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인식은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족이 도탄에 빠져 있는 모순을 깨뜨리고자 격정적인 민족운동으로 전 생애를 일관한 인물이다. 그는 민족운동의 첫출발인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과감히 개화사상으로 전회하여 ‘혁신 유림’으로서 고난의 역정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 어느 곳보다도 보수적 성격이 강한 안동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1)가 아닌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척사 유림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당당하게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 길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아버지로부터는 자식의 인연을 끊기는 의절을 당하였고, 스승으로부터는 절교와 파문을 당하며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기에게 미치광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친지와 이웃의 비난과 배척에는 “친척이 꾸짖고 향당(鄕黨)이 성토하고 집안 식구와 마을 아낙네도 놀라고 성내니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워도 도망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구학(舊學)과 신학(新學)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인식하였고, 구학을 혁신의 대상으로 설정하되 구학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지향한 유학 개신론자였다. 그는 “차라리 한 고을의 완고한 유림들에게는 죄를 지을지언정 한 나라와 사회에는 죄를 짓지 않겠으며, 일시 고향의 유림들에게는 죄를 질지언정 백세(百世)의 공의(公義)에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류인식은 을미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될 때까지 30여 년을 오로지 국권회복과 민족의 독립을 모색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다. 그가 활동한 지역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되 중앙과 국외까지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족운동사의 방법론에서는 혁신성과 다양성을, 공간적으로는 전국적 대표성을, 시간적으로는 한 순간도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지구성을 지니고 투쟁한 한국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는 두 차례의 커다란 전기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기는 1903년 신채호와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과 사상을 경험하며 개화사상가로 변신하여 철저한 계몽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해 “창자가 바뀌고 얼굴이 바뀌고 말과 행동이 전날의 내가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 전회(轉回)의 논리를 고전에서 찾았다. 그는 스승에게조차 지금은 신구가 교체하는 시기라고 하고, 『주역(周易)』에 나오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라(隨時變易)’는 구절을 거론하며 유신할 것을 건의하였다. 마침내 그는 시세에 합당한 것은 유신을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신학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를 실천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그가 1912년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피체된 일이다. 당시 그의 귀국은 영구 귀국이 아닌 일시적인 것이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든지, 부족한 만주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함이었든지, 그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붙잡히는 바람에 그의 향후 진로는 크게 바뀌었다. 그의 피체와 국내 정착은 안동과 서울을 오가며 민족운동을 주도하도록 그에게 지워진 역사의 숙명이고 명령이었다.
류인식은 1865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류필영(柳必永)과 청주 정씨(淸州 鄭氏)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이다. 후에 큰집 9촌 아저씨 기영(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동산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6~7세경부터 할아버지 용재공(容齋公, 성진을 말함)에게서 한학을 배우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동산은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 “대간 할아버지(대사간을 지낸 6대 조 정원을 말함)의 호는 왜 삼산(三山)이라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할아버지가 “마을 앞에 아름답게 보이는 저 삼봉을 보고 호를 삼산이라 했다”고 하니, 동산은 “저는 집이 동녘에 있으니 호를 동산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린 그의 이 말을 들은 집안의 여러 어른들은 그를 비범한 아이라고 하며 놀랐다고 한다. 그의 호인 동산은 이렇게 그 스스로가 어릴 때 지은 것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사용하였다.
