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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서울문학 탐방-효창공원, 망우리공원 묘소
일시:2017년 5월 25일 목요일
장소:효창 공원:윤봉길, 김구 묘소, 김구 기념관
망우리공원:박인환, 이중섭, 조봉암, 한용운, 방정환, 김상용 묘소
* 효창 공원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묘소와 안중근 가묘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으로 왔다. 효창 공원은 두 아들을 기를 때 30여 년 전 역사교육 관련으로 우리 가족이 왔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잘 정리되고 새로이 잘 조성해 놓았다. 효창공원은 원래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성씨의 무덤으로 효차원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현재는 김구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년,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의 묘소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소가 있다. 효창 공원은 1989년 사적 330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지금의 공원형태가 아닌 송림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목적과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작전지로도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어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 및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등의 3인 유해가 안장되었다. 1949년 6월 백범 김구가 암살되면서 국민장을 통해 백범 김구의 유해가 이 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2년에는 주변에 백범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김구 묘소는 백범 기념관 위쪽에 위치해 있다. 기념관 창문을 통해서도 묘소가 보인다. 또한 원효대사 동상, 반공기념탑, 효창운동장이 있다.
먼저 간 곳은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가 안장된 삼의사 묘역이다. 의사 3인의 유해를 안장한 묘소로서 3개의 묘소와 비석이 있다. 이 3의사 묘 옆에 유일하게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는데 이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남겨놓은 가묘로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게 되어 국내로 봉환될 경우 이 가묘에 공식 안장할 예정이다. 이 가묘에는 비석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우리 국제펜 회원들은 묵념을 하고 헌시를 낭송하고 묘역을 둘러보았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안타까웠다. 유골을 찾아 이곳 저 묘소에 안장되길 빌었다.
* 효창 공원 김구 묘소
김구 묘소는 호로 따로이 안장되어 있다. 솔숲 아래 그 분의 생시 애국활동 만큼이나 웅장하게. 거룩하게 안치되어 있다. 역시 이곳에서도 묵념을 하고 둘러보았다. 김구는 한국의 정치가, 독립운동가다.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우리 가족은 두 아들과 하께 넷이 중국 상해 마당로 허름한 골목길에서 대한민국정부 임시청사를 가 보았다. 그곳이 떠오르며 조국의 위상을 찾기 위해 힘든 시기를 보내신 김구 선생님께 이제는 지하에서나마 조금 편안히 계시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지켜온 조국을,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도 굳건히 지키겠노라고 다짐했다.
* 효창 공원 백범 김구 기념관
김구 기념관은 김구 묘소에서 내려와 아랫길로 가서 만났다. 아우 웅장한 대리석 건물이다. 내부로 입장하여 1층 휴게실에서 김경식 사무총장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자유로이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1층에는 커다란 김구 동상과 태극기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소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2층에 전시관이 있는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는 김구 선생님의 이동 경로의 지명이 연결되어 있다. 2층에서 많은 자료가 전시된 김구 선생님의 애국활동을 사진자료와 설명과 함께 보았다. 윤봉길, 이봉창도 곁에 전시되어 있다. 이런 훌륭하신 선조들이 있어 오늘 우리 조국이 건장하게 살아있고, 이 시대에 우리도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위치에서 이 분만큼 크지는 않아도 작은 애국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길에서. 주부,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길에서 직분에 충실하여 애국할 것이다.
* 망우리 공원 박인환 묘소
다음으로 간 곳은 망우리 공원이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는 묘지 공원이다. 옛날에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부르던 스산한 기운이 스미던 곳이다. 망우忘憂라는 이름은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태조 이성계가 지어준 것이다. 버스 주차장에서 산길로 접어 들어 걸어 올라갔다. 오늘 우리는 망우리 공원 산길을 한 바퀴 돌며 문인, 애국자 등의 묘소를 탐방할 것이다.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박인환 묘소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의 시를 쓴 시인이다.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 출생이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했다.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리' '남풍(南風)', '지하실(地下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도 썼다. 1949년에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끼었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간행했다.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은 널리 애송되는 시이다.
박인환 묘소는 망우리 공원 산책길 도로에서 아래도 50여 미터 내려간 곳에서 만났다. 무덤에 잡풀이 더러 솟구쳐 올라 잔디에 지장을 주어서 우리는 벌초를 해주자며 잡풀을 뽑아 주었다. 묵념도 하고 그 분의 생애를 더듬어 조명해 보았다. 그리고 도로변으로 다시 올라와 함께 그늘에 모여 앉아 '목마와 숙여' 시도 낭송하고, '세월이 가면' 노래도 불렀다. 먼저 가신 선배 문인들의 족적을 따르며 보고 배우는 이번 탐방이 참으로 흐뭇하다.
* 망우공원 이중섭 묘소
이중섭의 묘소는 박인환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이 길고 가파른 계단이다. 전에는 계단이 없고 비탈이 심한 흙길의 내리막이어서 어려운 길이었단다. 나무 계단을 한참 걸어서 내려간 곳에서 이중섭의 묘쇼를 만났다. 큰 소나무가 묘소를 지킨다.
