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반 이상은 고교 졸업 못한다
해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캐나다 밴쿠버의 피어슨 국제공항에는 한국 학생이 넘쳐난다. 대부분이 유학생이다. 이 중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도 적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자국에 들어오는 유학생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면서 한국 학생의 캐나다 유학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밴쿠버 교육청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밴쿠버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는 한국인 학생은 모두 7,900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던 버나비 지역이 유학생 입학을 허가하면서 올해는 9,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30% 이상이 조기유학생이다.
자녀를 조기유학 보내면서 대부분 부모는 자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국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한국에서 무너지는 공교육에 실망하고,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왕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유학을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자녀를 외국으로 보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부모들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영어 하나라도 잘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의 초-중등교육기관은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외국인 영어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유학온 학생은 우선 이 프로그램에 등록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캐나다에 유학하기만 하면 금발의 캐나다 백인 아이와 어울려 공부하는 줄로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처음 유학온 학생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은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등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외국인 학생과 ESL에서 겨뤄 좋은 성적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영어 공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학부모는 자녀가 영어만 사용하는 학생과 어울리기를 바라지만 그 기대도 접어야 한다. 한국 조기유학생이 늘어나면서 밴쿠버의 어느 곳에서도 한국 학생이 없는 곳은 찾아볼 수 없고, 특히 ESL 학급에는 한국 학생 5~6명 정도 없는 곳이 없다. 때문에 조기유학생은 언어 장벽이 있는 외국인 학생보다는 한국에서 온 학생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따라서 조기유학을 떠난 자녀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영어권에서 태어난 것처럼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이루기 어려운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출석만 하면 졸업을 시켜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캐나다에서는 학업성적이 따르지 않으면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조기유학생은 세컨드리 스쿨(중-고등학교)을 졸업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비영어권 유학생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1년간은 ESL에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정규과정에 빨리 입학하지 못한다. 그 결과 졸업에 필요한 수업일수를 채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은 불가능해지며, 대학 입학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학생 가운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비율이 30%에 달하는 것을 보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 조기유학생이 제대로 졸업하는 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밴쿠버가 속해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우리나라의 고교 2학년에 해당하는 11학년과 12학년 동안 필수과목을 포함해 52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그 다음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프로빈셜(주정부 대입시험)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대학 입학 자격이 생긴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4년 이상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토플시험까지 봐야 하기 때문에 조기유학생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한두개가 아니다. 실제로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 조기유학을 오는 학생 70% 정도가 제때 졸업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교육청의 학업 부진 학생 학점이수 프로그램을 통해 고교 과정을 다시 듣는다.
지난해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이민온 ㅊ씨(47)는 한국에서 줄곧 전교 1, 2등을 다투던 딸이 ESL을 1년간 하고도 그 다음해에 또다시 ESL을 들어야 할 지경이 되자 제때 졸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ㅊ씨는 이전에 받은 성적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두 번이나 밴쿠버 내의 다른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자기 자식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는 학습지진아가 돼버렸다는 사실에 ㅊ씨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ㅊ씨는 "하지만 어쩌겠어요.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는 졸업장도 없으니 대입검정고시부터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캐나다에서 유학생의 대학입시를 지도하는 경력 3년의 입시학원 강사 ㄱ씨(32)는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보낼 수 있는 것이 조기유학이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려면 부모의 의지나 기대보다는 학생 자신의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캐나다에 가면 입시지옥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에 가려는 학생은 방학 중에도 쉬지 못하고 학원을 오가면서 하루 네댓 시간씩 다음 학기 과목을 예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기유학을 결행한 학생은 입시지옥뿐이 아니라 높은 언어 장벽까지 넘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를 유학길에 오르게 하면서 학부모는 막연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보다는 절반 이상의 유학생이 대학 진학에 실패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경향닷컴 밴쿠버/강영준 통신원 landfirst@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