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가 어긋난 사랑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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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20대 후반의 여성은 그 나이다운 발랄함을 지니지 못하고 슬픔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무슨 연유로 상담을 받고자 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시차가 어긋난 사랑을 하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용인즉, 그녀는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인 분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존경한 나머지 그분이 이끄는 자원봉사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갖가지 잡다한 일을 하며 그분을 돕다 그만 정도를 넘어섰는데, 한번 가까워진 관계를 되돌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연실 관계를 맺었는데, 자기 친구가 같은 또래의 남자를 사귀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문득 ‘나는 이게 뭐지?’ 하는 회의에 빠져들었단다. 그 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잘 어울린다는 축하 인사를 듣는데, 자기는 누가 알세라 전전긍긍하며 지내자니 견딜 수 없이 자신이 비루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는 그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음지에서 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단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정 힘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해 주어 헤어질 때 많이 울었는데, 그 뒤 수시로 자기를 잊지 못해 자기네 집 주변을 배회하는 그 사람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사회적으로 추진하던 큼직한 일을 끝내는 대로 이 여성과 함께 살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한단다. 즉 그와 자기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가 이혼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자기 처지를 견딜 수 없다며 그녀는 흐느꼈다. 사랑을 위해 그를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그분의 가정이 파괴되지 않도록 자기가 떠나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하였다.
‘시차가 어긋난 사랑’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나는 그녀를 딱하게 여겼다. 사랑에는 국경이나 나이도 없다는데, 그녀가 바로 그런 사랑을 하는 것 같아 애처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나를 찾아와 하소연한다는 그 자체는 그 남자와의 관계를 이겨낼 힘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음지의 사랑이라도 견딜 수 있겠지만,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으면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녕 그와의 사랑이 참되다고 여기면 말없이 조용히 기다리거나 지내는 것이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양지의 사랑을 위해 떠나라고 일렀다.
이렇게 그녀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모든 게 그녀 자신의 깊이와 그릇에 달려있다고 둘러 말하자, 그녀는 그저 울기만 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명확하게 말하면 반박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모든 게 그녀의 그릇에 달렸다고 하니까 딱히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듯했다. 아무튼 자기를 존중해주는 것 같아 고맙다며 그녀는 다음 상담 약속을 잡고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난 다음, 나는 그녀가 말한 ‘시차가 어긋난 사랑’이란 말을 곱씹으며 ‘만약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시련이든 감내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애착한다는 게 합당할까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헷갈렸던 나는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는 게 타당한지 상의하고자 철쭉 님께 전화를 걸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철쭉 님은 대뜸 그 남자의 나이를 물었다. 50대 중후반이라고 대답하자, 철쭉 님은 소리치듯 말했다.
“지금 소설을 쓰시오? 장 교수의 그런 감상적인 버릇을 내던지지 않으면 혼란스러워하는 내담자를 돕기는커녕 죄를 짓는단 말이요”
단호하게 야단치는 어투에 놀란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감상적인 버릇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지요?”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 나이의 남자가 사랑 때문에 그 아가씨 주위를 배회한다고요? 꿈 깨시오. 그런 게 아니라, 그 남자가 그 여자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 여자를 다시 손아귀에 넣으려 하는 거요.”
“예? 자기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라고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의 말에 얼얼해 있던 나에게 철쭉 님은 이렇게 일갈했다. 여자가 이미 상담자인 내게 와서 그와의 관계를 말하였다는 게 바로 보안이 안 되고 있다는 극명한 증거라고 했다. 이러한 지적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야말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다른 한편 나이 든 남자는 이미 순수한 사랑을 하기 어려운 것인가 의아하기도 하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그렇다면 그 여성이 멀리 외국으로라도 가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철쭉 님은 그 여자가 멀리 떠나도 그 남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여자가 하루빨리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 그 여자는 그 남자와의 불륜을 깊이 묻을 것이며, 그 남자도 비로소 안심하게 될 거라고 하였다.
이러한 철쭉 님의 말에 나는 넋을 놓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남자를 떠나려고 이별을 고했었는데, 그가 자기 주위를 배회하자 그것을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여기고 흔들렸다. 그리하여 고민하다 상담자인 내게까지 찾아와 도움을 청했는데, 나 또한 감상적으로 시차가 어긋난 사랑이라며 애잔하게 여겼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상담 회기에서 나는 그녀에게 그분이 주위를 배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해서라기보다 그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명예가 무너질 것 같은 불안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놀란 나머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 파랗게 질린 채 이렇게 물었다.
“이참에 유학을 서두를까요? 그러지 않아도 유학을 꿈꾸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유학이라는 대안을 언급하며 순진하게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상담자라고 하는 내 수준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없이 무거워지는 심정이었다.
“외국으로 간다고 그분이 안심하겠어요? 당신이 얼른 결혼하는 것이 서로가 사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결혼하면 남편이 있는 여자로서 당신은 함구하게 마련이고, 그분도 불안을 내려놓고 안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이야기에 그녀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꺽꺽 흐느껴 우는데, ‘누가 이 젊은이를 저토록 울부짖게 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상을 잘 산다고 하는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한참 피어나는 젊은이를 짚 밟았다는 사실에 노여움이 일었다.
아무튼 내 앞에서 한참을 흐느끼던 그 여성은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 어느 것보다 확실히 마음을 정리하도록 도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이는 많지 않아도 제법 의젓한 몸짓을 보이며 돌아가는 그녀에게 나도 부디 그렇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런 상담을 마친 후, 상담자가 순진하거나 감상적으로 되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내담자를 더욱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간혹 특수한 예가 있다손 치더라도 상담자는 보편타당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감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내담자를 더욱 수렁에 빠지게 하는 죄를 짓고 말기 때문이다.
첫댓글 20대 후반 여성이 바른 길 찿아 떠나기를 기원합니다..
상담사례
감사해요..
담장에 크로스바인이 피었네요..
봄이 왔어요..
온도 70도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