그의 아버지 류필영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였다. 정재학파는 주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면서 퇴계의 정통을 자처하였다. 이 학파는 의성 김씨, 한산 이씨, 전주 류씨가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데, 퇴계 가문인 진성 이씨와 학연이나 혼인 관계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류필영은 정재학파의 학통을 이어 훗날 영남유림들로부터 ‘남곽북류(南郭北柳, 남쪽에는 곽종석 북쪽에는 류필영)’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류필영은 1881년의 영남만인소에 참가하였고, 1919년에는 유림들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에도 참여하는 등 철저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협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화계몽운동을 펼치려는 아들 동산과의 관계는 좋을 리 없었다.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 계기는 동산이 개화사상가로 전회하여 서울에서 단발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일이었다. 동산은 부친이 거처하는 침산정(枕山亭)으로 가서 부친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류필영은 아들에게 추상같은 호령을 치고는 앉지도 못하게 밖으로 내쳤다. 당시 이 같은 부자관계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안동은 물론 전국에서 부자를 비난하는 편지가 쇄도하였다. 이에 상심한 류필영은 끝내 아들을 외면함으로써 부자관계를 끊고 말았다. 이들 부자의 사상적 갈등은 시대적 상황과 민족이 처한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류인식의 스승은 척암 김도화(1825~1912)이다. 그는 김흥락과 함께 정재의 제자로서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휘하에 문인이 322명에 이를 정도였다. 따라서 그의 학통은 퇴계로부터 시작하여 이상정–남한조-류치명의 적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895년 안동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민족운동에 나섰으나, 태봉전투에서 패배하고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류인식은 스승 김도화로부터 사제관계를 끊기는 파문을 당하였다. 당시 류인식의 고통스런 심경은 스승 김도화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스승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괴로운 심정을 ‘30년 문인으로서 울음을 머금고 피가 끓는 정’이라 표현하면서도 혁신유림으로서 혁구유신(革舊維新)을 추구하는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계몽운동으로 전환함으로써 부친 류필영으로부터 의절 당하고 스승 김도화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현실을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스승의 문하에서 끊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끊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언론과 행동 등 모든 것이 변하였지만, 자신은 죽더라도 스승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던 당시를 ‘불행하게도 신구 교체의 시기’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세계정세를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대변국’으로 진단하였다. 그리고 스승에게 『주역』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비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수시변역(隨時變易)’을 거론하며 유신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가 『주역』의 ‘수시변역’을 사상변동의 논리로 삼았던 것은 박은식의 경우와 같다.
그는 유신을 위해서는 형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털이 몸에 붙어 있으니 소중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장차 몸이 없어지려는 판국에 털이 뭐가 그리 소중하냐고 되물었다. 이는 겨레가 죽음과 멸망의 길로 내몰려 있는데, 상투가 무슨 소용이냐는 비유적 표현이다. 심지어 그는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스승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나라를 망하게 한 데에는 유림의 죄가 크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서북지방의 사교(기독교도: 필자)들도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나는 형국에 예의의 고장인 영남에서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스승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스승에게 자제와 문생 중 뛰어난 젊은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신학에 종사하게 하여 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만약 스승이 그렇지 않고 구학에만 매달려 망해가는 나라와 죽어가는 겨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먼 훗날 날카로운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향리에서 한학 공부에 전념하던 동산이 과거시험을 보러 나선 것은 29세 때인 1893년이었다. 조선의 과거시험이 이듬해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니, 그는 과거제도의 끝 무렵에 응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그는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경쟁에만 급급하여 염치를 잃고, 과거 급제가 청탁과 문벌로 결정되는 부패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도 상하가 모두 부패한 현실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는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져 있었다. 과거시험에는 수많은 부정행위들이 동원되었다. 본래 과거시험장에는 응시자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한양의 권세가문 자제들 가운데에는 답안지 글씨를 대신 써줄 사람 등 10여명이 넘게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도 생겨났다. 또 요약집이나 각종 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오거나, 아예 커닝 페이퍼를 옷이나 다른 곳에 숨겨 들어오는 협서(挾書)라는 부정행위가 있었고, 또 자기 답안지를 남에게 보여주거나 남의 것을 훔쳐보는 상통(相通)이라는 부정행위도 있었다. 남의 답안을 똑같이 베껴내는 차술(借述)이라는 부정행위도 있었고, 아예 대리시험을 치르는 대술(代述)이라는 부정행위도 있었다. 여기에 시험관과 짜고 특정인의 답안지를 알아보게 표시하거나,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는 방법도 있었고, 답안지를 새로 정서할 때 바꿔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 같은 부정행위를 엄격히 단속하여 과거 시험이 비교적 공정히 치러졌으나, 임진왜란 이후 단속이 느슨해지며 각종 부정행위가 벌어졌다. 따라서 대부분 문벌 자제들이 불공정한 경쟁으로 급제를 독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술 『태식록(太息錄)』에서 정부의 부패 중 하나로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문벌의 타파를 강조하였다. 또한 유림 부패의 하나로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그의 과거제도에 대한 실망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다음 해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도처에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관군과 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과 일본에 군대를 요청하여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같은 조정의 처사에 대해, “어찌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내란을 진압하고서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동지들과 함께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공포하자, 안동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그는 이때 종형과 함께 비분강개하여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려는데 삼천리 강역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다는 말인가?”라고 개탄하며 이중재, 이상룡, 권재중 등과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기로 하고 각 군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 관군을 보내 의병을 진압하자, 그는 “선비는 욕을 당하여서 안 되고, 나라의 치욕은 설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동지들과 함께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항쟁을 펼쳤다. 정재학파의 동문인 류시연과 김도현도 청량산에서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관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약 10여 년간 산 속에 은거한 채 동지들과 연락하며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였다. 또한 국내의 산수를 찾아다니고 험준한 지세를 직접 살피며 구국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그는 30세에 이르러 민족운동의 서장인 을미의병 참가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실패를 맛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민족운동가로서 처음의 실패는 보다 큰 성공을 위한 시련이었고,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동산의 생애와 활동에서 일대 전기를 이룬 시기는 성균관에 유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던 1903년경이다. 당시 서울에 체류 중이었던 동산은 신채호와의 만남을 통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러일전쟁의 기운을 느끼며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실천적 지표로 설정하고 실행하였던 것이다.