이중섭(1916∼1956) 서양화가다.은호는 대향(大鄕).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와 1945년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인 요소이다. '싸우는 소', '흰소'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날씨가 청명하여 적송과 묘소 주변의 풍겨이 한 폭의 수채화다. 이중섭은 화가지만 문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여기 온 것이다. 찾기 어려운 산중 깊은 곳에서 화가 이중섭의 묘소를 탐방한 것은 매우 보람된 일이다.
* 망우리 공원 산길
망우리 공원 산길은 아주 잘 정비해 놓았다. 포장도로로 산을 빙그르 돌며 서서히 오른다. 우리는 이중섭 묘소를 다녀와서 힘든 산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서 도로변 의자에 앉아 사무총장님으로부터 이중섭에 대하여, 박인환에 대하여 다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시낭송도 하고 또한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숲이 울창하여 참 상쾌한 신길이다
* 망우리공원 사잇길 중랑 전망대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도로변에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의 남산, 멀리 인왕산, 도봉산 등의 산줄기가 서울을 감싸고 있다. 우뚝우뚝 솟구친 아파들 빌딩들이 장관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내 조국이다.
* 망우공원 조봉암 묘소
산길을 빙그르 돌아간 곳에서 조봉암 묘소를 만났다. 도로변 주변 곳곳에서도 유명인의 묘를 만난다. 그러나 다 탐방할 수는 없어서 대표적인 분들만 탐방하는 것이다. 조봉암(1898-1959)은 독립운동가, 정치가다. 3·1운동 참가로 1년간 복역했으며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항일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1946년 공산당을 탈당,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으며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후에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되었다. 산자락 아래 아담하게 묘소를 잘 만들어 놓았다.
* 망우공원 한용운 묘소
한용운 묘소는 망우리 공원 많이 걸어가서 만났다. 산길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다. 그런데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 묘소의 방향과 위치가 아주 평화 그윽하여 참 좋다. 살아계실 때는 고통받으셨지만 저승에서는 평화롭게 사시길 빌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沈默)' 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 들어가서 속세를 끊고 승려가 되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국문학사에서 근대적 시인이며,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이다.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 등이 있다. 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의 시에 있어서 ‘님’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삶과 행적으로 보아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일제강점기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다.
학창시절 수없이 외웠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이다. 님은 조국이라고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분의 묘소 앞에서 깊은 감사로 묵념을 했다. 훌륭하신 선배 시인이시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자로 후손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다.
* 망우공원 방정환 묘소
방정환 묘소는 그래도 지금까지 본 묘소들 보다는 넓은 자락에 잘 모셔져 있다. 그런데 화장하여 안장하여서 묘소가 없다. 유골이 묻힌 곳에 아담한 돌비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무덤 위 산속 나무에 '방정환 선생님의 숭고한 뜻을 기립니다'라는 프랑카드가 걸려있다. 중랑구에서 5월 5일 어린이날에 걸어둔 것이다.
방정환은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다. 서울 출생으로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가 곧 사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천도교소년회 등과 관련을 맺었다. 1917년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하여 손병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또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으며,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등의 창간을 비롯 잡지를 편집·발간했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어린이 날을 제정하여 어린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분이다. 나는 교사로서 더욱 깊은 감사로 묵념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더욱 밝고 행복한 분위기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것이 방정환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 망우공원 김상용 묘소
김상용 묘소는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다. 산책길 도로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서 마났다. 허름하게 안장되어 있다. 최근에서야 재정비한 것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그의 대표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떠오른다. 1934년 2월호 '문학(통권 2호)'에 발표되었다. 그 뒤에 시집 '망향'의 첫머리에 실렸다. 모두 3연 10행의 단형시로, 도시의 인위적인 생활과 허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평화롭고 소박하게 살아가겠다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연의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 ‘웃음’의 표면적인 의미는 ‘삶’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그저 웃어넘긴다는 것이다. 현실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인생 태도다. 작자가 이러한 전원회귀의 인생 태도를 가지게 된 외적 요인으로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과 한계상황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것으로 오늘의 묘소 탐방은 끝났다. 6km 정도의 망우리 산책길을 걸으며 문인과 화가, 정치가 등의 묘소를 탐방한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다. 그에 더하여 완만한 산길을 도보로 걸으며 운동을 많이 했다. 더 좋은 것은 나무가 주는 깨끗한 공기를 약 3시간 정도 마셨으니 건강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2014년의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을 모두 참석했는데 이곳 묘소 탐방만 못했었다. 큰 며느리가 둘째이가를 출산해서였다. 그런데 오늘 여기 오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흐뭇하다. 가신 분들의 명목을 빌어드리며 곳곳의 선인들 묘소에서 더욱 올곧은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선배 문인들의 족적을 따라 시인의 사명에 더욱 충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망우리를 떠난 버스가 상봉역과 종로3가역 광화문에 정차한다하여 우리 부부는 종로3가 역에서 하차하여 귀가하였다. 그 동안 많은 서울문학 탐방 중에서 오늘이 가장 좋은 코스였다. 종일 걸었는데도 망우리 산속 그늘의 산책로로 인하여 아주 편안하게 걸었고, 산속 맑은 공기로 심호흡을 하며 걸어서 몸이 아주 편안하였다. 행복하고 보람된 문학 탐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