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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에는 이야기가 있다.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한 6․25동란의 피 맺힌 이야기가 있고, 인류 발달에 기여한 철기문화, 그 역사를 말해주는 철박물관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의학 발달사에 얽힌 허준의 이야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한독의약박물관도 있다. 조용하게 단아하게 숨 쉬고 있지만, 분명 우리 안에서 새로운 자양분이 될 이야기들이 음성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음성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해 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1. 무극전적국민관광지 - 무극리전투이야기 |
전쟁을 기억하는 전적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 1-1번지, 그곳 고갯마루에는 감우재전승비가 서 있다. 6․25 당시, 한반도 어느 곳, 전쟁터가 아니었던 곳이 없었다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전승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혹자는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데, 이런 기념비가 무슨 소용인가 하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감우재전승비를 위시해, 감우재전승기념관 주변에 조성된 무극전적국민관광지 역시 그렇다. |
하지만 이곳에 감우재전승비가 서 있는 것은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그 전투에 목숨 바친 이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기억’임을 생각해 보게 된다. 피 흘린 전쟁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잊음’에 있다. 임진왜란이 그러했고, 6․25 동란이 그러했다. 내부적인 혼란으로 국제정세를 살피지 않고 방심하는 때, 그때가 바로 ‘잊음’에 있는 시점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잊음’을,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임에는 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전시관에는 6․25 당시 음성지구의 전투상황을 보여주는 영상물, 전쟁의 참상을 구성한 대형 스크린 등이 갖춰져 있다. 2층 전시실에는 감우재의 전투상황을 재현한 디오라마, 북한군의 군장비와 보급품 등 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역사가 담겨 있다. |
무극전적관광지에는 젊은 목숨을 나라에 바친 용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충혼탑,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대한해외참전 기념탑, 음성군타임캡슐2000 등이 자리 잡고 있다. |
파죽지세로 남하해 온 북한군 |
대나무를 쪼개면 한쪽 끝에서 쪼개어도 잘 익은 수박에 칼을 댈 때처럼 일시에 줄기가 쩍 갈라진다. 그런 모양새로 한 번에 쪼개짐이 결정되듯 대단한 기세를 보이는 것이 파죽지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이 그러했건만, 625 당시 북한군의 남하도 파죽지세에 가까운 것이었다. |
1950년, 남한의 정치적 불안과 야음을 틈타 공격을 감행한 북한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떠나는 것이 먼저이겠지만, 남한 정부는 언론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켜 피난을 막았다. 피난할 틈도 없이 서울 시민들은 고스란히 북한군을 만나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반인의 피해가 컸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그 와중에 전차를 앞세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15사단을 앞세워 남하를 계속했다. 준비 없이 당한 전쟁이기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춘천과 홍천지역 제6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먼저 주먹을 휘두른 자 앞에선 상대방이 뒤로 주춤하듯, 국군은 원주까지 후퇴하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전략상 후퇴를 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원주에서 충주 방면으로 후퇴하던 제6사단은 장호원에서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던 적군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음성지역이 남북을 연결하는 기동로이자 전략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
6*25 동란 최초의 승리, 무극리 전투 |
음성을 내어 주면 북한군이 증평과 청주 쪽으로, 아니면 괴산을 거쳐 문경 쪽으로 남하할 가능성이 커지는 상태였다. 어느 고지 전투가 그렇지 않겠는가만, 이천에서 충주까지 방어선을 확보하려던 제6사단은 이 전투를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이천과 충주까지 배치된 사단이 북한군에 양분되면 고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종오는 제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를 투입시켜 음성에서 무극리-생극 방향으로 공격하게 하고, 3대대를 동락리에서 생극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음성을 발판으로 북상하겠다는 의도였다. 후에 ‘음성지구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가 바로 ‘무극리 전투’이다. |
