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나간 추정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blog.naver.com/changss0312
어떤 부인이 나를 찾아와서는 상담자로서 명성이 자자해 뵙고 싶었다며, 고등학생인 딸이 등교를 거부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동안 전조 사인이 있었을 텐데 그동안 뭘 하다 사태가 악화한 지금에서야 허둥대냐고 묻자, 그녀는 도움을 청하러 온 마당에 무엇을 숨기겠느냐며 그동안 자기가 열애에 빠져 사느라 정신없이 지냈다고 대꾸했다. 처음으로 만난 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치부를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소상하게 말해주었다.
일찍이 고향에서 남자를 사귀었는데, 시골에는 미래가 없다며 그곳을 뜨기로 굳게 약속했단다. 그리하여 자기는 독하게 마음먹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해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도시로 나와 온갖 고생을 하다 현 남편을 만났는데, 야속하게도 그는 경제 관념이 약해 늘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단다. 자기가 아이를 낳고 영양실조로 황달을 앓곤 했는데 그때마다 친정에 가서 몸을 추슬렀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멀리서 그 남자는 자기를 보고 기껏 도시로 나갔으면 잘 살아야지 그 꼴이 뭐냐는 식으로 딱하게 바라보았단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남자가 멀끔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등장했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토지가 수용되어 꽤 많은 보상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점을 미안해하고 나아가 이 여자가 궁핍하게 사는 것을 딱하게 여겼던 그 남자는 자기에게 따듯했다고 한다.
앞뒤 가릴 겨를 없이 그와 사랑에 빠졌던 자기는 딸이 보였을 전조 사인을 인식할 겨를 없이 지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남자와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기쁨에 취해 살았어도 후반에는 만나면 싸우느라 정신없었단다. 싸우고 나서 연락이 뜸하면 안달하느라 정신없어하다가 만나면 또 싸웠으니, 이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한숨지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부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선생님, 저는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서 왜 자꾸 싸우는 걸까요?”
바로 코앞에서 이렇게 묻는 바람에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던 나는 머뭇거리다 포괄적인 말로 답변했다.
“싸운다는 것은 기대, 즉 뭔가를 욕심부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욕심이라, 욕심이라…. 그런데 제가 무엇을 그리 욕심내는 거지요?”
이렇게 내가 한 말을 꼭 집어 그녀가 반문하자,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하며 이리저리 궁리하다 이렇게 짚었다.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요?”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가 싸운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
이렇게 그녀가 선뜻 동의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방점을 찍은 나는 그녀에게 서로 가정을 가진 마당에 안주인 자리를 욕심내면 되겠느냐며 그것만큼은 버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그녀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바람에 상담의 애초 목적인 그녀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뒤로 밀렸고, 온통 그녀의 사연으로 상담 시간을 다 채웠다. 그리하여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의 상담을 마쳤는데 나는 상당히 찝찝했다. 그녀가 던진 질문에 과연 적중하는 대답을 했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기는 왜 그 남자와 만나면 싸우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녀가 안주인 자리에 대한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나 자신도 그러한 추정이 맞는지 모호했다.
찝찝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자문을 맡아주시는 철쭉 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모를 말하며 내가 합당한 말을 했는지 여쭙자, 철쭉 님은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치듯 말씀하셨다.
“상담자가 그런 비현실적인 소설이나 쓰다니, 그만 죄짓고 상담을 그만두시오.”
이와 같은 질타에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동안 철쭉 님의 서릿발 같은 말씀은 이어졌다. 두 딸을 둔 여자가 그 남자의 가정에서 안주인 자리를 탐낸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그 여자가 싸우는 이유는 돈 때문이란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그 여자가 앞서 다 말했다고 한다. 즉 남편이 경제적으로 시원찮아 자기는 고생을 많이 했고, 그 남자는 토지에 대한 보상금을 두둑이 받아 그 여자 앞에 등장했다고 말했단다. 그러니까 더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남자가 처음에는 돈을 풍풍 써대지 않았겠느냐고 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나서는 처음처럼 돈을 쓰지 않으니까 그 여자로서는 감질이 나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그 여자가 그 남자에게 돈 달라고는 차마 말 못 하고 엉뚱한 트집을 잡아 싸우느라 딸이 죽는지 사는지 돌아다 볼 겨를 없이 살았을 게 뻔하다고 하였다.
마치 비디오를 본 듯이 말씀하시는 것에 내가 의아해하자, 철쭉 님은 내게 삶의 치열함을 보는 눈이 부족하다며 그것을 보완하지 않으면 상담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로 혈안이 되어있는데 동떨어진 것을 읊조리는 식이니 무슨 상담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그 부인에게 안이한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나는 다음 회기에서 내 실수를 바로 잡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쭉 님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가 장 교수 명성을 듣고 찾아왔어도 그게 허명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오지 않을 거요. 그러지 않아도 돈이 궁한 판에 현실에서 동떨어진 말이나 하는 사람에게 뭐하러 다시 상담을 받으러 오겠소?”
“그래도 약속을 잡고 갔는데요.”
“안 온다니까요! 그 여자가 장 교수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기 때문에 안 와요.”
철쭉 님의 단호한 어투에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녀가 다음 상담 시간에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었는데, 철쭉 님이 예상한 대로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참담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녀에게 왜 오지 않았느냐고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상담자로서 내담자의 애환, 특히 가난에 대해 둔감하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다시금 우리가 몸을 지닌 유기체라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지닌 이상 많은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부인 덕분에 다시금 각인하였다. 자칫 이런 기본적인 것을 건너뛰고 정신적인 것에 치중하다가는 가분수 격을 면하기 어렵겠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첫댓글 "그 여자가 싸우는 이유는 돈 때문이란다.
어느 정도 지나서는 처음처럼 돈을 쓰지 않으니까 그 여자로서는 감질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어떤 부인 헛된 인생, 시간 낭비,,, 보람있는 인생 살아야....
돈 때문에!!!
다양한 문제 상담..
감사해요..
상담을 하다보니 도리어 제가 배우는 게 참으로 많답니다.
그래서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