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46
3월31일[사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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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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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V-PRq1k3c4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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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은 순명과 겸손, 평화와 비폭력의 주님이셨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살기등등한 얼굴에, 손엔 끔찍한 흉기를 들고, 노골적인 살의를 갖고 내게 달려드는...
그런 상황 한번 겪고 나면 남게 되는 트라우마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이고 깨어나고를 반복할 것입니다. 이런 트라우마는 평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저는 수십 년이 흘렀지만, 끔찍했던 사건이 꿈속에서 반복되곤 해서,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곤 합니다.
그런 장면은 스릴러나 조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 통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습니다. 적대자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여차하면 어른 주먹만 한 돌을 손에 손에 들고 예수님을 에워싸며 협박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벼랑길 위를 아슬아슬 위태위태 걸어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을 물려받으신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까짓것 유다인들 천 명, 로마군사 만 명, 말씀 한마디로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 싹 쓸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명과 겸손, 평화와 비폭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끝끝내 무력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당신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인내하시고 순명하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이런 예수님의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그리고 큰 죽음, 다시 말해서 골고타 언덕 위에서 맞이하신 결정적인 죽음을 묵상하고,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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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의미>
오늘 독서에서도 역시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복수하려는 이유는 피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송사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이런 처지를 ‘가난한 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하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실 때의 부자는 재산을 많이 가진 이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가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게 된다고 말할 때의 가난한 이도 돈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부와 가난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의 액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단어들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는 ‘자아’와 연관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태리 신학생 두 명과 봉사활동을 함께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이 차도 못 만들고 기차도 없는 굉장히 못사는 나라처럼 저를 놀렸습니다. 그때는 이태리 말을 제대로 못할 때라 반박도 잘 못하며 기분만 나빠했습니다.
저는 보복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가면 로마에서 공부한 것을 절대 떠들고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구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에 질투가 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태리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로마에서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치 로마에서 공부한 사실을 창피한 것처럼 여기는 말을 하자 그들도 흥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제 마음이나 그들의 마음이 ‘부자’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자아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세상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그 사람은 ‘나는 부자다’라고 자기를 소개할 것입니다. 아니면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국회의원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아의 확장’이라 부릅니다. 세상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여 그런 헛된 것들을 통해 자신을 들어 높이게 만드는 역할을 자아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동일시했던 무언가를 무시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아 화를 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이 우리나라에 기차가 없다고 했다고 해서 화를 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기차가 없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또한 로마에서 공부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와 명예를 자기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바로 이 세상 것들로 자신을 들어 높이려고 하는 뱀입니다.
반면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아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인으로 계셔서 자신이 참 성전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이 가난한 사람이 눈의 가시처럼 여겨집니다. 돈을 업신여기면서 부자인 자신들까지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을 업신여긴 것인데 돈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여기기에 자신이 비난을 받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며 더 낮아지기만을 원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헛된 것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너 참 무식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난다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지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너는 개 같다”라고 말할 때, “그럼 어때?”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예가 바로 마귀에 들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던 이방인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예수님께 아무런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아를 매달아 없앤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차지하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하다”라고 하시며 가난한 이들 안에 참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태초부터 뱀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만이 오로지 나의 주인이 되시게 하여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 동일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해야만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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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건강합니다.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신앙은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신비가 됩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입니다. 이성은 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이성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신앙에서 이성은 교리가 되고, 제도가 되고, 신학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교부들은 신앙을 위한 이성의 탑을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신앙을 위한 이성을 배웠습니다. 철학, 심리학, 인간학은 이성을 다지는 학문입니다. 성서신학, 윤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교의신학, 교회법, 사목신학은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학문입니다. 이성은 냉철해서 마치 얼음과 같습니다. 이성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유혹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칫 광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유혹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감성(感性)’입니다. 감성은 이성이라는 그릇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감성은 이성의 ‘틀’을 넘어서는 성령의 이끄심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성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감성은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것을 밝히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물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성의 눈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이성의 힘으로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성은 ‘믿음’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이성의 ‘틀’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꽃동네에서 주관하는 피정에 함께 했습니다. 묵주기도, 찬양, 강의, 미사가 있었습니다. 미사 중에 성령께 청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도를 주관하였습니다. 저도 함께 안수를 하였습니다. 강의 때와는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언어로 기도하면서 많은 분들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티에서 살고 있는 신부님은 수녀님, 수사님과 함께 매주 성령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 청하지 않으면 아이티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사탄은 이성의 힘으로 아이티를 떠나야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매주 성령기도회를 하지 않았으면 10년 넘게 아이티에 머무는 것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300명의 꽃동네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고 합니다. 