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이어의 기적
눅 9:10-17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눅 9:10-17 / [5천 명을 먹이시다 ; 마 14:13-21, 막 6:30-44, 요 6:1-14] 제자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일을 예수께 모두 보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따로 그들을 데리고 뱃새다라는 마을로 떠나셨다. 11) 그러나 예수께서 떠나신 것을 안 군중들이 곧 뒤따라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뜻이 맞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병든 사람들도 고쳐 주셨다. 12) 저녁 때가 되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사람들을 가까운 마을이나 농가로 내려가게 해서 각자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찾게 해야겠습니다. 여기는 외진 벌판이니 말입니다.' 13)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저희에게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어디 가서 이 많은 군중이 먹을 것을 사오라고 하십니까?' 14) 거기에는 남자만 해도 5천 명 가량이나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50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라' 고 말씀하시자 15) 제자들이 그대로 하였다. 16) 예수께서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17) 그래서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예수님은 주님을 찾아 온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당신이 참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벳새다로 가시다(10-11)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안드레, 베드로, 빌립의 고향입니다(요 1:44). 예수님이 이곳으로 오신 것은 전도 여행으로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한편 이 곳은 예수님이 많은 권능과 이적을 행했지만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 책망을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마 11:21). 이곳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따라왔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은 쉬려던 계획을 포기하시고 그들을 영접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때에 맞지 않게 찾아와도 예수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시간까지도 포기하시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시고, 은혜와 위로로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12-17)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무리들을 서둘러 해산시켜 그들로 하여금 숙식을 각자 해결하게 하도록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이 없었으며,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계산적인 의견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장정만 5000명,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포함한다면 엄청난 수의 사람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현실에 갇힌 눈은 눈앞에 있는 해답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자원만 바라본다면 부정적인 생각만 나올 뿐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서 공급하셨던 예수님이 떡도 공급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이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이 기적은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기적입니다. 그만큼 이 기적이 나타내고 있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거두게 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야 말로 참 생명의 떡이요, 그에게 나오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적 용 : 자신이 가진 자원만 바라보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큰 장애물 앞에 당신의 눈은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큰 능력의 근원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갖길 바랍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리마 아지미는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100m 달리기 세계 신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초 37’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사상 가장 느린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녀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정권과의 오랜 내전으로 경제 상황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안정을 찾아가는 그녀의 조국을 다시 세계에 알리고자 운동장 트랙에 올라섰습니다. 그녀는 세계육상 선수권대회의 조직위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특별히 배려해서 출전하게 된 선수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꼴찌를 할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초라해지고 어쩌면 우스워질 수도 있는 상황에도 그로 인해 희망을 얻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요? 초라한 떡과 물고기가 기적이 되는 것처럼요.
< 설 교 >
기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병2어의 기적은 다른 기적과는 달리 질량보존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근대과학의 기초이론으로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1774에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 화학 반응에 의해 다른 물질로 변화하여도 반응 이전 물질의 모든 질량과 반응 이후 물질의 모든 질량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거나 귀신이 쫓겨나갔어도 고침을 받기전이나 후나 질량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5병2어로 남자만 5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12광주리에 담았다는 것은 질량보존의 법칙에 크게 어긋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5병2어의 기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도된 해석 중 가장 지지를 얻고 있는 해석은 실제로 오병이어로 모든 사람이 먹은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자신이 먹기 위해 준비해온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준비한 먹을 것들을 서로 나누어 먹으므로 모든 자들이 다 먹고도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도시락을 갖고 다닐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리들은 저녁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닐 계획을 하고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다가 빈들에서 저녁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 전혀 그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집단적 최면을 걸어서 오천 명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부르게 먹은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몇 사람이면 몰라도 어떻게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최면에 걸리게 해서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혹 5천명에게 최면을 걸어서 배를 부르게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최면을 걸어서는 먹고 남은 음식을 12광주리나 거두게 할 수 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은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들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된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셨듯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먹고 남은 것을 12광주리나 거두는 기적은 전혀 받아들기 힘든 기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말씀 한 마디로 행하시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졌습니다. 우리도 그런 요소들을 학습한다면 예수님처럼 이 시대의 또 다른 5병2어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1. 기적은 빈들에서 일어났습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날이 저물어 가는 때였고, 장소로는 ‘빈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시지 않았다면 무리들은 빈들에서 굶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5병2어의 기적이 저녁때에 그리고 빈들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적은 필요한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무리들이 굶지 않는 상황이었다며 5병2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소개된 기적은 모두 기적이 필요한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습니까?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좇아오고 있고 앞에는 홍해가 놓여있어서 홍해를 가르지 않으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40년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까? 그들이 여행 중이라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애굽에서 나온 자들은 어른만이 아니었습니다. 갓난아이도 있었고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았었습니다. 따라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다면 어린아이들 가운데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왜 선교현장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해 고통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적이 필요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절망의 상황은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면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기적을 경험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기적을 경험해야 합니다.
