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길 순례의 길
마가복음 9:30-3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7주일이다. 엊그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선배 윤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그야말로 가을이 온 세상에 가득찼더라. 그런 창조의 계절을 가을가을 잘 누리시길 바란다.
여러분의 응원으로 군포지방 영성순례를 잘 다녀왔다. 기도와 배려에 감사드린다. 세계교회와 역사, 자연을 배우고 누리는 좋은 기회였다. 밤낮 십자가를 궁리하는 내게 해외여행은 언제나 남는 장사이다.
라틴어로 순례자는 페레그리니(peregrini)이다. ‘낯선 사람’을 의미한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로 여행하며, 불편을 겪을 수 있는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 동행한 군포지방 교역자 부부 34명 중 시각장애인 목사님과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을 일일이 배려하였다. 선한이웃교회 김종은 목사님은 열흘 내내 앞을 못 보는 박흥윤 목사님 곁에서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였다. 큰 감동이었다. 시각장애 목사님과 1학년 어린 아이는 점점 우리 가운데 녹아들어, 한 팀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동행이 되었다.
1)
마가복음 9장은 예수님과 떠나는 동행의 길을 다룬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큰 배움의 길이다. 모든 인생은 순례와 같다. 고생은 일상적이고, 종종 불평이 뒤따른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디어디 성지순례를 다녀오거나, 무슨무슨 영성순례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의 길은 내 인생에서 믿음과 공감, 기쁨과 노여움, 고난과 희생을 나누는 일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두 번째이다. 첫 번째 수난 예고(8:31)가 있었고, 세 번째(10:33) 수난 예고가 이어질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31)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본격적인 메시야 활동으로 이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묻기를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생각과 반대일까 염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32).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오해하여 자주 헛발질을 하였다. 한때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면 덩달아 제자들의 신분도 달라질 것이란 엉뚱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제자들의 헛발질은 고난 당하는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 그들은 주님과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 제자들이 믿는 것은 영광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였다.
지금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죽으러 가시는 예수의 길과 더 큰 대접을 받으려 하는 제자의 길은 상반되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품으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자유함을 얻으라는 것이다.
내가 본 십자가들은 대체로 아름답다. 사람들이 그 의외성에 감동받는다. 십자가는 사랑의 절정이지, 고난의 완성이 아니다. 나는 십자가를 설명할 때 무조건 먼저 희생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한 책임과 일방적 의무가 아니다.
십자가는 내 삶을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따라 살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제시한 십자가는 새로운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요, 구원의 길이었다.
십자가를 따르라는 것은 내 곁에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실망했을 때, 앞이 콱 막혀버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어쩌다 한번 지고 마는 승부수가 아니라 “날마다”(눅 9:23) 반복해서 행해야할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남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다. 늘 이기려니까 목소리를 높이고, 분노하고, 흥분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긴다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야야 하는데 늘 이기는 방법만 찾으면 스스로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이다. 아! 부활하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구나! 그래서 뭐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우심을 요청하고,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계속 헛발질을 한다. 십자가 사건 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제자들의 실수와 배신은 계속되었다.
처음 수난 예고의 장면을 보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고 고백을 한 직후였는데, 베드로는 수난 예고를 듣자마자 그 길을 가로막았다.
이번에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34)고 논쟁을 벌였다. 제자들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들에게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35).
엄청난 역설이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가 한 일은 학교를 세운 일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학교 이름은 고종이 내려주었고, 교훈은 성경구절을 한자로 옮겨서 만들었다. 바로 오늘 본문이다.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當爲人役).
‘크고자 한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 당시는 상놈이 양반을 섬기는 것이 당연시되던 사회였다. 신분 차별이 있었다. 그런데 복음은 새로운 가치를 전하였다. 하나님의 자녀, 인간은 누구나 똑 같이 공평하고 자유롭다. 오히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라. 양반과 높은 사람일수록 연약한 자, 비천한 자를 섬겨야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복음은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있다. 열등감 때문에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안달하고, 남에게 무시당하면 즉각 분노하고 적대시하며, 자신에게 안식과 평화가 없으니 엉뚱한 데서 안식을 구한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얻는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자유롭다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종도 되고, 꼴찌도 되고, 거지도 되고, 어린 아이도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세상의 논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셨다. 십자가를 져라, 남을 섬겨라, 어린 아이를 대접하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이다. 그러니 제자의 길을 따르려면, 기왕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삶의 선도자이며 건축자’라고 한다. 헬라어 ‘아르케고스’란 말은 창시자, 선동자, 설립자, 선도자, 군주.. 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길은 선도자의 길이다. 제자들은 그 길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세울 수 있다.
제자의 길의 목표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르케고스’ 즉 선도자,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면서 너의 새로운 삶을 세우라고 이끄신다.
3)
예수님은 여기 한 어린 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셨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종종 모범과 모델로 보기를 드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어느 어머니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데리고 교육심리학자를 찾아가 물었다. “이 아이를 언제부터 교육시키면 훌륭한 사람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5년이 늦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부터가 아니라 매 순간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반대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새로운 해석도 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책에서 ‘세 가지 변화’를 이야기한다. 니체도 어린 아이의 존재를 한 모델로 등장시킨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이다. 낙타, 사자, 어린 아이는 세 가지 인간 정신을 의미한다.
낙타는 참을성이 강하며 모든 무거운 짐을 스스로 등에 짊어지고 사막으로 달려간다.
사자는 자유를 좇아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한다.
어린 아이는 창조의 참 기쁨을 누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니체는 말한다. 어린 아이는 낙타와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책임과 의무 때문에 어느덧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낙타 형 삶의 방식,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사자의 삶의 방식, 낙타와 사자에게는 어린 아이의 거리낌 없는 기쁨과 자연스러움과 긍정이 없다.
어린이가 되라는 것은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이다. 복음이 의미하는 어린아이처럼 발걸음을 내딛으라는 것이다.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 태도를 받아들여라. 그래야 예수의 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난의 길 앞에서 제자들을 꼬드기지 않으신다. 그럴듯한 물질적이거나 명예를 이용해 유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럭저럭 휩쓸려 살아온 삶을 향해 이젠 본연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려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은 선택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화롭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존엄성과 인간다운 본성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오늘 세계성찬주일로 지킨다. 성만찬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예식이다. 예수님은 수난은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부터 이어진다. 그 출발점은 찬양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저녁 식사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양을 하였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막 14:26)
마지막 만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신다. 무슨 찬양을 하셨을까? 기쁨으로 의연하게, 오오! 희망을 부르셨을 것이다.
찬양은 이렇게 의연하고, 비장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어제 결혼식 축가로 나선 우리 색동교회 어린이들이 돋보였다. 그렇게 큰 무대 경험을 어린 나이에 쌓았다. 찬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틴어 격언에 “노래하는 자는 두 배로 기도한다”(Quis cantat, bis orat)는 말이 있다. 성 아우구스투스가 한 말로 전해진다.
이는 기도하는 동안 노래하는 것이 예식의 아름다움을 더할 뿐 아니라, 기도의 영적 의미를 더 깊게 하여 두 배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축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 부담스러운 표정마저 진정한 축하와 축복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면서 노래를 불렀다. 성찬을 마친 후 감람산으로 올라가면서 찬양을 하였다. 얼마나 감격적인가.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셔서 내가 주님의 길을 참되게 따르도록 인생순례를 인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