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버는 아이셋 행복하다는 엄마는 꼭 읽길
잘못 눌러서 빈글이 올라갔는데 이왕 올라간거니 그냥 이어쓴다
포털에도 기사가 뜨고 댓글이 2천개가 달렸지.
월급 200이면 결혼도 하지말고
아이도 낳지말란 이야기는 아니다.
가난한데 애들 많은 집 아이가 겪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긴 이야기지만 아이많이 낳은 가난한 당신네
딸 아이의 미래가 될 수도 있으니
읽고 처절하게 반성하며 당당이라도 더 건설적인
미래를 두 부부가 준비하길.
열 받으니 반말로 쓸거라 양해바래요.
현재 나는 이 악물고 자수성가해서
나름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둘째다.
당신 자식들도 자수성가하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읽어보렴.
가난이 뭔지.
우리집은 아이가 셋이었다
지금 내가 30대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그 당시 200을 버셨다. 외벌이.
그 시절 200이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
나는 가진 것 하나없이 맨몸으로 결혼한 부모님의
세 자녀중 둘째였고.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다들 수준이 비슷비슷한 가난한 주택가의 허름한 동네였다.
어릴적의 기억은 행복했다. 근데 딱 초등학생까지만이었어.
지금은 스마트폰, 매체가 발달해서 정보가 빠르니
요즘 아이들은 초등 들어가자마자 느낄수도 있겠다.
그 당시 잘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정보를 몰랐으니 내가 느끼지못했던 상대적 박탈감은
초등 고학년이 되기 전부터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었어.
유치원때는 아예 불행한 기억이 없어. 어리니까 가난을 모르거든.
없는 형편에도 엄마는 외식을 못하니 집에서
나름 피자까지 만들어 주셨어.
롯데리아라는 패스트푸드는 초등1학년때 처음 먹어봤는데
1년에 한번 먹을까말까 하는 최고급 외식이었고
돌이켜보니 그게 데리버거세트였다.
우리집은 외식은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케이크는 정말 특별한 날에 먹을까 말까한 음식이었는데
초등학교때 외동 친구집에 갔더니
(그 친구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부유한 친구였어)
식탁에 하얀 과일생크림케이크가 자주 놓여져 있어서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항상 옷을 물려입었고 당연히 용돈은 없었기에
늘 친구들이 먹는 것 지켜보고, 얻어먹고.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문제집도 못 샀기때문에 선생님이 주신 거였고
매점에 간식 사먹고는 싶은데 늘 돈은 없고.
그래도 착한 친구들이 많이 사줬다.
하도 얻어 먹어서 내 별명은 "빈대"였어.
그때는 웃어넘겼지만 항상 없는 형편이라
돈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학창시절
잠시 성격도 어두워진듯 하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밝고 긍정적이고
기부도 하면서 산다. 아직 국내에도 나처럼 힘든 아동이
많을거라서 절대 해외기부는 하지않고 오로지
국내아동돕기에만 기부를 하고 있다.
아무튼.
학교에서 급식비를 못내서 항상 행정실로 불려다녔고
전교에 급식 미납자명단을 방송하는데
매번 내 이름이 빠져본적이 없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한장으로 오래 버티다가
아래가 헐기도 했지.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지
그래서 지금도 생리대가 없어 운동화깔창을 깔았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우리집이 없다는게 약간은 불편하지만
행복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살면서 점점 고통스러운 순간들과
수치심느껴지는 순간들이 늘어만 가더라.
아버지의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오를 수 없는 직종이었고
가난은 물가상승률과 맞물려 너무 지독해지는 수순이었다.
가난한 우리에게 월세는 평생 월세였다.
어느 날은 동사무소에서 불우한 이웃울 돕는다며
반찬과 쌀 김치를 가져다 줬는데
내가 중학생이라 정말 부끄럽고 싫었지만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그냥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항상 낡은 주택에 살았는데 겨울엔 우풍이 들고
기름이 떨어지거나 보일러가 고장이라도 나면
파카를 껴입고 덜덜 떨면서 자야했지.
수도가 얼면 뜨거운물을 끓여 부어서 녹여줘야 했는데
그래서 씻지도 못하고 학교에 간 적도 많고
찬물로 머리를 감다가 너무 고통스럽고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괴로워서 중간중간 멈추고 쉬어가며
끝끝내 머리를 감았던 적도 있어.
하루는 세탁기가 고장이 났는데 고칠 돈이 없어서
한 겨울에 찬물에 손빨래도 해봤고
수건을 널어두면 얼어서 그걸로 닦느라 추웠던 기억..