계몽운동가로 전환한 동산은 1907년에 안동 보수 유림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협동학교를 세웠다. 협동학교 설립의 주역은 동산과 일송 김동삼, 석주 이상룡 등이었다. 물론 의성 김씨와 고성 이씨 문중의 진보적 변화와 참여가 학교 설립에 큰 힘이 되었다. 설립 재원으로는 의성 김씨 문중과 석주와 동산 집안의 재산 등이 동원되었다. 특히 김대락과 그의 아들 형식과 김후병, 하중환의 기여도 컸다.
협동학교는 내앞마을 김대락의 가옥을 빌려 임시 교사로 사용하다가, 가산서당(현재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내에 복원)으로 옮겼고, 1913년 한들[大坪]로 옮겨 정재 류치명의 종택을 교사로 이용하였다. 학교의 이름은 “나라의 지향은 동국이요, 향토의 지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이므로 ‘동(東)’자를 따고, 안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므로 ‘협(協)’자를 따서 협동학교라 정하였다.
협동학교의 교육과정은 3년제 중등과정이었는데, 초등과도 있었으며, 본과 진학을 위한 예비과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과내용은 신교육을 위주로 하되 서구의 신학문도 수용하여 가르쳤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3․1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개교 당시 동산은 교무주임을 자청하였고, 교장으로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병식을, 학감으로는 종형인 류창식을 추대하였다. 교사진은 동산이나 김동삼, 김형식 등 지역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신민회가 추천하여 서울에서 내려 보낸 인물들로 구성하였다. 협동학교의 설립과정이나 운영에 있어서 신민회가 깊이 개입되어 있는 사실은, 향후 안동인의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전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1910년 7월 18일, 협동학교가 의병의 습격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3시경 안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학교를 기습하여 교사와 학생을 살상한 것이었다. 이는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구국 방략의 차이로 충돌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동산이 1908년 노비를 해방시킨 것도 주목하여야 할 사건이다. 그는 인류의 평화를 부르짖는 시대에 계급의 차별이 있는 것은 인도적 견지에서 볼 때 실로 모순이며 국력 단합에도 해독이 매우 크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노비를 해방시키고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가 1920년대에 노비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노비제도는 1894년의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분질서는 엄존하였고, 노비도 여전히 가장 하층민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민족운동은 봉건적인 신분의 해방으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며 자기 집의 노비를 먼저 해방시켰다. 이상룡, 김좌진, 이회영, 여운형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동산은 발해의 옛 땅이 우리들이 돌아갈 곳이라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만주로의 망명 계획은 그 자신의 독자적 판단이 아니라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안동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진행한 것이었다. 1910년 말, 이상룡이 문중을 인솔하여 먼저 출발하고, 이어 이듬해 1월 김동삼을 비롯한 내앞 문중들도 떠났다. 안동 유림들의 만주 망명은 척족 인맥을 중심으로 실행된 점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특이한 사례로 평가된다.
류인식은 그 다음 순서로 협동학교를 류동태에게 맡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안동 유림 중 가장 늦게 망명길에 나섰던 것은 협동학교를 맡아 운영할 적임자를 선발하여 인수인계를 하는 등 잔무처리 때문으로 보인다.