무극리, 감우재, 부용산, 동락리 일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제6사단 7연대와 제1사단 11연대가 무극리에서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맞닥뜨렸다. 밀고 밀리고, 피가 튀고 전우가 쓰러지는 전투였다. 하루는 국군이, 하루는 북한군이 밀리는 전투는 말 그대로 ‘밀고 밀리는 접전’이었다. 국군은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한반도가 무너진다’는 각오로 싸웠다. |
전투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는 있는 법,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한 제6사단 7연대는 마침내 무극에서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괴멸했고, 이어서 국군 제1사단 11연대가 이틀간에 걸쳐 감우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북한군 1개 연대 이상을 궤멸시키고 \'6.25동란 중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
왜 우리는 무극리를 기억해야 하나? |
무극리전투는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되기 전에 북한군의 남하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연시켰다. 덕분에 남쪽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또 무극리전투는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었을 때, 압록강까지 진격해 감격의 압록강 물을 떠 올렸다는 제6사단 7연대가 주축이 된 전투였다. 이 전투에 임했던 국군과 그 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전투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것은 참전군인이나 유가족뿐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다. 전쟁을 돌이키지 않기 위해 전쟁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평화에 대한 절실함과 고마움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
[이용정보] |
○ 위 치 :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 1-1 ○ 관람시간 : 3월~10월(오전 9시~오후 6시) / 1월~2월(오전 9시~오후 5시)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추석, 국경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 공휴일 ○ 관람요금 : 무료 ○ 문의전화 : 043-871-3069 |
2. 철박물관 - 철 이야기 |
철박물관에 들어서며 |
철박물관은 인류가 철을 어떻게 사용해 왔고, 현대에는 철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문박물관이다. 들어서면 거대한 철 구조물이 사람들을 먼저 맞는다. |
들어서면서부터 만나는 전시물은 압축된 고철. 이것을 용광로에서 녹여 강철로 만든다. 그리고 ‘압연’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 강철이 철판이나 철근 등으로 만들어진다. 철판이나 철근으로 만들어지면 건축현장이나 산업현장에서 쓰이게 되는 것이다. |
‘용광로’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전시물들은 하나같이 거대하고 무게 또한 엄청나다. 이들 전시물은 실제 동국제강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철박물관으로 옮겨지는 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
이곳에는 실내전시실과 야외전시실이 있는데, 실내전시실에는 철이 무엇이고,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 알려주는 영상물과 여러 가지 체험도구들이 있다. 우리나라에 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 수 있고, 철로 만든 옷을 입어볼 수도 있다. |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박물관문화학교에서 우리 조상들의 철기문화에 대해서 체험하는 체험교실이 열린다. 철 이야기도 듣고, 대장간 체험도 해 보는 프로그램이다. 또 실제로 제강공장에 가서 철강산업이란 게 무엇인지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나라 철의 역사와 철박물관의 실내전시물들을 한 번 살펴보자. |
철의 역사 |
철이 생겨난 건 사실 인류보다 훨씬 오래 전, 그러니까 우주가 탄생한 때부터다. 우주에는 대폭발로 생긴 수많은 별들이 있고, 그 별들에는 탄소, 산소, 규소 같은 물질들이 생겨났다. 이것들이 땅 속에서 결합되어서 생긴 것 중 하나가 철광석이다. 지구의 표면에는 이런 철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인류가 돌을 도구로 사용하던 시기 즉 석기시대가 지난 다음이었다. |
우리나라에서 철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기원전 3~4세기경이다. 넓은 대륙 중국에서부터 철기문화와 청동기문화가 함께 전래되었다.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와 같은 단어는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청동기시대에 철기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
인류가 청동기를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청동기는 돌보다 강한 재료였다. 게다가 돌은 긁고, 깨고, 다듬어서 사용했지만 청동기는 주석과 구리 같은 금속성 재료들을 혼합시켜서 모양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돌보다 훨씬 발전된 도구였다. 그런데 인류는 청동보다 더 강한 재료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철`이다. |
철기와 붕어빵? |
