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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투수의 왼쪽 무릎은 복싱선수의 코처럼, 경력이 쌓여갈수록 망가지는 직업적 상처다. 정대현은 2009시즌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의 무릎을 갖고 경기에 나섰고 결국 수술을 받았다. 마운드가 낮아진지 4번째 시즌, 잠수함 투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정대현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사진제공=SK 와이번스] |
정대현은 2007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3승2패, 3홀드에 27세이브를 기록하는 동안 평균자책이 0.92였다. 2008시즌을 치르는 동안 왼쪽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았다. 2009시즌에는 그 무릎이 더욱 나빠졌다. 정대현의 공 끝은 2년 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대현이 맞이한 첫 타자는 포수 차일목이었다. 초구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차일목이 지켜만 봤다. 2구째도 같은 쪽으로 120km짜리 공이 파고들었다. 3구째가 바깥쪽 낮게 원바운드 된 뒤 볼카운트 2-1에서 4구째가 처음으로 몸쪽을 향했다. 손가락에서 빠진 공은 원바운드 되는 듯 했으나 차일목의 왼쪽 발에 맞고 뒤로 빠졌다. 몸에 맞은 공이었다. 무사 1루. 정대현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뚜벅뚜벅 마운드를 내려와 포수 정상호로부터 공을 건네 받았다. 정대현이 볼카운트 2-1에서 던지려고 했던 공은, 한 때 정대현을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만들었던 커브였다. 그 커브가 2009시즌 중반 이후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왼쪽 무릎이 문제였다.
잠수함 투수의 왼 무릎
정대현의 왼쪽 무릎은 2009시즌 후반들어 급격히 나빠졌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무릎이 스트라이드된 뒤 버텨주지 못했다. 어떤 형태로 공을 던지는 투수든, 내딛는 발의 힘이 중요하지 않을리가 없지만, 사이드암 스로 혹은 언더핸드 스로 투수에게 있어 왼쪽 무릎은 다른 형태의 투수보다 훨씬 중요하다. 잠수함 투수에게 왼쪽 무릎은, 오른손 정통파 투수의 어깨와도 같다. 쓰면 쓸수록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이다.
잠수함 투수의 왼쪽 무릎은 공을 던질 때 정통파 투수와 무릎에 가해지는 힘의 방향이 다르다. 정통파 투수는 무릎에 걸리는 힘이 지면과 수직을 이루므로 무릎에 걸리는 부하가 적지만, 잠수함 투수들은 옆에서 공을 던지다 보니 무릎에 가해지는 힘도 측면을 향하게 된다. 앞뒤로 굽히는 무릎에 좌우의 힘을 가하면, 쉽게 망가질 수밖에 없다. 잠수함 투수의 어깨는 좀처럼 망가지지 않지만, 무릎 부상은 모두 한번씩 거쳐가는 직업병이다. 언더스로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강철도, 김현욱도 무릎 수술은 피해가지 못했다.
정대현도 무릎이 아팠다. 2007년 최고의 시즌을 보낸 뒤 2008년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역사적 금메달을 결정지었던 결승전의 마지막 병살타를 이끌어냈지만 이전까지 무릎 통증 때문에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다. 2009시즌은 시작부터 왼쪽 무릎이 정대현을 괴롭혔다. 게다가 스프링캠프 동안 충분한 재활과 운동을 통해 다져놨어야 할 무릎이 WBC 참가 때문에 완벽히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보다 이른 시즌을 치러야 했다.
결론적으로 정대현의 왼쪽 무릎은 커브의 약화를 가져왔다. 왼쪽 무릎 약화는 정대현의 스트라이드 폭을 좁게 만들었다. 내딛는 발의 거리가 넓어지면 그만큼 무릎에 얹히는 힘이 커졌다. 스트라이드의 축소는 무릎의 약화를 극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대현과 같은 언더핸드 스로 투수에게 스트라이드 폭의 축소는 언더핸드 라는 장점을 무화시키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언더핸드 투수의 강점은 낮은 쪽에서 공이 던져져서 끝까지 낮은 쪽 궤적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타자입장에서 공을 봤을 때, 정통파 투수의 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변화를 가진다. 타자의 눈은 공의 좌우 변화 뿐만 아니라 상하의 높이 변화도 감지해 낼 수 있다. 즉, 3차원 공간에서의 변화를 모두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잠수함 투수의 공은 타자의 눈높이 아래에서 시작 돼 아래에서 끝난다. 좌우 변화를 눈치챌 수는 있지만, 아래에서 움직이는 공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즉 종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공이 보다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면, 타자에게는 오히려 치기 쉬운 느린 공이 될 수밖에 없다. 정대현의 무릎은 스트라이드를 좁혔고, 상체가 그만큼 숙여지지 않은 채, 릴리스 포인트가 높은 상태에서 투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스트라이드 폭 축소와 무릎의 약화는 정대현 커브의 브레이킹을 약하게 만들었다. 김정준 팀장은 “커브를 던지는 순간 브레이킹을 주기 위해 손목을 꺾는 포인트가 흔들렸다. 왼쪽 무릎이 버텨준 상태에서 손목이 꺾여야 하는데, 무릎 부담이 손목의 꺾음을 약화시켰다”고 설명했다.
