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는 나무의 훈장이다
숲에서는 나무보다 먼저 시간이 보인다. 바람은 잎사귀를 흔들고, 햇살은 가지 사이를 오가지만, 세월은 나무껍질 위에 조용히 남는다. 상림의 오래된 숲을 걷다가 나는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줄기 한가운데 거대한 옹이가 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흉터처럼 보였다. 보기 좋게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잔뜩 품은 채 몸이 부풀어 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살아낸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아픔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를 몸속에 품어 가장 단단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옹이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강한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번개를 맞거나 병충해를 견디고, 잘려 나간 자리를 스스로 메우는 긴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옹이가 된다. 사람의 눈에는 흠처럼 보이지만 나무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생명의 흔적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살면서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옹이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말하지 못한 상처도 있고, 오래 잊히지 않는 이별도 있으며, 후회와 미련이 남긴 흔적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려 한다. 흉이 될까 두렵고 약점이 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는 상처를 지우지 않는다. 아픈 자리를 잘라 버리지도 않는다. 상처를 품고 살아가며 조금씩 새로운 나무결을 만들어 낸다. 세월은 상처를 없애지 못하지만, 상처를 견딜 힘은 길러 준다. 그 시간이 쌓이면 어느새 흉터는 나무를 가장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옹이가 된다.
상림의 나무들은 천 년 가까운 숲의 시간을 지켜 왔다. 그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태풍과 가뭄을 견디고, 이름 모를 계절들을 지나왔다. 곧은 줄기만 남은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옹이를 품은 채 오늘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숲은 아름다운 것이다.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걷다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났다. 몸통은 오래전에 잘려 나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세월이 만든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은 줄 알았던 그 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뿌리는 단단했고, 옆으로 뻗은 줄기에서는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비어 있었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문득 사람의 마음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상실을 겪고 나면 마음 한가운데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허전함이 오래 머문다. 그러나 그 빈자리 때문에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으로 바람이 드나들고, 햇살이 스며들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도 한다.
빈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다. 숲속 고목이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곤충들의 집이 되듯, 사람의 빈 마음도 누군가를 이해하는 공간이 된다. 상처를 모르는 사람보다 상처를 견뎌 낸 사람이 더 깊이 타인의 아픔을 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흠 없는 삶을 꿈꾼다. 실패도 없고, 눈물도 없고, 후회도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삶은 나이테도 없는 나무와 같다. 보기에는 매끈할지 몰라도 깊이는 자라지 않는다. 나이테는 한 해를 견딘 기록이고, 옹이는 한 생을 견딘 증거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일수록 더 아름답다. 높이 때문이 아니라 시간 때문이고, 굵기 때문이 아니라 견딘 이야기 때문이다.
상림의 숲을 떠나기 전 다시 그 옹이 앞에 섰다. 처음에는 흉터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다. 삶이 스스로에게 수여한 훈장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나온 세월이 남긴 흔적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도, 실패도, 아픔도 모두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옹이가 된다. 그 옹이가 있었기에 우리는 쉽게 부러지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숲은 오늘도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들은 자신의 몸으로 조용히 말하고 있다. 상처를 지운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 끝내 한 그루의 숲이 된 사람이 아름답다고. 옹이는 나무의 흉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훈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