청동기나 철기는 모두 ‘거푸집’이라는 걸 사용해서 만들었다. 붕어빵을 떠올리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붕어빵을 구울 때면 붕어빵 겉모양을 본뜬 붕어빵 기계에서 구워낸다. 그 안에 밀가루반죽을 넣으면 붕어빵 모양이 나오게 돼 있다. 거푸집도 그런 붕어빵 기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거푸집에 넣는 재료가 밀가루반죽처럼 액체로 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적철석, 자철석, 갈철석, 능철석 등의 이름이 붙은 철을 높은 온도로 녹여서 물처럼 만든다. 철석이 물처럼 녹으려면 섭씨 15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 들어가야 한다. 물이 끊을 때 온도가 섭씨 100도니까, 팔팔 끓는 물보다 15배나 더 뜨거워져야 물처럼 되는 것이다. |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인 철석을 붕어빵 기계 같이 모양을 만든 거푸집에 넣고 식혀서 만들어내는 게 철기인 셈이다. 붕어 모양은 붕어모양대로, 국화 모양은 국화모양대로 나오는 빵처럼, 철기도 그렇게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
철은 돌이나 청동보다 강하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때에도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문화를 기반으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북방지역 부족국가가 만들어졌고, 남방지역에서도 삼한이 철기문화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가 발전하면서 철기를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다양해지고, 더 강한 철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
철박물관의 유물 살펴보기 |
철박물관의 전시실에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어 미술관 같은 느낌이 든다. 인류가 철기를 단순히 생활도구에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정신세계를 그려내는 일에도 철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철박물관에는 어떤 것들이 전시돼 있는지 살펴보자. 철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것들만 살펴보도록 하자. |
전자석이 뭘까? |
모래 속에서 못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자석을 이용하는 것’이다. 철은 자석이 끌어당기면 그대로 끌려가는 성질이 있다. 그런데 자석 중에서 전기를 이용한 것도 있다. 코일을 감아서 전기를 연결하면 그 코일이 자석처럼 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자석이다. |
전기를 끊으면 자석의 성질을 잃어버린다. 여기서는 철못을 잘 살펴보자. 전기를 끊을 때에는 전선에 달라붙지 않았다가, 전기를 연결하면 전선에 착 달라붙는다. 철못만 보아도 전기가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를 알 수 있다. |
공중부양하는 공? |
전자석의 성질을 이용해서 양쪽에 전자석을 대고 철공을 놓은 뒤, 두 전자석에 전기를 연결해 같은 힘으로 끌어당기게 하면 어떻게 될까? 양쪽에서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는 힘이 똑같으면 그 자리에서 철공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쉽게 말하면 ‘공중부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네 방향에서 같은 힘의 전자석이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면 철공은 공중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 이것이 ‘공중부양’의 비밀인 셈이다. |
철강이 이렇게 다양하게? |
인류는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철을 다양하게 만들어 보다가 더 강한 철을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철강이다. 철강으로는 철근을 만들기도 하고, 기차 레일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나 벽돌집에도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철강으로 만든 기둥이 들어가 있답니다. 이런 철강은 고철을 녹여서 만들거나 철광석을 녹여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것이 진짜 광차? |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석이 필요하다. 그런 철석은 광산에서 캐낸다. 그런데 철석은 너무 무겁니다. 사람이 일일이 들고 나올 수가 없는 데다, 많은 양을 채취해야 하는 광산에서는 많은 철석을 운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산에 레일을 깔고 광차를 만들어서 광석을 운반하게 되었다. 철박물관에 전시된 광차는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
철로 만든 옷 입기! |
옛날 사람들은 철로 무기를 만들기도 하고, 갑옷에 철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철을 아주 가늘게 만들어서 일일이 붙이는 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게도 무거워서 옷으로 입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철박물관에 있는 철옷은 어떨까? 철로 만든 옷은 오늘날에도 특수한 작업을 할 때 사용되고 있다. |
[이용정보] |
○ 위 치 :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97 ○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5시 ○ 휴 관 일 : 1~2월 전일, 3월~12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추석, 국경일 ○ 관람요금 : 무료 ○ 문의전화 : 043-883-2321 |