피부병에 걸려서 온 몸이 짓무른 환자를 옮기면서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나는 피부병에 걸려도 좋으니 고통 중에 있는 저 환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신앙이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려던 예레미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라도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검찰과 판사가 되어서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합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예수님을 고발하고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중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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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31-42: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하신다.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당신의 육체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보인다면 그 일들만이라도 믿으라고 하신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가시는지를 보여 준다. 이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고,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을 건너 그분을 찾아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머무르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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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일들은 믿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여기서 ‘아버지의 일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들’을 뜻하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하신 일들 전부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모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라고 믿는 것은, 그 일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들’ 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일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상가 정도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구세주가 아닌 사람을 구세주로 믿으면 안 됩니다. <신앙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구세주가 아닌 사람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구원이 아닌 쪽으로, 즉 멸망 쪽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은 뜻으로는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으니”입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는 “그동안 나를 믿지 않았더라도”입니다. “그 일들은 믿어라.”는 “이제라도 그 일들을 믿고, 나를 믿어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이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는 ‘앎’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 참여가 곧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들’을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체험과 신앙을 증언했을 때, 페스투스 총독은 “바오로, 당신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사도 26,24)이라고 말합니다.
총독이 듣기에 바오로 사도의 증언은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이론’으로만 들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바오로 사도가 ‘쓸데없이 이상한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공부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한순간에 변화되었고, 신앙인이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체험은, 그 자신의 증언 말고는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그의 ‘삶과 죽음’이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의 체험과 증언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미친 소리’나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와 순교자들이 바로 그렇게 ‘삶과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그것은 세속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1코린 3,18ㄴ-20)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사도들의 체험과 증언은 세속의 지혜나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잘난 체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일들’은 오늘날에도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들을 보고서 나를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서 아버지의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니 너희는 그 일들을 보고서 나를 믿어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들이, 또 신앙인들의 삶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물론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때만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나의 삶’이 나의 신앙을 증언하게 됩니다.>
만일에 교회가 또 신앙인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과 일을 한다면, 온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기는커녕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바른 처신’과 ‘착한 행실’은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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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태도는 점점 격해집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그리스도의 강생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유다인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십니다. 사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온전한 사람이 되실 수 있으며, 어찌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신비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완전한 이해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때 신비와 이해를 잇는 통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논쟁은 믿지 않는 이들의 예를 보여 주면서 한편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당시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 줍니다.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이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과 함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여러 증언으로 끊임없이 알려 줍니다. 복음을 읽는 이들은 어느 순간 멈추어 서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또는 어떤 분이신지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을 우리는 신앙 고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드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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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경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거부함>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던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도 일으키셔서 병자들을 낫게 하고 소경도 눈뜨게 하며 군중들을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왕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나라를 이끄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수백년을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젠가 우리를 이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위대한 왕, 즉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셔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지’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곧 이스라엘의 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기름을 받은 자이시고 모든 인간을 죄와 죽음과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를 속박에서 풀어주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도록 해 주는 그런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던 메시아는 순전히 세속적인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에서는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스라엘의 대부분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구약의 하느님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모두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다 이루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나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내가 믿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하느님이신가?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자기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를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게 돈을 벌게 해 주는 하느님,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아주는 하느님,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하느님, 또 다른 사람은 내 잘못에 벌을 주시는 하느님, 어떤 사람에겐 그냥 심심풀이해소용 하느님, 어떤 사람은 나를 폼나게 해 주는 하느님 등등 각자가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다를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 이 문제는 우리 온 인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하느님을 믿던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으시고 억울한 사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참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느님이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내일 모레는 주님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참 어이없고, 이상한 주일입니다.