정말 수건에 얼음이 생기는걸 그때 알았지.
그래서 아직도 겨울이라면 치가 떨리게 싫다.
가난하게 늘 월세로 낡은 주택에 살았기에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놀러갔을때는 정말 신세계였고
따올려 보니 그 아파트는 주공이었는데
주공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그시절 미치도록 부러웠다.
나는 언제 이런 집에 살아볼까....언제 아파트라는 곳에 살까?
아버지가 직장을 잃자 가계는 더욱 기울어 힘들어졌다
학교에 내는 공납금과 급식비는 언제나 밀렸고
고등학교까지 학원 한번 못 다녀봤으며 먹고살기 힘드니
자녀교육은 당연히 방치였어.
어머니도 일을 하러 다녔고
맞벌이 부부가 집을 비우면 아이셋 우리집은
아픈기억을 끄집어내 쓴 글에 하루만에
베스트에 올라오고 사람들의 반응에 약간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나처럼 가난으로 아팠던 사람들이 많았구나..
가난은 무조건적인 불행이라 할 수 없지만
정말 가난했고 그것으로 인해 비참한 기억을 가져본 사람들은
압니다. 가난이 얼마나 아픈건지....
이제는 살만해도 그때의 그 아픈 기억들은 종종 나를 찾아와요.
아픈줄 모르고 살았다가 어느날 한번에 몰려옵니다.
이 글은 제가 잘났다. 나 벤츠탄다도 아니며
230엄마는 절대 행복해하지 말아라도 아닙니다
엄마 본인은 행복하실 수 있어요.
다만 그 아이가 겪을 아픈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두 분이 치열하게 대비하라 입니다.
우리끼리 이렇게 행복하면 되니까. 아니요.
아이들은 상처받을 수 있어요.
특히 일찍 철든 그 아이는요
절대 그 상처를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겁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지금은 먹고 살만해졌지만
이렇게 오기까지 잔인하고 아팠던 내 가난의 기억은
나의 10대와 20대를 아름답지만은 못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신경림의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시를
이제는 가슴으로 이해한달까요...
그때 그 가난은 내 잘못이 아니었고
어린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단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무능하지 않다
스스로에게, 내 안의 어리고 아픈 나에게
매번 증명하려하듯 치열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씩 해낼때마다. 봐. 너도 할수 있잖아
너 가난했지만 무능하지 않아
스스로에게 말하죠.
그래서 내 부모님을 더 이해못했던 것 같아요.
나는 이렇게 내 아이에겐 상처안주려고
이 악물고했는데 두 분은 왜 그러셨을까...
남들에겐 그냥 얻어질지도 모르는.
누군가는 부모님이 쉽게 사줄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치열한 삶에 대한 보상으로 떨리는 손으로
벤츠라는 걸 샀을때, 감히 작은 성공이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 혼자 말이죠.
주작이다 주작같다. 그 말이 꼭 나올 것 같아서
웃기지만 작은 사진도 올렸습니다.
더 좋은 차,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보면 우스울지도 모릅니다
S클래스를 타는지, 월에 얼마를 버는지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재력을 자랑하고 싶은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미치도록 가난했던 소녀가
아픈 기억을 딛고 이제 먹고 살만큼 살아가는데도
한번씩 아플만큼 힘든 기억이 남는다는 걸.
그래도 그 가난이 네가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좋게 생각해라? 그 고통이 널 키운거다?
글쎄요. 참 현실은 잔인했던 것 같네요
그냥 나... 평범한 집에 오손도손 아픈 기억없이 살고싶었어..
이게 제 진짜 마음이랄까요?
지금 만나는 사람들 다들 구김없고 저와 다른 유년을 보냈더군요.모릅니다. 주변에서는 제가 이렇게 가난했었는지.
저런 사람이 진짜 존재해? 네. 지금도 많습니다.
녀석들이 얼마나 아플지 저는 압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고 작은 기부라도 하면 좋겠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월급 200만원에 대한 자작논란도 많은데
아버지가 결혼하자마자 줄곧 200버신게 아니라
맨몸으로 하셨기에 그 당시로 치면 지금 200버는 것 정도의 수준이셨지 싶습니다. 아이 셋을 단칸방부터 시작하셔서
방이 두개있는 낡은 주택으로 옮기기까지 아버지의 봉급은
그저그런 수준이었고 엄마가 너희 아버지가 그때 당시 200만원을 받아왔다 라고 말하신 기억이 나서 그렇게 작성하게 되었습니다..오해를 준 점은 정정하고 싶습니다.