3. 한독의약박물관 - 허준 이야기 |
선조 임금이 얻은 인물, 허준 |
조선 제 14대 왕인 선조는 고통스러운 임기를 보낸 임금이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정치기강을 끝내 잡지 못했고 안으로는 당쟁을, 밖으로는 임진왜란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다녀야만 했다. 이 때문에,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쓰고, 각 고을을 순행하며 백성의 교화에 앞장선 초기의 치적마저도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행운이 하나 있었다면 어의(御醫) 허준(許浚)을 만난 것이었다. |
역대 임금들이 여러 차례 질병을 호소했고, 선조 역시 건강상 여러 번의 고난을 겪었다. 그런 그가 선조 20년(1587년)에 내의원에 상을 내리니, 그것은 허준을 비롯한 내의원 어의들이 그의 건강을 잘 보살폈기 때문이다. |
허준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을 갈 때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일로 허준은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고 문과와 무과를 통과한 문신과 무신만이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고, 기술관은 오를 수 없었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나중에 사헌부의 대신들이 여러 차례 이 직위를 거둘 것을 선조에게 청하자, 선조가 하는 수 없이 이를 보류하기는 했지만, 허준의 의술로 생명을 건졌다고 생각하던 선조가 허준을 그토록 총애했음을 보여준다. |
그러나 전란과 당쟁의 휘몰이 속에서 전전긍긍했던 선조, 마음이 혼란하니 몸이 건강할 리가 없었다. 선조가 55세 되던 해부터 거의 매달 침을 맞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허준을 탄핵하고자 했다. 마침내 선조가 57세로 승하하자, 허준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징계요구는 계속되었다. 선조의 승하 후, 허준은 귀양을 살게 되었다. |
그러나 다시 광해군은 허준을 석방할 것을 명한다. 선조가 생전에 허준이 쓰는 약을 믿었고,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 역시 허준의 의술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귀양살이 후에 다시 내의원에서 일하게 된 허준은, 그간의 임상경험을 내의원에서 교육하는 등 의술의 발전에 한몫을 하게 되었다. 광해군이 허준의 사후, 그의 당상관 지위를 다시 추승한 것은 의학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
한의학에 남긴 허준의 역작, 동의보감 |
1610년, 광해군이 보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 그해 여름은 허준에게도, 한의학사에서도 기록적인 여름이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 때 처음 편집을 시작한 <동의보감>이 완성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왜란 후에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해 시작된 <동의보감>의 편집은 우리나라 한의학사를 빛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정유재란으로 편집은 중단되었고, 정유재란이 마무리되자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편집을 계속하도록 했다. 내의원에 있으면서도 일은 일대로, 편집은 편집대로 전념한 허준이 10여년 만에 완성을 본 것이 바로 <동의보감>이다. |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이면서 허준의 임상경험이 녹아 있는 전서였다. 당시에는 세종 때 펴낸 <의방유취(醫方類聚)>, 세조 때 펴낸 <구급방(救急方)>, 태조 때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 등이 있었다. 그러나 동양 여러 나라에 전해져 지금까지 인쇄되는 것은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 총 25책의 백과전서로, 고전 의학서를 토대로 한 지식을 기반으로 허준의 풍부한 임상경험을 살려 한의학의 기본 원리와 임상을 연결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실용의술의 개가였다. |
일찍이 <동의보감>은 중국와 일본에까지 알려져 인정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인쇄가 되어 널리 알려지고 있다. 허준은 7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른 의약학서적도 주해를 붙이거나 간행하는 등의 일을 꾸준하게 해냈다.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에 주해를 붙여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을,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주해해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고,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등을 편집해 내의원에서 간행하도록 하는 등 의술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인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
보물 사료 간직한 한독의약박물관 |
1964년 처음으로 문을 연 한독의약박물관이 새롭게 단장했다. 전시실과 약초원 등을 갖추고 새롭게 재탄생한 한독의약박물관은 한독약품 창립자이자 현 한독제석재단 초대 이사장인 김신권 이사장이 설립한 의약전문박물관이다. |