이 성지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과연 나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내 잣대로 재어보고서 내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라고 소리치는 이상하고 어이없는 신앙을 가진 엉터리는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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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 이유는 그분을 ‘신성 모독자’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으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여 일하고 계시는 당신의 참모습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진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뒷부분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으며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고 계신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와 폭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전쟁과 폭력이 주는 해악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됩니다.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을 존중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주장과 판단은 한계를 지닙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밝혀집니다.
신앙인은 온유와 겸손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목숨의 위협과 박해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체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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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하느님 아들’의 자신감'>
예비신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사실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도 이 신앙의 이유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열심히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모델인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계신다는 급박한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고 예수님을 치려고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보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 말하며 당신의 모든 일을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라 이야기하고 있음을 문제 삼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하느님은 ‘무서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고 그분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너무 자신 있는 행동들은 분명 하느님께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신의 입장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자신감의 참된 이유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우리가 구원되는 그래서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고도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신 있게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을 많이 닮아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당당히 맞서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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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소명을 주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절규합니다. 그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찬미하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수난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10,31).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았다며 시비를 걸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5,18; 10,33). 사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11,48-57 참조).
예수님께서 시비를 걸고 죽이려드는 유다인들에게,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10,32)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일 하신 것’은 인정하면서도, 결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며(10,33) 완고한 태도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태도에 답답하신 나머지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10,38)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거듭 초대하십니다. 모든 선(善)은 선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자기 민족만을 구원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관념 속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들은 모든 이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열린 창조의 하느님’, 좋은 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편견과 기득권에 집착한 그들 안에,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은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지요.
오늘 나의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서로에게 무심코 던지는 모진 말, 상처를 입히는 행동, 무관심, 불신, 보복하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이 던지려 했던 돌멩이들입니다(10,31). 나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언제든 무심코 던진 비인격적인 말 한마디, 냉정한 태도, 왜곡된 시선, 부정적 비난, 자기중심적인 감정표현 등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엄청난 상처를 줄 수 있지요. 이제 우리 모두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고, 주님을 슬프게 하는 돌을 내려놓으며, 예수님께 달려가야겠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을 “모든 선이시고 으뜸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분”(시간경마다 바치는 찬미)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하실 좋은 뜻과 좋은 말, 좋은 일, 좋은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떠 그 좋은 것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선을 보고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진정 신성모독임을 되새겨야겠지요. 오늘도 부정의 눈길과 말과 행동을 멈추고, 좋은 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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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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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 저의 지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는 반 계주 대표로 나갈 만큼 빨랐지만, 1Km 이상은 좋은 성적을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던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축제 때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전교생이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5등까지 주어지는 상품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거리 달리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마라톤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주만 해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름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스만 돌면 결승선이었습니다. 완주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성적은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5등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상도 없으니 속도를 줄여 그냥 걸었습니다. 몇 명이 저를 앞질러 갔습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저의 목표는 완주였기 때문입니다.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결승선에서는 들어온 순서에 맞춰서 등수를 알려주었습니다. 글쎄 저의 등수가 8등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코스 전에 제 앞으로 많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달렸으면 충분히 5등 안에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포기했던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레짐작으로 이제 틀렸다고 판단하면서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포기합니다. 어떻게든 힘을 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 쉽게 포기하고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즉,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하느님을 찾았고, 메시아가 오시길 간절하게 빌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 간절함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느님의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관점만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보고도 쉽게 포기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관점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을 갖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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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고립이 아니라 고독을 사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와 주님은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박해자들로부터 죽임당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마르고 미싸빕'이 뜻하듯 예레미야는 완전 사면초가이고, 고립 상태입니다. 주님도 지금은 제자들이 옆에 있지만, 곧 사면초가, 고립 상태가 될 것입니다.
고립이란 고독과 다릅니다. 고립이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폐쇄 상태를 뜻한다면 고독은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곧 내 옆에 누가 있더라도 혼자인 상태이거나 혼자임을 느끼는 상태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처럼 깨달은 사람이나 심리 정신적으로 강건한 사람은 옆에 사람이 많거나 적거나 본래 나는 혼자라는 것을 알고 고립을 살지 않고 절대고독을 살아낼 줄 알지요.
