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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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4. 23:35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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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땅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통이 고도로 발달하여 이제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오지라고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지만 조선시대의 교통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해남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나,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영남대로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중요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교통이나 물류 등을 중시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큰 고을과 큰 고을을 연결하면서 형성된 ‘대로’가 일반 백성들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적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대로 주변의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영남대로를 따라 북진을 거듭했기 때문에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만 제대로 지켰더라면 전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지금껏 계속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중요한 길목의 강가에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도 터를 잡지 않고, 조금은 떨어진 곳의 고갯길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이중환은 경상도의 경우, “대구의 금호(琴湖)와 성주의 가천(枷川), 금산의 봉계(鳳溪)는 들이 크고 논과 밭이 기름져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인가가 끊이지 않는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여러 대를 이어 살 만한 땅이지만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곳이다. 오직 가천과 봉계는 고개와 가까워서 평시에나 난세에 모두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현재 금호는 영천시 금호읍에 있으며 그 인근의 금호읍 구암리에 가암마을이 있고, 그 북쪽에는 오늘날 보물 제5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제 또는 청못이라 불리는 연못이 있다.
청못은 신라 법흥왕 23년인 546년에 축조되었고 그 남쪽에 건립된 청못비는 신라 제38대 원성왕 14년에 처음 세운 것이다. 축제비(築堤碑)에는 청못이 축조된 날짜와 동원된 인원,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공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이두로 표기되어 있다. 청못의 축조는 당시의 주요 작물이 보리에서 쌀로 바뀌면서 저수지의 역할이 중시되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제천의 의림지나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는 달리 지금도 수리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다. 그런 연유로 금호읍 일대에는 금호들과 주남들, 우호들, 장천들, 새봇들, 노미들, 가래들 같은 기름진 들판이 널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주군 가천면 가야산 기슭에 있는 창천동은 조선시대에 천야창(泉野倉)이 있었던 곳이라 천창이라고 불렸다. 『택리지』의 기록과 달리 이곳은 산간지대라서 서리가 일찍 내리기 때문에 농사짓기에 적당한 지역이 아니었다. 한편 인근의 가천면 도원동에는 ‘보지바우’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보는 사람은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도원마을 사람들이 바위를 가려 놓는 일이 자주 있었으나 가끔 짓궂은 사람들이 있어 가린 것을 헤쳐 놓는 진풍경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나루는 벽진면과 성주읍과 선남면 사이를 흐르는 이천과 초전면 월곡동에서 비롯된 백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성주 내륙과 김천, 칠곡 지방을 잇는 중요한 들목이었다. 이곳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인데 조선 초부터 영남의 요지였다. 인근의 상주목에 역(驛)이 들어서면서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 성주 이씨의 조상으로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라는 사람이 “성주읍은 체통 있는 양반들이 살 곳이 못 된다”라며 이곳 한개마을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여주 황포돛배 © 이종원
여주와 이천 일대에서 나는 쌀이 경기미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이 일대는 한강을 끼고 있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했다. 때문에 사대부들이 대를 이어 살 만한 땅으로 손꼽았다.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에 여러 인물이 나왔는데,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을 지낸 돈재 이석문이 이곳 출신이다. 그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세손이던 정조를 업고 국문 현장에 찾아가 보이는 등 사도세자의 구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곤장만 맞은 채 벼슬에서 쫓겨난 후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세자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내고 거주하였으며, 평생토록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나중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 후대 인물로서 조선조 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던 응와(凝窩) 이원조와 그의 조카인 한주(寒洲) 이진상이 있다. 이진상은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통감절요』를 배웠고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을 공부한 뒤 17세부터는 이원조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철저한 주리론자로서 주자와 이황의 학통에 연원을 두었으면서도 주자의 학설을 초년설과 만년설로 구별하여 초년설을 부정하고 만년설만 받아들였다.
또한 이황의 “이(理)와 기(氣)가 동시에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하나만이 발한다는 이발일도(理發一途)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마음은 이와 기의 합체’라고 말한 이황의 심합이기설(心合二氣說)에 대해서도 ‘마음은 곧 이’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새롭게 주장하여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그로 인해 도산서원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한개마을에는 이석문의 북비고택과 이진상의 한주종택을 비롯하여 월곡댁, 고리댁 등 주목할 만한 조선 가옥들이 고즈넉이 들어서 있다.
팔영루
충주호
자연대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인데 조선 초부터 영남의 요지였다. 이곳에는 북비고택과 한주종택 등 주목할 만한 조선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 성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의 대산루(對山樓)와 우산동천(愚山洞天)은 이안천(利安川)을 낀 벌판을 배경 삼아 풍광이 매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유성룡의 수제자인 우복(遇伏) 정경세가 여기서 말년을 보냈는데, 그는 3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그 후 형조, 예조, 이조판서에 이어 홍문관 대제학에 오르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예를 중심으로 한 수양론과 경세론을 정립하여 김장생과 함께 17세기 조선사회의 이름 있는 사상가로 자리 잡았다.
이중환은 그 밖에 경기도 용인의 어비천(魚肥川)과 청미천(淸美川)의 기름진 땅이 삼남지방과 같아서 살 만한 곳이라 기록하고 있다. 어비천은 진위천(振威川)이라고도 불리는데, 용인시 이동면 서리 부아익에서 발원하고 평택시 진위면에 이르러 진위평야를 이룬 다음 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호로 접어드는 냇물이다. 그리고 청미천은 지금의 용인시 원삼면 좌향리 독조봉과 사암리 어든니고개에서 발원하여 여주시 점동면 도리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냇물이다. 이 지역은 경기미의 대명사인 여주, 이천 쌀의 집산지로서 오늘날에도 이름이 높다.