2007~2008시즌 정대현을 SK의 마무리로 활약하게끔 했던 구질은 워낙 정평이 있었던 싱커와 함께 커브였다. 싱커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커브가 있어야, 주무기인 싱커가 살아날 수 있었다. 정대현의 커브는 2가지. 일반적인 커브의 궤적을 그리는 커브와, 마지막 순간 솟아오르는, 김병현의 업슛에 가까운 커브를 던졌다. 그 커브가 사라졌다. 정대현으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투구폼의 변화
신체적 약점, 혹은 약화를 극복하기 위한 폼의 수정은 단지 타자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대현은, 자신의 무릎이 약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고, 이 때문에 스트라이드 폭이 좁아졌다는 것도 충분히 알았다.
정대현은 스트라이드 폭을 줄이고, 상체를 높인 뒤, 커브 보다 싱커를 갈고 닦았다. 어차피 높은 쪽에서 던지는 공이라면, 생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었다. 직구의 힘이 떨어졌고, 커브의 각이 좋지 않았다면, 떨어뜨려야 했다. 가뜩이나 정대현의 싱커는 정평이 나 있었다. 정대현은 릴리스 포인트가 높아진 만큼, 싱커의 낙차폭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김 팀장은 “상체가 높아진 만큼 싱커의 위력이 더 좋아졌다. 정대현의 싱커는 마치 오버스로 투수들이 던지는 포크볼 처럼 뚝뚝 떨어졌다”고 했다.
정대현은 싱커만으로 타자들과 치열한 승부를 펼쳐야 했다. 던질 수 있는 구종이 줄어든 만큼 결정구 싱커를 던지기 위한 볼카운트 승부를 힘겹게 가져가야 했다. 커브가 제대로 들어갔다면, 오히려 편했을 승부를, 그 치열한 수싸움을 통해 시즌을 버텨나갔다. 정대현이 2009시즌 기록한 10세이브는 SK 팀 내 최다 세이브였다.
잠수함 투수의 생명
리그 최고 수준의 잠수함 투수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완벽한 싱커를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왼손 타자와의 상대가 가능해야 한다.
밑에서 던지는 130km는 타이밍 싸움에 있어서 타자에게 오른손 정통파 투수의 140km 이상의 느낌을 준다. 하물며 밑에서 던지는 140km라면, 150km나 다름없는 강속구다. 김 팀장은 “실제 구장 전광판에 표시되거나 중계방송에 사용되는 스피드건의 위치는 오버스로 투수의 투구에 초점이 맞혀져 있다. 전력분석에 사용되는 스피드 건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잠수함 투수들의 구속이 실제보다 낮게 나온다”고 설명했다.
빠른 직구 보다는 싱커가 잠수함 투수가 가져야 할 필수 항목이다. 타자의 눈높이보다 낮은 쪽에서 시작하는 공이 타자 근처에서 종적 변화를 일으키며 떨어진다면 그 변화를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좋은 싱커는 내야 땅볼을 만들어낸다. 내야진이 튼튼하다면, 9회 주자 있는 상황에서의 리드를 지켜내기 쉽다. 잠수함 투수가 마무리로 가능한 이유다.
KIA 마무리 유동훈은 지난 시즌 둘 모두를 갖고 있었다. 직구가 워낙 빠른 데다 싱커가 위력적이었다. 오른손 타자의 몸쪽 승부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싱커가 좋았다. 왼손타자를 상대로도 끄떡없었다. 몸쪽으로 빠른 직구를 던질 수 있었고, 바깥쪽으로 싱커를 떨어뜨렸다. 2009시즌 동안 왼손타자 83명을 만나 안타 17개를 허용했지만, 왼손 타자에게 허용한 자책점은 단 1개도 없었다. 1이닝을 막아야 하는 잠수함 마무리 투수가 왼손 타자를 상대로 강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1) 물론, 유동훈의 강력한 싱커는 오른손 타자들에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유동훈의 오른손 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겨우 1할3푼4리밖에 되지 않았다.
