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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세이(1) |
반복과 차이의 일상에서 가능성을 찾다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
김 문 홍
어느 하루도 같은 일상은 없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반복을 통해 지속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이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어제 보던 하늘도 아니고 어제 불던 바람도 아니다. 늘 몸에 느끼는 햇빛이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어제 느끼던 그 강도와 질감은 아닌 것이다.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지만 오늘 볼 때에는 그 느낌이 다르다.
버스를 타고 도시철도를 탈 때에도 지나치던 사람들도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도 현상적인 구조는 달라진 게 없지만, 그것을 이루는 주변 풍경은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루도 같은 일상은 없다. 늘 되풀이되지만 펼쳐지는 일상은 차이로 변주되고 있다. 아무런 차이가 없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면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하겠는가.
미국 인디영화계의 대부인 짐 자무쉬 감독이 연출한 〈패터슨〉(드라마, 2017, 118분) 역시 일상의 반복과 차이에서 빚어지는 삶의 리듬을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7년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한 작품 중에서 가장 조용한 영화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 조용함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일상이 결코 조용하지만은 아닌 것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게 되는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뉴저지 주의 조용한 마을인 ‘패터슨’, 버스 기사로 그 도시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패터슨’이라는 조용한 남자, 그 도시 출신이며 거기에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시를 썼던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펴낸 시집 제명 역시 ‘패터슨’이다. 이 영화는 패터슨 시에 살고 있는 버스 기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분)의 일상을 시적인 리듬으로 조명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한 주 동안 반복되는 패터슨의 일상의 모습이 서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미국영화의 서사를 배반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쇼트와 컷, 마음의 리듬을 훨씬 앞지르는 정신없는 속도감의 장면 전환, 예측 불허의 서사적 전개로 관객에게 통쾌한 상업적 재미를 선사하는 헐리웃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일상의 반복과 그 속에서 균열되는 차이가 서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현상적 변화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실망을 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동양적 여백과 여운을 삶의 미덕으로 삼는 조용한 이에게는 수많은 얘깃거리를 선사하는 것이 또한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다. 가끔 번잡한 일상을 떠나 고즈넉함 속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맡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청량제가 될 수도 있다.
반복과 차이가 빚어내는 변주
주인공 패터슨의 일상은 판에 박은 듯 계속된다.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와 함께 잠을 자다가 아침 6시 10분에서 30분 사이에 잠을 깬 패터슨은,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이따금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혼자 아침을 먹고 아내가 준비해 둔 도시락 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선다. 늘 걷는 같은 길을 걸어 버스 회사에 출근하고, 이따금 배차 담당인 도니와 짤막한 일상을 주고받으며 시내 운행을 떠난다.
가끔 자신만의 공간인 폭포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자신의 비밀 노트에 시를 적는다. 퇴근하면 아내와 자잘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다가 키우고 있는 개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즐겨 찾는 바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주인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이것이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월요일 아침부터 일요일까지 패터슨의 일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변화 없이 반복되는 패터슨의 일상이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이 되고, 그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이 서브플롯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한 편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의 진전되는 나날의 일상이 시퀀스가 되고, 그 일상 속의 변화들이 서로 만나 장면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두 시간 여의 반복되는 변화 없는 일상이 주요 뼈대가 되고 이렇다 할 만한 방점의 사건이 없어도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반복이 만들어 내는 미세한 차이 때문이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인데도 똑같은 장면은 하나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모습만 해도 그렇다. 잠자는 모습이 한 예이다. 월요일에는 서로 마주 보면서 잠들어 있는가 하면, 화요일에는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잠들어 있고, 수요일에는 서로 다정하게 끌어안고 자는 모습인가 하면, 목요일에는 패터슨이 로라를 뒤에서 끌어안는 백 허그이고, 금요일에는 패터슨 혼자 누워 있고, 토요일에는 먼저 일어난 로라가 키스로 패터슨의 잠을 깨운다.
출퇴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늘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건물을 지나가고 있는 데에도 늘 같은 풍경이 아니고 다르다. 그것은 곧 감독의 시적인 감수성이 빚어낸 차이의 리듬 때문이다. 굴다리 밑을 지나는 데에도 카메라의 앵글이라는 변주 때문에 그런 기막한 변화의 리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피사체에 대한 카메라의 위치나 렌즈의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그러한 변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그리고 버스 안의 승객들이나 지나치는 사람들, 맥주를 마시는 바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상황, 심지어 는 맥주 바 앞에서 기다리는 개 마빈의 앉음새까지도 모두 다르다.
