 귀한 몸이지만 마차를 끌며 사료도 나르고 퇴비도 싣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관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나도 틈이 날 때마다 삼태우의 신변을 염려하고 돌보아 주었다.
그 해 겨울 삼태우는 다시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모두 수컷이었다. 체중을 달아보니 두 마리는 18kg, 한 마리는 17kg으로 허약했다. 한우 수송아지의 정상체중 24Kg에 훨씬 못 미쳤다. 더구나 송아지 세 마리를 건강하게 키우기에는 어미젖이 모자랐다. 허약한 송아지에게는 우유를 구하여 먹여주고,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숙직실 난로 가에서 재우며 정성을 들였다. 그런대도 한 마리가 죽고 말았다. 짐승일지라도 정성들여 키우던 생명이 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더군다나 축산 전문가로서 자존심이 무너졌다.
건강한 송아지를 한 마리씩 낳아 잘 키워내는 것이 올바른 번식방법이지, 허약한 송아지를 여러 마리 낳기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배에 세 마리 송아지를 낳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는 하나 권장할 사항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렇지만 나머지 두 마리는 무럭무럭 잘 자라주니 내심 기뻤다.
어쨌거나 삼태우와 인연은 일단 여기에서 끝났다. 나는 제주시험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이따금 수원으로 출장 올 일이 있으면 삼태우를 다시 만나곤 했다. 삼태우는 다시 한 번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아 질 키워냈다고 들었다. 특이한 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지나친 돌봄이 송아지를 죽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 후 나는 다시 대관령 고령지시험장을 거쳐 6년 만에 다시 축산시험장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이미 삼태우의 행방이 묘연했다. 번식수명을 다하고 나니 아마 저 세상으로 보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렇지만 가끔 지나간 기억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수십 년을 축산분야에 종사하다보니 수없이 많은 짐승을 접하였다. 그 중 가장 나의 뇌리에 남는 것이 삼태우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얼굴 모습은 어렴풋하다. 그러나 묵묵히 마차를 끌던 모습은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전생과 내생이 있어서 중생들이 윤회를 거듭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때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첫댓글 삼태우는 처음듣는 말입니다. 여러시험장을 두루 거치며 우리나라 축산발전에 유공자 입니다. 좋으 혈통의 소를 보존할수는 없었는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불교의 윤회가 있다면 삼태우는 좋은곳으로 태어날것 같습니다. 좀 특이한 글 잘읽었습니다.
소가 세마리의 새끼를 낳는 경우도 있나 봅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다고 온 동네가 들썩 거리던 일이 기억납니다.
삼태우에 얽힌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축산 발전에 기여하신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송아지 세쌍둥이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지만 그당시 간혹 쌍둥이 송아지가 태어나면 횡재를 했다고 난리가 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소 한마리가 농가의 살림밑천 이던 시절 대단한 화제가 되었읍니다. 옛 생각을 떠올리며 잘 읽었읍니다.감사합니다.
소 한마리가 3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어릴적 우리집에 송아지를 낳으면 금줄을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축산업에 기여 하시면서 동물들에 대한 선업 공덕으로 내세에 삼태우를 비롯, 많은 동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삼태우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삼태우(三胎牛) .. 한번도 어려운데 세번씩 세 쌍둥이를 낳았다니 대단한 암소입니다. 잘 생긴 어미소가 눈 앞에 있는듯 자세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축산업 발전을 위해 참 고생도 많으셨습니다. 독특하고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천석꾼도 소는 살림미천이라 할만큼 농촌에는 소가 재산을 가늠했지요. 우리 어릴적 소가 일년에 송아지를 한마리씩 낳아 어느정도 키우면 시장에 내다팔면 자녀들 학비에 톡톡한 몫을 했습니다. 김화읍 에(三胎牛)가 태어나서니 그 농가에 경사가 국무총리실까지 알려졌으니 그당시로서는 빅뉴스였나 봅니다.회장님께선 삼태우를 싣고 서울 한복판을 유유하게 통과 할 수 있었다고 하시니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오랫동안 삼태우 근황을 살피셨다니 정을 준다는것은 사람이나 잠승이나 별반 다르지 않나 봅니다.
체험글. 좋은 글을 읽으면서 대리 체험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귀한 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삼태우 처음 들었습니다. 한배에 3마리의 송아지를 낳는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삼태우의 입식과정과 관리하시던 일을 실감나게 묘사해 주시어 직접 경험한듯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