2. 기적은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한 마디로 2만 여명이 먹을 수 있는 떡과 고기를 만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들에게 무리들이 얼마나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시고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리자 그것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것을 사용하셔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도록 간구하는 것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구약시대에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생 통의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가 마지막 남은 떡과 기름을 엘리야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침 받는 기적을 경험했습니까? 그들이 주위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주님께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진인사대천명’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듯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원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홀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데 굳이 오병이어를 통하여 기적을 행하실까요? 그것은 드린 자로 하여금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기적을 경험한 자도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5병2어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 얼마나 영광이고 복인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적의 동참자로 만드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기적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 드림으로 기적을 경험하고 칭찬과 영광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드린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를 어린아이가 드렸다는 것은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 6장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빈들에 있다가 5병2어를 주님께 드렸다는 것은 그의 부모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린아이가 내놓은 오병이어는 그 가족이 함께 먹기 위해 숨겨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내놓는 것이 쉬운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내놓자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가운데서 드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드릴 때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없다고 힘들다고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힘들고 어려울수록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3. 기적은 준비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기적을 행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 무리들을 오십 명씩 앉히게 하셨을까요? 당시 남자만 5천 명이었기 때문에 전체 무리는 적어도 2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50명씩 앉혀도 적어도 400개의 떼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12사도가 400떼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데만 해도 30분에서 1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렇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합시다. 무리들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달려들어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필리핀에서 야외 전도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아이들 초함하여 약 3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를 주선한 선교사님이 우리가 준비해간 쌀과 스넥을 아주 지혜롭게 나눠주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어른과 아이들을 연령별로 구분해서 줄을 세우게 하고 차례로 받아가게 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선물을 받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나누어주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으로 말미암아 대혼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하시고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히셨던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께서 떡을 떼어주시기 전, 50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신 것은 기적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빨리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지 않는 것은 그 기적으로 혹 우리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준비한 자에게 일어납니다. 따라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면 준비해야 합니다.
