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24일 자진 사퇴했다. 총리 후보에 지명된 지 14일만이다. 총리 후보자 낙마는 지난 2000년 고위 공직자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법이 도입된 이후 6번째, 박근혜정부 들어서 3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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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자진 사퇴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도 상처를 입었지만, 문 전 후보자 역시 큰 상처를 입었다. 총리 후보자 직을 수락한
이후, ‘민족 반역자’, ‘친일파’ 등 인격 살인에 가까울만큼의 생채기를 입었기 때문이다. 문 전 후보는 사퇴 기자 회견서
“친일이란 말에 저희 가족은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문 전 후보 뿐만 아니라 비롯한 역대 낙마자들 모두,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면 여생을 탈 없이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술렁이는 여론과 정치권의 이해 관계에 의해, 별다른 해명의 기회도 없이 이들은 대부분 죄인처럼 사퇴했다.
정
치권에선 인사청문회의 문턱이 너무 높다는 푸념도 나온다. 사람을 뽑을 때 검증만을 염두에 두다 보니 쓸 사람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이 불법이냐 아니냐만을 잣대로만 사람을 가리는 것이 애초에 잘못됐다는 의견도 있다.
박근혜 정부서만 3번째 낙마, 넘기 힘든 인사청문회
문
전 후보자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의 낙마자는 지난달 사퇴한 안대희 전 대법관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던 ‘책임
총리’의 적임자로 여겨졌지만, 후보 지명 엿새만에 사퇴했다. 전관예우 등 논란이 발목을 잡았다. 국민 검사로까지 칭해지던 그가
변호사 업무에 손을 댄 지 5개월만에 16억원을 벌었던 게 문제였다.
총리실 관계자에 따르면 안대희 후보는 사실
사퇴날 오전까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문회 강행시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좋은 영향이 끼칠 것을 염려한
새누리당 측에서 사실상 ‘더 이상의 엄호가 불가능하다’는 신호를 안 전 후보자에 보냈고, 이런 과정이 오가자 본인이 사퇴를
결심했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 소장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 김 후보자는 박근혜 정부의 기틀을 짠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 자신이 인수위에 관련된
인사들이 청와대나 정부로 이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한 탓에 후보자 지명 때부터 논란이 일었다.
이후 전관예우,
토지 불법 증여, 아들의 병역 면제 논란 등이 언론을 통해 불거졌고 김 후보자는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에 후보직을 사퇴했다. 헌재
소장 퇴임 이후 5일 만에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긴 것과 두 아들 명의로 지난 1975년 매입한 서울 서초동 땅(대지 면적
674㎡)의 취득세 납부 등이 문제가 됐다. 김 후보자는 별다른 해명 없이 후보직을 사퇴했고, 임기가 남아있던 인수위원장직은 계속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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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극 전 후보자는 친일파란 매도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여성, 언론사 사장 출신도 줄줄이 낙마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2010년에는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다. 당시 김 후보자는 40대 젊은 총리로 불리며 힘이 실리기도 했지만, 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김 후보자는 경남지사 시절인 지난 2007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뉴욕의 한인식당 강서회관에 들려 박 전 회장의 부탁을 받은
이로부터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대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당시 야당은
박연차씨와 김 후보자의 친분이 각별했다는데 초점을 맞췄다. 결국 청문회가 끝난 4일 뒤 김 후보자는 사퇴했다. 당시 19대 총선을
앞두고 주류 친이 세력이 김 후보자의 인준 표결이 예상된 본회의를 연기하는 등 당·청 관계의 파열음이 작용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정국이 요동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장상 총리 서리와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이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의혹 등으로 청문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장
상 총리 서리의 경우 첫 여성 총리 후보자라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동아일보 인명록에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이 아닌 프린스턴대라고 적혀 있음에도 직접 사인을 했던 것을 비롯, 지난 1977년 당시 네 살이었던 아들의 한국 국적을
포기시킨 배경, 20여년간 14억원의 재산증식 과정 등이 맞물리며 21일 만에 사퇴했다.
한 달 뒤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장대환 후보자는 언론사(매일경제) 사장 출신이라는 이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언론사 사장이
총리서리에 지명됐는데 장상 서리 때보다 더 심한 검증이야 하겠느냐는 총리실의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한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예금액이 16억원 이상 증가한 것이 문제가 됐다. 또 그가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 임원대여금이란 명목으로 회사에서 돈을 빌려 매일경제신문 관계사의 지분을 매입한 것도 지적됐다. 장 후보자 역시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하고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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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총리 후보 낙마자.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대희, 김용준, 김태호, 장상, 장대한/ 조선일보 DB
총리 서리(署理)와 후보자에 머물렀던 사람, 헌정 사상 11명 초대 총리 지명자였던
이윤영씨는 네 차례나 인준을 받지 못한 불운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이씨를 국무총리 서리에 지명했지만, 국회의
임명동의안 투표에서 30.6%의 찬성에 그쳐 총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씨는 이승만 정권에서 이후에도 3차례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됐지만, 인준이 모두 부결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이 대통령 취임식때 기도를 맡았던 목사 출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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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 대통령 집권시 신성모ㆍ백한성ㆍ백낙준 등도 총리 서리에 그쳤다. 6ㆍ25 전쟁 중 신성모 총리서리가 물러나고, 백낙준씨가 이
대통령에 의해 후임으로 지명됐으나 의회의 인준을 얻는 데 실패했다. 허정씨는 1공화국 때 총리 서리였지만, 2공화국에서 총리에
올랐다.
내각제이던 1960년에는 김도연씨의 총리 인준이 거부됐다. 지난 1987년에는 이한기 씨가 총리 서리에
내정됐지만, 총리가 되진 못했다. 박충훈 씨의 경우는 1980년 총리서리가 된 뒤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는 바람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총리 서리를 거쳐 결국 총리자리에 올랐던 허정씨와 총리서리에서 곧바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던 박충훈씨를 제외하면 헌정사상 총리 직전까지 갔다가 낙마하거나 정식 총리가 못된 사람은 모두 11명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 지명부터 자진사퇴까지 2주일 ▲6월 10일=문창극 전(前) 중앙일보 주필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6월 11일=문 후보자 “일본 식민지배, 남북분단 하나님의 뜻” 교회 강연내용 파문
▲6월 12일=문 후보자 “위안부 문제, 일본 사과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다” 서울대 강의내용 발언 논란
▲6월 12일=문 후보자 “식민지배·남북분단 내용은 왜곡 보도, 청문회서 해명”
문 후보 친 동생 구원파 분류 교회 현직 장로 재직설 보도. 성 소수자 비하발언 보도
▲6월 13일=문 후보자, 관훈클럽 신영기금 이사장 재직 당시 고려대 석좌교수직 자원. 셀프교수·셀프급여 논란. 문 후보자, 식민지배·남북분단 발언 보도 관련 법적대응 시사
▲6월 16일=문 후보자 해군장교 복무기간 중 보직 없이 대학원 수강설. 특혜의혹 보도
▲6월 17일=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 후보자 사퇴 요구 일인시위
▲6월 18일=문 후보자, 사퇴 압력에도 “청문회 준비하겠다”
▲6월 23일=박근혜 대통령 순방 마치고 귀국. 국가보훈처 “문 후보자 조부 독립유공자 가능성” 밝혀
▲6월 24일=문 후보자, 오전 10시 긴급 기자회견 열고 후보직 사퇴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