그때가 제 유치원말쯤이니 아버지가 그렇게 200을
버셨던 것은 잠시였던 듯 합니다.
과거를 못 버리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글쓴이가 아니라
내가 걸어온 아픈 길을 분명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 길에 가지 않도록
내 아이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아픈 나도 결국은 나니까요
230 엄마가 행복하다는데 왜 난리야
남의 행복에 네가 뭔데 감나라냐
네.. 어머니는 행복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본인만 행복하면 끝이 아니죠.
낳은 아이들에 삶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들은 낳아서 던져두면 크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그 아이들이 이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차가운 현실이 이러할지도 모른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 중에 특히 철이 일찍 들 아이에게 말이죠.
긴 추가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 내면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기위해
마주하며 견디고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 아이도 부디 그렇길 바랍니다.
아이야. 가난은 절대 네 잘못이 아니란다. 힘내렴
https://m.pann.nate.com/talk/343928502?&currMenu=talker&vPage=1&order=RAN&stndDt=20181024&q=&gb=d&rankingType=total&page=1
첫댓글 찬반댓은항상븅신
저런집에서 자란 자식들이 불행하다고 나같은 애 만들바에야 애낳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부모만 귀막고 엥? 난 애가 있어서 행복한데?? 니가 뭔데 애 낳아라 말아라 ㅈㄹ이야! 이런 반응임. 멍청하다는 소리밖에 못하겠다 진짜로
찬반대결 댓글 왜저러냐..
찬반댓 애 생각없이 싸지르고 최소한으로 먹이고 입히면서 키우는 듯.
니 자식은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세상에 나와서 얼마나 힘들지 생각 좀 해봐. 존나 이기적이야
판이나 남초가면 알콩달콩충 개많자나 ㅋ 이삼백벌어도 알콩달콩 잘살면 그만이라는ㅋㅋㅋㅋㅋㅋㅅㅂ
ㅇㄱ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네끼리 살면될듯ㅋㅋ
엄마 본인은 행복하실 수 있어요.
다만 그 아이가 겪을 아픈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두 분이 치열하게 대비하라 입니다.
우리끼리 이렇게 행복하면 되니까. 아니요.
아이들은 상처받을 수 있어요.
특히 일찍 철든 그 아이는요
여기 진짜 공감된다 내가 그 글 보고 화났던 이유도 아이가 행복한건 이해가는데 엄마가 만족하고 행복하다는게 화났음 부모가 아이 꿈을 좁히고 있는데 행복하다니;;아이가 갈 수 있는 길이 한정될거고 아이 스스로 포기할 상황이 생길 거란게 너무 가슴아파 나도 겪었던 일이라 가슴아프다
나도 초딩때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혼자서 나랑 동생키움...항상 돈이없어서 돈에치여살았고 내가 하고싶던 미술도 그 어린나이에 우리 집이 가난하니까 방과후 교실 한달 2만원인가? 그거도 엄마한테 말 못하고...크고 취업하면서 엄마랑 여행도 가고하지만...가난하면 참 애기들이 힘들당ㅢ
진짜 안타까워
나이먹을수록 가난한거 존나 개씨발스러움.... 그리고 박탈감 점점심해지고..... 내가 여기서 벗어날수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엄청심함
2 평생 돈에 쪼들리고 살게 보여서 너무 싫어..... 적금 넣고 내 생활비 하기도 빠듯한데 혹시나 어디 아플까봐 걱정되고
가난하면 애를 낳지 마세요 제발
돈 없으면 애 낳지말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 90%는 자기가 겪어봐서임.
이게 막 급식비 못내서 창피 당했던 기억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밥은 안 굶었지만 하고 싶은게 있어도 눈치 보고 참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도 낳지말라 말하고 다님.
쌍팔년도 이전이야 비슷하게 못 살아서 특별하게 잘 사는 경우가 주변에 없었음. 이거 보는 우리도 대기업 3세들 진심으로 부러워 하진 않잖아.
근데 요즘은 아니야. 내 주변의 부가 피부로 느껴져. 우리가 크면서 점점 더 느끼고 있고 앞으로는 더 심하겠지.
누구는 1년에 한번 가족여행 가는게 평범할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큰 꿈임.
슬프다 나도 옛날생각많이나네.. 아직 나는 자수성가한건아니지만 집안 형편이 옛날보다 나아져 여차저차 사는데 옛날 가난했던 시절 생각해보면 다시는 돌아가고싶지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