한독약품 내에 있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지만, 박물관 앞에 조경수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어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5층석탑을 비롯해, 석등과 태실 등의 유물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는가 하면 바로 앞의 둥근 모양을 한 잔디밭에는 커다란 소나무와 함께 기증받은 맷돌 등이 오밀조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깨끗한 느낌이 있어 기분이 상쾌하다. |
특이한 것은 음성군 내에 있는 ‘보물’이 전부 이 한독의약박물관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역사적인 의학 관련 서적들이다. 허준이 주해를 붙여 펴낸 <언해태산집요>는 보물 제1088호요, 세종 때 편찬된 <의방유취>는 보물 제1234호요, 태조 때 편찬한 <향약재생집성방>은 보물 제1235호이며, 성종 때 편찬된 <구급간이방>은 보물 제1236호로, 한독의약박물관 한국관에 전시돼 있다. |
한국관에 전시된 또 하나의 보물은 보물 제646호인 약합이다. 고려시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상약국’, 그곳에서 사용하던 환약용기인 ‘청자음각운용문상감상약국명합’은 ‘상약국’이라는 글씨가 상감으로 새겨져 있어 당당한 품격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허준이 광해군의 명을 받아 간행한 보물 제1111호 <찬도방론맥결집성> 역시 이곳에 전시돼 있다. |
의약학사에 중요한 자료들 |
한독의약박물관에는 한의학에서 사용했던 약연기, 약탕기, 약성주기 등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약 저장기나 의료기구 등 선조들이 사용했던 의료용품들을 일일이 찾아볼 수 있게 돼 있다. 약맷돌이나 약저울 등 한의학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은 의약학사 자료들을 망라한 이곳 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 더욱 뜻 깊다. |
우리나라의 유물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기타 아시아 국가와 서양의 의료용구들도 전시돼 있어 선조들이 사용한 한의학과 의*약학사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제 하에서 사용되었던 약제사시험 합격증이나 광복 후 약제사면허증 등의 유물을 비롯해 대한약전 초판 등 의약학 분야의 중요한 유물들이 있어 이 박물관의 독특함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용정보] |
○ 위 치 : 음성군 대소면 대풍리 37번지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4시30분 ○ 관람요금 : 무료 ○ 휴 관 일 : 4~11월(공휴일 및 여름휴가, 추석) 12~3월(토, 일요일 및 공휴일, 설날) ○ 주말개관 : 4월~11월 ○ 문의전화 : 043-531-1004~5 |
주변 관광지 |
위대한 인물, 위대한 역사를 말하는 큰바위얼굴조각공원 |
위대한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위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시련이 있었고, 각박한 현실이 있었으며, 벗어나기 힘든 고뇌가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인물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결국 노력이다.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에 자리잡은 큰바위얼굴조각공원은 위대한 인물들의 얼굴을 바위에 조각해, 그들의 일생과 업적을 생각하게 하는 공원이다. 이 공원에 등장한 큰바위얼굴의 인물들은 정치가, 경제인, 노벨상수상자, 독립운동가 등 계층과 분야를 막론하고, 국가를 막론한 인물이다. |
설립자인 정근희 씨는 우리 역사와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해 이 공원을 설립했다. 인물을 통한 역사 돌아보기가 있어 유익하고, 정원 같은 조경과 주변의 풍경이 있어 쉴 만한 공원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
[이용정보] |
○ 위 치 :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25번지 ○ 관람시간 : 평일 오전 9시 ~ 오후 6시 휴일 오전 8시 ~ 오후 6시 ○ 관람요금 : 개인 (성인 6000원 / 경로 및 국가유공자 3500원 / 소인 3500원 / 유치원생 2000원) 단체 (성인 5000원 / 경로 및 국가유공자 4000원 / 학생 2500원 / 유치원생 1500원) * 36개월 미만은 무료 * 단체 (일반 및 경로, 국가유공자는 20인 이상, 학생은 40인, 유치원생은 30인 이상) ○ 문의전화 : 043-882-4111 ○ 홈페이지 : www.largeface.com |
자연을 호흡하는 곳, 봉학골산림욕장 |
자연이 가까이 있으면 더욱 자연의 원리를 따르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숲이 주는 푸르름은 또 사람에게 무한한 휴식을 준다. 이 때문에 우리가 찾는 숲은 어디라도 유익한 곳이다. 봉학골산림욕장은 숲이 주는 휴식과 자연학습장, 작은식물원 등이 가르쳐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맨발로 통나무로 된 맨발숲길을 걸으며 가족과 연인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아름답다. 그래서 봉학골산림욕장은 더욱 사랑을 받는다. |
봉학골산림욕장은 학과 장승 등의 나무조각들이 이야기를 하듯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오는 곳이요, 울창한 산림이 가슴 속의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다. 물레방아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도 청량제처럼 시원하게 느껴지는 이곳에는 숲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작은 꽃들이 펼쳐 놓은 동화 같은 아름다움이 있어 권할 만하다. |
[이용정보] |
○ 위 치 :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산32-1번지 ○ 문의전화 : 043-882-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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