정대현은 직구의 구속이 140km를 넘지 않았고, 커브가 사라졌다. 왼손 타자를 상대할 때 효과적이었던 백도어 커브가, 릴리스 포인트가 높아지며 제 곳을 찾아 꽂히지 못했다. 무릎이 버텨주지 못하면서 커브의 브레이킹 타이밍이 늦었고 왼손타자의 바깥쪽에서 시작해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파고들어야 하는 백도어 커브가 자꾸만 볼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휴식일이 이어져 체력이 남을 때는 손의 힘 만으로 커브를 던질 수 있었으나 체력이 떨어지면 제대로 휘지 않았다. 왼손 타자를 상대로 카운트를 잡아낼 수 있는 공이 궁했다. 좀 더 강력해진 싱커는 오른손 타자 상대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왼손 타자들의 방망이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정대현은 2009시즌 오른손 타자 상대로 피안타율 1할8푼8리를 기록했지만, 왼손 타자들을 상대로는 3할1푼을 기록했다. SK 김성근 감독은 상대의 왼손 타자를 맞아 정대현을 쓰기 어려웠다. 정대현은 시즌 내내 왼손타자를 겨우 48타석만 맞았을 뿐이었다.
부상을 안고 던지는 투수
정대현은 자신의 약점을 어쨌든 강점으로 바꿔가며 시즌을 치렀지만, 왼쪽 무릎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러닝을 하지 못해 다른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키워가며 버텼지만 실제 정대현은 거의 시즌 내내 1,2간을 향하는 1루수 땅볼 때 1루 베이스커버를 들어가기 어려운 몸 상태로 투구를 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1루 베이스 커버 가능 여부는 교체 때 마운드에 함께 올라온 가토 투수 코치를 통해 이뤄졌다. 7차전 8회 등판했을 때도 같은 사인이 오고갔다. 1,2간을 향하는 1루수 땅볼이라면, 1루수 박정권이 직접 베이스를 터치해야 했다. 정대현의 무릎 부상은 투수 앞 타구에 대한 처리 능력도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정대현의 2008 시즌 보살 수는 15개였지만, 2009시즌에는 5개로 줄었다. 2009시즌 정대현이 아웃을 완료한 자살(put out) 숫자는 겨우 1개였다.
정대현은 무사 1루에서 안치홍을 만났다. 이전 타석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터뜨린 타자였지만 상황은 무조건 희생 번트 상황이었다. 안치홍은 아예 타석에서 번트 자세를 취했다. KIA 벤치가 정대현의 상태를 모를리 없었다.
정대현은 번트를 쉽게 대 줄 수 없었다. 자칫 타자 주자마저 살릴 위험성이 있었다. 초구 128km짜리 싱커가 안치홍의 무릎 쪽을 파고 들었다. 안치홍이 번트를 시도했지만 워낙 어려운 공이었다. 파울이 됐고, 볼카운트는 1-0. 2구째 131km 싱커가 또 가운데서 떨어졌다. 안치홍의 번트가 또 파울이 됐다. 결국 아픈 무릎을 세워 날카롭게 벼린 싱커는, 다시 무릎 때문에 맞아야 할 위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해 줬다. 볼카운트 2-0. 이제 타구가 투수 앞으로 굴러오는 위험을 줄였다.
안치홍은 번트 자세를 풀고, 강공으로 타격폼을 바꿨다. 3구째는 바깥쪽으로 또 낮게 떨어졌다. 안치홍의 방망이가 나왔고, 타구는 우익수 플라이가 됐다. 선두 타자를 몸에 맞는 공을 내보냈지만, 희생번트를 허용하지 않았다. 무릎이 좋지 않은 정대현으로서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다음 타자는 3루타를 때렸던 왼손 최경환이었다. 정대현의 투구는 여기까지였다. 5-5 동점에서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에 보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팽팽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승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왼손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SK 고효준이 불펜에서 올라왔다. 고효준은, 2009시즌 SK의 신데렐라였다. 그러나, 마운드에 오르는 고효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PS. 정대현은 결국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왼쪽 무릎을 수술했다. 재활기간이 길지 않아 2010시즌 초반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1.2009시즌 왼손타자에 2번째로 강한 잠수함 투수는 롯데 임경완이었다. 왼손 타자 상대 평균자책 1.96. LG 우규민(2.61), 손영민(2.77) 순으로 이어지지만, 우규민은 49타자밖에 상대하지 않아 107타자를 상대한 손영민 보다 통계의 정확성이 조금 떨어진다. 손영민은 왼손 타자 몸쪽 깊숙히 휘어들어가는 커브로 승부했다. 왼손타자를 상대로 한 잠수함 투수의 커브는 원래 가장 위험한 공이었으나, 싱커 구사율이 높아지며 왼손 타자들이 싱커에만 신경쓰다 보니 오히려 효과적인 공이 됐다. 두산 고창성도 평균자책으로 따지면 유동훈, 정대현의 뒤를 이은 리그 3위 잠수함 투수였지만 왼손 상대로는 피안타율 2할7푼7리로 조금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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