4. 기적은 감사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9장 15-16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눅 9:15-16). 여기서 ‘축사하셨다’는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찾아봤더니 크게 두 가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NIV는 “he gave thanks”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KJV는 “blessed them”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축복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것을 알고서 순간 당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상충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시고 무리들을 향해서는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 감사기도를 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저녁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저녁 한 끼의 식사를 해결주시기 위해 감사기도를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한 끼의 식사라도 충분히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날 우리들에게 한 끼의 식사는 감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솔직히 다이어트를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하거나 너무 많이 먹어서 각종 질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한 끼의 식사는 감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 그 한 끼의 식사를 감사기도를 하신 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감사해야지만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일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을 알고 있습니다. 만종은 석양이 지는 밭에서 하루 일을 마친 부부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밀레가 이런 내용을 화폭에 담은 것은 그의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가 질 무렵에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감사 기도를 잊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즉 밀레가 만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렸기에 그런 대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만드는 제조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한 끼의 식사를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5병2어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고, 준비한 후에 일어났고, 적은 것을 드림으로 일어났고 감사를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면 삶속에서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현대판 5병2어의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삶은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삶과 다른 눈에 띄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지 않아도, 찬양을 부르지 않아도,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특징들로는 온유한 얼굴, 겸손한 태도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들이 용서하는 자들(forgivers)이며 또 주는 자들(givers)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용서하는 자들이며, 주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삶이며, 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며 또 모두 ‘굶주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이들에게 생명의 떡과 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온 세상에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오늘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마을들로 보내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모두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만을 따로 데리고 벳새다라고 하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치열한 영적 싸움을 싸우다 지친 제자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알고 예수님 일행을 따라왔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거대한 무리였습니다. 오랜만에 조용히 자기들만의 시간을 가지며, 전도여행에서 경험했던 신기하고 놀라운 무용담들을 나누고자 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산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수많은 불청객들을 ‘영접’하셨습니다. NIV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들을 ‘환영(welcome)’했다고 번역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하듯이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또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늘 활짝 열려있으며, 변함없이 따뜻합니다. 시냇가에 넓게 펼쳐진 푸른 초장처럼, 오천 명이라도 능히 그 안에서 마음껏 뒹굴고 쉬며 먹고 마시기에 충분하게 주님의 마음은 그렇게 넓고 편안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시간을 잊으시고 양들을 섬기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끝날 때를 기다리던 제자들은 이제 배가 고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주님, 우리도 이제 먹고 쉬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그만 보내시죠!” 이 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내심의 끝에 서 있는 제자들에게, 어서 빨리 일이 끝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오직 배고프고 피곤한 자신들밖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하십니다.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먹이려면 먹을 것을 사야 하는데 돈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없는 제자들한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일고의 가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 주어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궁핍한 상황은 아마도 예수님 자신이 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여기며 한 번도 의심치 않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덮고 있는 불신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 영적 세계, 주님의 세계를 여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원문에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는 명령문에서 “너희(you)”라는 주어가 생략되지만, 이 말씀에서는 “너희가”라고 꼭 집어서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강조점이 “너희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리들을 보내어 그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찾게 하거나, 이 일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너희” 곧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여 이들을 먹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제자들이 무리들의 배고픈 문제를 걱정하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리들의 문제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서 한 발 벗어나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무리들의 배고픔 문제 속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는 돈도 없고 먹을 것이 없어요!” 하고 버티는데도, 주님은 고집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무리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참으로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섬기셨지만,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도록 하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효력’이란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효력’ 또는 ‘능력’은 “돈”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지 않고는’ 무리들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더 구체적으로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한복음 6:7)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돈이 없으니 무리들을 먹일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일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끝입니다. 사랑을 두 단어로 분해하면 ‘용서하는 것(forgiving)’과 ‘주는 것(giv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망쳐버린 이 염치없는 불청객들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남김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다함이 없이 계속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이십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 사랑의 샘물이 ‘가난한 죄인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늘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배고프고 무례한 무리들’은 사랑을 솟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마음을 닫고 쪼그라들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한번도 자신을 향한 적이 없습니다. 40일을 굶으시고도 자신을 위해 떡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게 하는 것도 모르시고, 주님은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계속 용서하시고, 계속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나의 필요들에 대해서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눈을 뜨고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무정한 본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거의 죽는 것과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참된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돈주머니’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능력입니다. 돈이 있으면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믿음이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믿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믿음이 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모든 문제들 앞에서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들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부자가 되는 길은 더 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자는 더 많이 받으며, 더 좋은 것을 누리며,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욕심내는 만큼,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큰 믿음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이를 떼어 그 많은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고린도전서 3:9).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cannot).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will not).”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축복하시기 위한 “통로 (channel)”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능력으로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산 떡”이라고 하십니다. “산 떡”이란 생명을 주는 떡이기도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항상 있는 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은 항상 거기 계시며, 자신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이 자기 문제에 갇혀 있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세상은 그렇게 버려지는 것입니다. 영혼들은 굶주리며 광야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이 충만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굶주려 허덕이는 양들에게, 주님 안에서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천국 잔치’를 선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