그렇습니다. 자폐적 고립이든 집단 따돌림에 의한 고립이든 우리는 고립을 살지 말아야 하지만 고독은 고독할 줄 모르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살아야 하고, 특히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인 의미의 고독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고독이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고독이요 하느님을 만나는 고독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레미야나 주님처럼 반대자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는 단절되었을 때 고립되지 말고 영적 고독으로 승화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자의 포위가 좁혀올 때 하늘로 오르는 것이지요. 전후좌우가 막히면 위로 뚫고 올라야 하듯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처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고, 예레미야처럼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곁에 계심을”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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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자녀답게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 18,2)
오늘은 성요셉성월, 3월의 끝날이자 내일은 4월의 첫날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임을 배웁니다.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 부활을 앞당겨 경축하는 축제 분위기의 날들입니다.
진리 탐구에 전념했던 분들의 말씀은 종파를 초월하여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다음 불가 선사의 말씀도 흡사 사막교부들을 연상케 합니다. 어제 선물받은 책안에 나오는 봉암사의 조실이자 조계종 8대 종정이었던 서암스님의 일화입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것 없다.”
“그래도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생(生)을 어떻게 정리하시렵니까?”
“이 좋은 그대로.”
“극락과 같습니까?”
“같다.”
얼마나 멋진지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참으로 진리를 살았던 구도자 서암 고승이었음을 봅니다. 사찰의 두 자산은 노승老僧이요 노목老木이라 하는데 고승高僧인 노승이면 더욱 좋겠고 천주교 수도원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이겠습니다.
어제 오후는 참 흡족한 날이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 분들 여덟 분에게 고백성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녀답게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성녀처럼 사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겸손과 사랑의 훈련장에서 참 성실히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구도자처럼 사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격려의 조언을 드렸더니 모두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환히 피어나는 얼굴들이 그대로 자녀답게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미사전례의 절정은 성체 모시기 전 마치 만세 부르는 자세로 양손을 펴들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삼가 아뢰오니’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일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삶의 중심적 가르침이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중심의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완고했던 무지한 유다인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음 예수님 말씀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삶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이 깊어져 신적일수록 더욱 인간적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적임과 인간적임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신적神的이자 인간적人間的인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면초가의 위기 상황 중에도 하느님의 아드님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분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적대자들에 포위된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예레미야의 상황이 예수님과 흡사합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의 “마고로 비싸빕”이란 말마디가 예레미야의 위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얼마나 견고한지 다음 두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던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하느님의 이름은 “I AM”이라 했습니다. 이를 보강하여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제 병상에 있는 분에게 보내드린 격려성 응원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자매님이 나을 때까지 저와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서 늘 동행하실 것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은 길고 깊게 하세요.”
오늘 제1독서 즉시 이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양노래의 고백도 힘이 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 찬양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수행도 없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이사 20,13)
여기 가난한 이들은 아나뷤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참으로 마음 가난한, 겸손한 이들을 뜻하니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앞서 생략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씀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이사 20,9)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인지요!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은혜롭습니다.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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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데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요한10,34)
<신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10,31-42)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따져 묻자, 그들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10,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다."(요한 10,34)
'신이 되자!'
'하느님이 되자!'
'예수님이 되자!'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기에 신이 될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며,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뜻(정의)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유다인들처럼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자들 안에서 조차도.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우리가 죄에 죽고 의로움에 살게 하셨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네."(영성체송)
오늘로 성전 내부공사가 끝납니다. 어제 작업으로 가장 중요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를 맞이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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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I9jgW4I_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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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 10, 39)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우리의
집착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차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내면에는
집착의 씨앗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 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만큼
낮추고
낮아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낮아져야
더 큰 것을
들을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말 없는 삶의
실천이 오히려
반듯한 길잡이며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십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묶고 있는
집착의 끈을 풀고
하느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집착과
구원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복음이며
진리입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이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욕심에서
벗어나 서로를
올바르게
변화시킵니다.
기존의 것들을
비워야
제대로 믿을 수 있는
복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십니다.
집착과 조급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인격을
반성하는
사순의
끝자락입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 신앙의 참된
바탕임을 다시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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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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