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8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솔로몬이 꿈속에서 주님께 구한 듣는 마음을 제게도 허락하옵소서.
땅에 속한 사람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영원에 속한 하늘(샤마임)에 마음을 두어 진리에 온전히 마음이 장악 당하기 원합니다.
이 땅에 있는 하늘들의 투영을 통하여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소서.
창세로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이 주께서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져 알려졌으니 그런 만물을 통하여 주의 신성 곧 진리를 보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이 종을 덮으사 덮으심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오늘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연약한 자는 잘 넘어지오니 주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20:12-23
제목 :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나는 과연 어디에 빠져 있는가?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13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19 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20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
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2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 나의 묵상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는 요나단의 시험에 의해서 확인된다.
그것은 초하루에 있을 식사자리에 다윗이 불참할 경우 그에 대한 사울의 반응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다.
만일 사울이 좋게 여기면 다윗이 무탈할 것이고 사울이 분노하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의향이 선하든 선하지 않든 그 결과를 다윗에게 알려주기로 하였다.
특히 아버지가 다윗을 해칠 마음이 있다면 그가 멀리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셔도 이를 감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다윗에게도 함께 계시기를 기원한다.
여기서 요나단은 아버지의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는 것을 합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신 다윗은 요나단이 사는 날 동안에 그에게 인자를 베풀어 그를 살려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들을 다 끊어버리실 때에 요나단의 집안에는 변함없이 인자를 베풀어 줄 것이다.
이런 요나단의 말의 뉘앙스는 그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님, 곧 죽은 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치시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이전에 자기가 맺은 언약을 갱신하는데, 이는 그가 다윗을 자기 목숨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행을 확인해주는 표시를 알려준다.
다윗이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면 화살 셋을 과녁을 향하여 쏘는 것 같이 바위 가까이에 쏠 것이다.
그리고 소년 한 명을 보내서 그 화살을 찾아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 때 소년에게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다’라고 말하면 다윗이 해를 받지 않을 것이므로 사울에게로 복귀하면 된다.
하지만 소년에게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라고 하면 다윗이 해를 받을 것이므로 다윗은 사울을 떠나 자기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시는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며 왕위 계승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영적인 친구이지만 그와 동시에 왕위 계승에 관한 한 그의 정적이다.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요나단은 그를 보호하며 도와준다.
무엇보다 그는 다윗이 왕위 계승자임을 받아들이며 그에게 인자를 구한다.
나아가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반드시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믿는다.
그 때가 되면 다윗이 자기와 자기 집안에게 인자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언약을 갱신하며 맹세로 확증한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사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왕위계승자인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요나단은 자기에게 돌아올 왕권을 내려 놓고 오히려 다윗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하여 그를 돕는 것이다.
사울은 인간의 일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요나단은 인간의 일을 끊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따른다.
요나단에게 있어서 인간의 일은 자기가 받을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일을 따라서 다윗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데 있어 자기부인의 길을 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예수를 따랐다.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비로소 드러내셨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
그의 항변은 다름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일을 하시고자 하는 예수를 꾸짖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 곧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예수를 향하여 ‘에피티마오’ 한 것이다.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꾸짖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에피티마오’이다.
그들을 꾸짖어 쫓아내신 것이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귀신 취급을 하여 몰아붙인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어(에피티마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다.
아담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아담들 곧 아담의 본성을 가진 자들은 땅의 일 곧 사람의 일을 위하여 살아간다.
그것이 자기들의 인생의 목적인 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나 역시 나의 인생을 얻고자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그렇게 고군분투하였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얻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더 좋은 것들을 얻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나는 그렇게 밤을 새우며 철야기도를 했고 그것도 안 되면 금식을 하면서까지 부르짖었다.
나는 이것이 정말 좋은 신앙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우리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다 있지 않은가?
그들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이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며, 심지어 그들의 열정과 정성은 도무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무슨 D-day에는 새벽 같이 일어나 아주 차가운 물에 목욕재계 하고 부정 타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들이 아니던가?
이런 그들에게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슬로건 아래 자신들을 철저히 부인하며 나아간다.
그런데 이런 것은 결코 자기부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나를 위한 고행이기 때문이다.
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가운 겨울에도 냉수목욕재계를 하기도 하고 자기를 비롯한 자손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상들의 묘를 좋은 명당자리로 이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효를 내세워서 돌아가신 조상들을 섬긴다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그들을 위하여 제사도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그 조상들을 위한 섬김인가?
이것은 모두가 사람의 일에 다름 아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죄인임을 알고 나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그 분께 구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생명을 구한다고 주시고 안 구한다고 안 주시는 분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창세전에 영생을 얻은 자들이다(딛 1:2, 엡 1:3-7).
따라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창세전에 이미 영생을 얻었는데 왜 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역사에 던져 놓으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담의 생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뼈저리게 알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이며 또한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그 생명으로 살다가 그 생명으로 죽는 가장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얻어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다.
나의 연약함이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분의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의 일에 목숨을 걸었던 나의 지난날의 세월이 그저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그런 부끄러움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을 얻게 됨이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도 그런 우리 주님을 가슴 깊이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지옥으로 던져 넣어 형벌에 처하게 해도 나는 아무 할 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 고백 앞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 삼아주셨으니 이것이 웬 은혜요 웬 사람인지요?
나는 죽고 죽어 일백 번을 고쳐 죽어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이런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고 내가 원하는 무화과옷을 만들어 입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입혀주신 그 가죽옷 곧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로 세워 주셨사오니 감사 또 감사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우리 주님을 다시 한 번 더 찬양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오니 그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