패터슨은 버스에서 만나는 승객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관심 있게 듣는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는 모두 일상의 고즈넉함과는 다른 혁명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고 뒤틀려 있다. 승객들의 화제가 곧 이 영화의 변화와 차이의 추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찻잔 속의 물처럼 평화롭고 단조로우며 무미건조한 일상인 데에도, 승객들의 일탈적인 대화의 소재가 찻잔 속의 태풍이 되어 일상의 리듬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내인 로라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기타를 배우고 싶다며 조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커튼과 옷의 디자인을 보여주기도 하고, 갑자기 컵케이크를 만들어 돌아오는 장날에 팔려고 하기도 한다. 패터슨이 변화 없는 일상 속에서 비밀 노트에 시를 쓰며 변화를 시도한다면, 로라의 예술적 취향 역시 무미건조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놓기도 한다. 그들 두 사람은 가장 이상적인 부부의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이 하는 일이나 시도를 핀잔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어주고, 또한 상대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존중하고 인정해 준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서로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고,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사람의 끈을 놓지 않는 그것은 곧 바로 부부의 이상적인 모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들이 집안에서 키우는 개인 마빈 역시 하나의 훌륭한 등장인물로 변화와 차이의 주역이 되고 있다. 패터슨에 대한 불만의 감정,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소외감을 표현하는 툴툴거림, 산책할 때의 매번 다른 걸음걸이, 맥주 바 앞에서 목줄에 붙잡힌 채 패터슨을 기다리는 앉음새의 모습까지 다양한 변화의 방점을 찍어 영화의 서사 전개에 입체적이고 탄력적인 리듬을 제공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엔딩 크레딧 끝에 ‘넬리를 추억하며’라는 자막이 뜨는 것은, 실제 이름이 넬리인 이 개는 영화 촬영이 끝나고 두 달 뒤에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텅빈 공백은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반전과 함께 온다. 아내 로라와 함께 저녁식사와 영화 구경을 하고 돌아온 날, 소파 위에 두었던 패터슨의 시작 비밀 노트를 집에 홀로 남아 있던 개 마빈이 물어뜯어 산산조각을 낸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손실과 맞닥뜨린 것이다. 패터슨의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소가 되던 시편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패터슨은 마빈을 나무라지 않고 속으로만 화를 삭이고 있다. 아내 로라는 마빈을 나무라고 바깥에서 자게 하는 극약처방을 하지만, 패터슨은 그저 무기력한 모습으로 상실감을 속으로만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반전은 결말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반전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쉼터인 폭포 공원에서 우연히 여행 중이던 일본 오사카의 시인을 만나게 된다. 일본 시인의 가방 속에는 패터슨이 좋아하는 패터슨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시인의 시집 『패터슨』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시인은 그 자리를 떠나면서 패터슨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네주며, “때론 텅 빈 노트가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의미심장한 시적 은유의 경구를 던진다. 여기서 ’텅 빈 노트‘는 마빈이 산산조각 내 버린 패터슨의 시작 비밀노트를, 그리고 ’더 많은 가능성‘은 다시 전개될 패터슨의 시작 작업을 예견하는 은유가 될 수 있다. 즉, 다시 패터슨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차이와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시 쓰기를 계속 할 수밖에 없다는 예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일본 시인은 떠나다 문득 뒤돌아보며 그에게 ‘아하’라는 감탄사를 건넨다. 그러한 감탄사는 곧 일상 속에서 시적 소재를 발견하는 것, 또는 변화 없는 일상 속에서 차이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라는 마음의 다잡음일 수 있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은 시인들이 보기에 안성맞춤의 영화이다. 아니면 늘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는 사람이거나, 또는 산더미처럼 쌓인 시간 앞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운용할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늘 시간과 일에 쫓기며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는 바쁜 일 중독자에게, 그것도 아니면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시 작업의 리듬과 무척 닮아 있다. 시 쓰기란 곧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며,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번뜩이는 감수성을 발견하는 일이며, 피사체(소재)에 대한 앵글이 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짐 자무쉬는 곧 시인이다. 그는 변화 없는 일상 속에서 ‘아하’라는 경탄의 감탄사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며, 우리 또한 그의 영화를 보면서 ‘아하’라는 감탄사로 그의 영화 속 비밀을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가능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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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미가 있는 영화이긴 한데 큰 사건이 없고 지루해서 끝까지 보지는 못했네요.
추천 영화였는데 아직 못 봤습니다.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면, 반복되는 일상을 유지하기보다심화하려고 할겁니다. 미세한 변화라도 찾으려고 할거고요~~명화 추천 고맙습니다.
매일 매일이 반복되지만
다 조금씩 다릅니다.
감독은 그 다름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보여주고
그 해답은 관객이 찾아야 한다,
이런 걸 말하고 있네요.
영화 평 잘 보았습니다.
꼭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