또한 황해도에서는 해주의 죽천(竹川)과 송화의 수회촌(水回村)이 시내와 산의 경치가 좋고 땅이 메마르지 않은 데다 바닷가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생선과 소금 등의 이익이 있어 참으로 살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시냇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산수가 뛰어난 고을이라 할지라도 각각 생리의 차이가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장단점을 가지게 된다. 이중환은 이와 같은 여러 고을 중 황해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평강의 정자연(亭子淵)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를 산수와 생리가 좋은 곳으로 지목하고 있다.
황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평강의 정자연(亭子淵)은 철원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큰 들판 가운데 산이 솟아 있고, 큰 시내(지금의 한탄강)가 안변의 삼방치(三方峙)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려오다가 마을 앞에서 더욱 깊고 커져 작은 배들이 다닐 만하다. 강 언덕 석벽이 병풍 같고 정자와 축대와 수목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 『택리지』 「복거총론」
한탄강
큰 들판 가운데 산이 솟아 있고, 큰 시내(지금의 한탄강)가 안변의 삼방치에서 흘러내려오다가 마을 앞에서 더욱 깊고 커진다. 강 언덕 석벽이 병풍 같고 정자와 축대와 수목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정자연은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 있는 정자로 평강에서 남동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있으며, 김화(옛이름 금화)와 가깝다. 함경도 안변과 경계를 이루는 분수령 아래로 말흘천(末訖川)이 흘러내리다 김화 접경의 10리 절벽 아래에 소가 형성된 것이다. 겸재 정선이 36세(1711)에 당시 금화현감이던 사천(槎川) 이병연의 초청을 받아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정자연」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그때는 정자가 난리 속에 소실된 뒤였다. 그림을 본 이병연도 한 편의 시를 남겼다.
늙은 나무는 푸르러 양 언덕에 솟구치고
고적한 마을은 적막하여 한 시내만 흐른다.
무릉동 그 속에서 사람이 젓대를 부니
칠리탄(七里灘) 탄두(灘頭)에서 나그네 배에 기댄다.
한편 평강군 세포면 세포리의 검불랑은 궁예가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며, 평강읍 동변리는 태봉국의 과거시험을 주관했던 문과원이 있었고 평강읍 서쪽에 있는 갑천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면서 갑옷을 벗어 버린 곳이라고 한다.
정자연의 서쪽은 이천(伊川)의 북쪽이 되는데, 광복촌(廣福村)이 그곳에 있다. 안변 영풍에서 내려온 강물이 광복촌에 와서는 더욱 깊어진 뒤 고리처럼 돌아서 배를 띄울 만하다. 땅은 모두 흰 돌과 맑은 모래이므로 환하게 밝아, 기묘한 기운이 서려 있다. 온 고을에 논은 적지만 오직 광복촌만은 물을 대어 관개하기 때문에 토지가 매우 비옥하다. 북쪽에는 깊은 고미탄(古美灘) 물과 험한 검산(劍山)이 있어서, 평시나 난시에 모두 살 만한 곳이다. 다만 자리 잡은 곳이 너무 궁벽하여 유감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한 평민 부자들뿐이고, 사대부 집은 없다.
- 『택리지』 「복거총론」
평강군 이천면 일대는 효성산, 대왕덕산 등의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내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는데 곧 동천이다. 서쪽으로 흐르다가 임진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특히 동천이 감싸고 흐르는 남산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며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고미탄천(古米呑川)은 강원도 이천군 북쪽의 웅탄면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113.7킬로미터의 강이다. 발원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평강군 유진면 승학동 부근에서 여지천을 합하고 용포면 신평리와 구룡리, 가막동을 지나 판교면 용당리 부근에서 임진강으로 접어든다. 고미탄 유역 전체가 현재는 북한에 소속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들판이 넓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
또한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의 조읍리에는 조읍포창(助邑浦倉)이 있었다. 이곳은 화물을 실은 범선들이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구였다. 동남쪽으로는 경기도의 개성, 남쪽으로는 배천, 서쪽으로는 해주, 서북쪽으로는 재령과 연결되는 길목이었다. 인근의 강음현을 비롯한 열두 개 고을에서 가져온 조세 양곡이 이곳에 보관되었다가 수운판관의 지휘하에 서해와 한강을 통해 서울의 마포진으로 운송되었던 것이다.
백석리에 있는 천신산에는 승왕사, 현암사, 용암사, 천신사 등의 큰 절이 있었으나 모두 폐사되었다. 그중 승왕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사부로서 국정을 맡아 개혁을 단행했던 신돈이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당시의 웅장했던 규모를 증언해 주고 있다.
한편 금천군 구이면에 있는 침벽정은 주위의 경관이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이 이곳에 올라 세속의 잡념을 털어버리고 글공부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정자는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토산면 부근의 임진강변에 있는 삼성대는 높은 절벽과 기암괴석이 즐비한 절경으로 율곡 이이와 휴암(休菴) 백인걸이 자주 찾아와 이곳의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이중환은 이천 일대를 사대부들이 대대로 살 만한 곳으로 꼽았다. 이천은 시냇가에 위치하면서 한강의 지류와 본류를 동시에 품고 있어 산수와 생리가 좋다. 또한 토지가 비옥해서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쌀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천에서 나는 쌀이 임금에게 진상되는 특산물로 지정되면서 오늘날 향토 브랜드인 ‘임금님표 쌀’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땅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