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진에서 온 여자
“우리 모임에 최사장을 오라고 할까?”
최사장은 윗동네의 텃줏대감이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지 10년이 좀 지난 여성이다. 그의 이름은 최**, 청진출신이다.
청진은 함경북도에 위치한 바다에 붙어있는 공업도시이다. 조선의 개화기,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작은 어촌부락이 도시가 된 청진, 지금은 평양, 함흥과 함께 북한의 3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북한의 어느 도시보다 규모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곳은 북한의 퍼스트레이디, 리설주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청진은 경계에 있는 도시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를 뒤업었던 이 전투와 같이 한반도에도 일본과 싸운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청진상륙작전이다. 전쟁의 끝무렵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과 치열하게 벌였던 전투가 있었던 곳, 바로 청진이다. 소련은 이 곳에서 전쟁의 끝을 마주했다. 6.25전쟁때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이 곳까지 올라 왔었다. 한반도의 동북쪽 최북단까지 올라왔던 지역, 바로 청진이다.
청진에서 온 그녀, 많은 이들의 새로운 고향이 된 그 곳, 새로운 체제의 시작점이 되고, 또 다른 체제의 종착점이 되었던 그 곳, 청진에서 그녀가 왔다.
# 최사장
최**, 그가 왜 최사장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전에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이 *실씨를 최사장이라고 불러요? 사업을 하나요?”
“아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최사장 최사장 부르더라구요.”
아마도 먼저 정착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소개할 때 불려진 호칭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최사장으로 불려지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해 본다. 나와 같은 나이인 그녀, 그녀는 청진에서 20대의 젊은 시절, 돈을 벌러 중국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북한의 여자가 어린 나이에 익숙한 고향을 떠나 어떻게 외국에 갔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해 보라. 1997년 IMF를 맞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나라가 망한 그때, 많은 회사가 도산하였다. 당시 대학에 다니던 젊은이들이 취업을 할 수 없어 워킹 홀리데이로 얼마나 많이 해외에 나갔는지 모른다. 같은 시기, 북한은 더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남성들은 국가에 매여 운신의 폭이 작았지만, 여성은 상대적으로 외부활동을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정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돈주’,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의 이미지인 돈주가 왠 말인가? 돈주는 북한이 어려운 시절, 등장했던 말이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 시기를 김일성이 항일투쟁할때에 호명했던 ‘고난의 행군’이라 불렀겠는가? 지금은 돈주가 북한을 움직인다고 공공연히 말하니 북한의 사회가 바뀐 것이다. 돈주는 주로 외부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여성이었다. 그래서 ‘최사장’이라 단어가 어쩌면 자연스럽 받아들여졌나 보다.
고난의 행군시절, 북한 여성을 묘사하는 말, ‘이악하다’. 이익을 위하여 지나치게 아득바득하는 태도가 있는 사람을 형용하는 말이다. 북한의 여성을 책으로만 알았던 나는, 최사장의 이미지가 ‘돈주’의 이미지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형, 최사장은 여자이고 우리 모두는 남자인데, 우리는 괜찮지만 최사장이 불편하지 않겠어요?”
내심 우리 모임에 그녀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마음이 표출되었다.
# 함께 시작하는 마을사업
우리는 얼마 전부터 시에서 하는 마을활성화 사업을 위해 모였다. *국이형과 경선이, 원영이, 성환이… 이렇게 나를 포함하여 5명의 멤버가 공모사업을 따냈고, 공식적인 첫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모임의 사업명칭은 ‘윗동네, 아랫동네 모엿수다’. 도봉구의 윗동네인 도봉 2동 사람들과 아랫동네인 창 4동에 사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 수다를 떠는 모임이다.
나름 의미도 있다. 우리가 윗동네라 칭하는 도봉 2동에는 북한에서 이탈하여 정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 동네가 있다. 아랫동네인 창 4동은 내가 가정교회를 하며 가족들이 한 명, 한 명씩 모여 사는 동네이다. 2년전 나는 도봉 2동에 평양출신인 *국이형의 한국정착을 도왔고, 그것을 계기로 마을사업을 구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북한을 윗동네라 부르고, 남한을 아랫동네라 부르지 않던가? 나름 신박한 컨셉으로, 마침 지역도 절묘하게 ‘윗동네, 아랫동네 모엿수다’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모여 수다를 떨면, 통일에 도움이 될까? 모임의 컨셉을 잡으니, 우리의 수다가 통일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급조된 모임 이름이지만, 우리모임의 이름은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이름을 정했던 것이 아니다. 사업제안서를 제출할 때 번뜩이는 생각으로 작명해서 만들어진 이름. 이렇게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모임의 정체성도 다지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비율이 맞지 않다. 아랫동네 사람 4명, 윗동네 사람 1명, 윗동네 사람이 더 참여하는게 맞다. 전체 비율도 그렇지 아니한가? 남한 5천만, 북한 2천 5백만, 비율만 봐도 2:1 비율은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임에 최사장이 와야 한다.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성국이형에게 최사장의 초대를 부탁했다.
“첫 모임에 저도 참석할께요.”
마을지기 활동가가 모니터링을 위해 모임에 참여했다. 첫 모임부터 모니터링이라니… 가득이나 우리 모두가 첫 만남이라 서로 대면대면한데… 저 마을지기 활동가가 자신이 이 자리에 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모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아! 우리도 우리가 왜 모이는지 모르겠는데, 사업제안서 작성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최사장은 모임을 어떻게 생각할까? 최사장이 모임에 계속 참여해야 그래도 모양도 번듯할텐데, 최사장이 오늘만 오고 다음부터 안 오면 어떡하지?’ 별의 별 생각이 들었다.
각자 소개와 모임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최사장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우리 모임이 발전하여 앞으로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의 경제적 상황도 조금은 더 윤택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나의 대답이 아니다. 얼마 전 마을만들기 교육에 참여했을 때 강사 중 누군가가 제시했던 목표였다.
# 참석합니다
첫 모임이라 많이 긴장했는데… 무사히 모임이 끝났다.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차분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약간은 긴장감이 흘렀다. 이 사람들이 다음 모임에도 올까? 불안감을 지닌채 이들을 배웅했다. 누구보다도 궁금했던 한 사람, 최사장이다.
“오늘 모임 어땠어요?”
“네, 그냥 잘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최사장이 윗동네에서 알아주는 사람이니, 앞으로 윗동네분들도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어떡해서든 최사장의 긍정적 대답을 듣고 싶었다.
“모임의 목적이 의미있는 일이면 참여할 거예요. 그런데 돈과 연결시키려면 힘들 겁니다.”
그녀의 대답이 나의 뒷통수를 쳤다. 나는 윗동네 사람들이 워낙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터라 돈이 궁하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질 좋은 일자리라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사회구조적으로 그러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나의 오래된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그 사람들이 ‘돈, 돈, 돈, 돈’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들을 움직일 때는 ‘돈’이나 ‘선물’이 아니고서 어렵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은 터라 나에게도 돈으로 윗동네 사람의 마음을 사고 움직이게 하려하는 생각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나 보다. 하지만 정작 나만 ‘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돈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첫 모임 후 다음 모임을 공지해야 했다. 이번에는 몇 명이나 참석할 수 있을까? 단톡방에 모임 공지를 하고 멤버들의 반응을 본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답이 없다. ‘아, 앞으로 이 모임이 계속 될 수 있을까?’ 마음의 끈을 놓고 싶은 그 순간, 단톡방에 글이 하나 올라 왔다. ‘성국님과 참석합니다.’ 최사장의 문자이다. 이후로 원영이도, 경선이도, 톡을 올린다.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