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나눈다.그러나 그 나눔의 기준은 무엇일까.예컨대 멀쩡한 사람과 미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이러한 나눔은 과연 객관적인 것일까.
○광인·정상인 나눔의 기준
우리의 삶은 수많은 나눔들,즉 분절들을 통해 이뤄져 있다.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나누고,죄인과 합법적인 인간을 나누고,정상인과 광인을 나눈다.
이러한 나눔중에는 비교적 객관적인 나눔도 있다.물과 기름의 나눔,채소와 과일의 나눔 등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그러나 정상인과 광인의 나눔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성립하는 것일까.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거장들중 한 사람인 미셸 푸코는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나눔들중 상당수가 매우 불투명한 근거 위에서 이뤄져 있음을 역설한다.
분절은 어떤 정의(定義)또는 본질을 통해 이뤄진다.물과 기름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의 본질과 기름의 본질이 명확히 다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광인을 정상인으로부터 분절시키기 위해서는 광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요청된다.그러나 이런 작업은 처음부터 역설을 함축한다.정의한다는 행위는 이성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데,이성과 전혀 모순되는 광기를 이성이 정의할 수 있을까.미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미친 사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미침’의 정의는 주관적
만일 어떤 사물의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 정의는 원칙적으로 하나여야 한다.설사 시대에 따라 정의가 변해왔다 해도 뒤의 정의는 앞의 정의를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푸코는 서구사회에서 광기의 정의가 시대에 따라 현저하게 변해 왔음을 지적한다.그리고 앞의 정의와 뒤의 정의는 서로 통약 불가능(incommensurable)하기 때문에 결국 광기에 대한 정의는 어떤 주관적 측면에서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광기에 대한 정의는 광기 자체에 입각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합리성에 상관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즉 광기에 대한 정의는 각 시대에 따라 ‘합리성이란… 한 것이다.그러므로… 것이 아닌 것들이 광기다’라는 논리구조를 띠고 이뤄졌다.다시 말해 광기는 그 자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늘 그의 타자(=합리성)에 상관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정신병원으로 내몰린 광기
르네상스 시대에 광기는 한편으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상한 행위로 여겨졌지만,다른 한편으로 신적(神的)인 것에 통하는 특수한 인식의 발생으로 여겨졌다.즉 광기는 인간 이성 이하의 존재이기도 하지만,동시에 그 이상일 수도 있는 특이한 존재였다.
그러나 고전시대(17,18세기)에 들어와 강력한 형태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광기는 이 합리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다.이제 광기는 일종의 ‘죄(罪)’로 화하며,다른 죄인들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광기는 몇몇 인도주의자들(류크 핀넬 등)에 의해 이제 ‘병(病)’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이제 ‘정신의학’ 또는 ‘정신병리학’이라는 담론이 발생하고 광인들은 병원에 안치되기 시작한다.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과 인간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의 상당수는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 시대를 지배하는 갖가지 무의식적 사유 구조들,인식 외적인 권력관계 등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구분선들은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그어져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