안동 유림들이 정착한 곳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대고산(大孤山) 자락이 흘러내린 추가가(鄒家街) 일대였다. 삼원보는 세 개의 물줄기가 합해진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고, 추가가는 추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이곳은 이미 전년 8월에 이회영과 이동녕 일행이 서간도를 답사할 때 무관학교 설립 적격지로 점찍어 둔 곳이다. 그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는 역사적 연고 외에도, 대도시로부터 떨어져 있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고, 뜰이 넓어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을 하기에 적합하며, 대고산이 있어 유사시 피신하기에 좋은 지리적 이점 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서간도 이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첫 삽을 뜬 것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의 설치였다. 1911년 음력 4월 경에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 등 300여명의 한인들이 대고산 아래에 모여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한 이 대회에서 한인들은 민단과 자치기관의 성격을 지닌 경학사를 조직할 것 등 5개 항을 의결하였다.
경학사의 설립 목적은 이상룡이 기초한 「경학사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유구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을 표방하고, 망국의 책임이 민족 전체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모두 힘을 길러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역설하고, 경학사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경학사는 다음과 같은 조직을 갖추었다.
이로써 보면 경학사는 안동 유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특히 류인식은 협동학교의 경험을 인정받아 교무부장에 선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합니하로 옮겨 중등과정의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주한 안동 사람 가운데에는 이상룡, 김동삼과 혈연적 연고가 있는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투쟁에 나서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되었다.
동산은 1912년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의 귀국 시기는 그가 7월에 서간도에서 보낸 편지가 있으니 그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귀국 이유는 가족을 데리고 망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경학사가 재정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다시는 만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며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류인식은 만주에서 귀국한 1912년경부터 『대동사(大東史)』의 저술에 착수하여 1917년경 일단 초고를 마쳤으나, 1920년경까지도 계속 수정 보완이 진행된 것이다. 본서의 저술 목적은 반만년의 고유문명을 지닌 역사가 노예사가들에 의해 말살된 현실을 개탄하고, 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을 심어주고 국수를 발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대동사』는 단군이래 경술국치까지의 통사를 편년체의 순한문으로 정리한 사서이다. 본서는 3권 1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씨조선기」- 「남북조기」 - 「고려기」 - 「조선기」 순으로 정리하였다. 『대동사』의 사학사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족과 영토 중심의 민족사 서술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단군을 국조로 하고 배달족을 종족으로 하는 단일 민족사를 체계화하였다. 그는 영토와 국차(國次), 족통(族統)을 강조하였다. 그가 추구한 것은 정치조직과 단위 중심의 국가사가 아니라 종족 중심의 국가사였다. 따라서 단군에 대해 적극적 해석을 하고 있다. 한말 사가들이 단군의 서술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반면, 그는 단군기원을 기년으로 삼는 등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둘째, 독특한 남북조 사관을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단군 이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까지를 남북조로 구분하였다. 이는 그의 족통을 중심한 계통론과 관련된 것이나, 실학자 이래의 남북조 개념은 물론 민족주의 사가들의 관점과도 크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민족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발해에 대해서도 적극적 해석을 하고 있다.
셋째, 시대사별로 본인의 주관적 사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기」 거의 김택영(金澤榮)의 저술을 모방하였으나 인과관계의 규명을 위해 노력한 점은 평가될 수 있다. 조선시대사 서술에서는 망국의 원인 규명 논의가 돋보인다. 그는 한말 사가들이 고려 멸망의 필연성을 도출하고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부여하려 했던 자세와는 달리 객관적 서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망국의 현실에서 냉철한 자기반성 위에서 국권회복의 방법론을 강구하고자 한 것이다.
넷째, 근대사에 대한 기술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민족운동에 대하여 간략하지만 빠짐없이 기술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을 을사오조약-정미칠조약-경술국치의 3단계로 이해하였고, 의병과 계몽운동, 의열투쟁에 대해 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실증적이고 생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마지막으로, 통사의 체계로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한말 사학을 대표하는 김택영은 물론, 민족주의 사가인 신채호와 박은식이 통사를 저술하지 못하였고, 대종교의 역사인식을 주도한 김교헌도 통사를 저술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대동사』는 한국근대사학사에서 선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류인식의 역사인식에서 한계로 지적될 부분도 있다. 그것은 역사인식의 전근대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곧 체재나 형식은 물론, 공교와 유학만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였던 경직성, 『삼국사기』 편년의 준용, 중국 기년의 재등장, 용어의 엄격한 구별 사용, 춘추의례의 도덕적 명분론, 시기구분 문제 등은 전근대적 역사인식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임나일본부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한 것은 무비판적으로 식민사학의 굴레에 빠진 한말 사학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큰 결점이다.
동산은 『대동사』의 저술을 마치고 난 1924년 겨울 『대동시사(大東詩史)』를 저술하였다. 본서는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500년간에 걸쳐 302인의 시 445수를 선정하여 편년 순으로 평론을 붙이고 원문을 소개한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종래의 시화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편제이다. 『대동시사(大東詩史)』는 시와 역사는 모두 시대의 상황과 인식을 반영하는 산물로서 동일시하였던 시사일체론(詩史一體論)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가 조직될 때 그는 한규설, 이상재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개최된 민립대학기성발기총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30인 중의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상재, 이승훈, 한용운, 최린, 조만식, 남궁억, 현상윤, 허헌 등과 함께 그가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민족운동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920년대 초 그는 안동지역의 교육운동에 진력하였다. 그 상황은 『개벽』 제15호(1921. 9)를 통해 전국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자신이 안동지방을 취재하며 가장 감격한 것은 류인식의 활동이라고 하며,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1인이 가이흥향(可以興鄕)」)’는 기사를 통해 동산의 협동학교 설립과 운영 및 인근 지역의 신교육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소개하였다. 기자는 안동의 신학교 건립은 동산에 의한 신문명 건설운동이라고 하며, 당시 동산 등이 추진하고 있던 중등학교 건립운동도 소개하였다.
한편 동산은 안동지역의 사회운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그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는 조짐은 「차야한십절(此夜寒十絶)」이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상인, 노동자들도 일본 제국주의 억압의 사슬을 끊고 일어나야 할 해방운동의 주체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는 노동운동에도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곧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설립이 그것이다. 1920년 9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간부와 회원들은 대부분 협동학교 졸업생으로서 안동청년회를 이끌던 인물들이거나, 직접 제자는 아니더라도 동산과 교유하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의 창립과 운영에 있어서 동산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1923년 1월 서울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위한 조직체가 만들어지고, 안동지방에 그 물결이 밀려오자, 동산은 이 운동도 이끌어 나갔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에 전개된 대표적 실력양성운동이요 경제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민족운동의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서, 민족 역량의 개발과 육성이라는 목표가 뚜렷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물산장려운동은 이전에 전개된 단순한 일본제품 배척운동과는 구별된다.
1923년 조직된 형평사 안동분사나 경북 제2지사 설립과 관련하여 동산의 이름은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참여 인물들이 대부분 백정이 아니라 동산의 영향 아래에 있던 청년단체나 사회단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그가 지도하거나 간여하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
한편 그는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이는 1921년 정월 14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심산 김창숙이 그에게 보내 온 편지로 알 수 있다. 동산은 비록 국내에 머물러 있었지만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고 있었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류인식이 전개한 마지막 민족운동은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될 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이며 사거하기 1년 전의 일이다. 안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1920년대 초반까지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운동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산이 신간회 지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는 것은 그가 양대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족주의 계열이었던 그가 말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1927년 겨울 동산은 병으로 몸져누웠다. 이듬해 들어 병세가 위중해지자 정현모 등 신간회 지회와 안동 청년단체 대표들이 그의 집에서 대기하였다. 그는 4개월여를 병석에 있었는데,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종손인 기태를 불러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죽은 후 절대로 과장하여 장사를 지내지 말라. 이는 내가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죄이니 너희들이 힘써 금지하거라.”라고 당부하였다.
1928년 4월 29일 아침 그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이날 오후 10시 25분 세상을 떴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은 일제히 그의 사거를 보도하며 애통해하였다. 안동의 각 사회단체들은 비통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준비에 분주하였다. 이 때 일제가 돌연 사회장 불허 통보를 하였다. 신간회장마저도 안 된다고 불허하자 하는 수 없이 보통의 장례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5월 21일 오전 7시 예안동 읍전 사염에서 1천여 명의 조문객이 운집한 가운데 장례가 시작되었다. 장례는 이운호의 개식사와 안동악대의 주악에 이어 정현모의 비통한 식사가 있었다. 이어 이균호의 약력보고와 김명○의 애도가와 주악 연주가 있었다. 이날 애도사와 조문 낭독은 일제에 의해 금지 당하였다.
이날 각계각층으로부터 130여개의 조기와 조문이 보내져 왔는데, 안동청맹의 김응한이 보낸 조문은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당시 언론은 동산의 성대한 장례식 광경을 ‘예안지방 초유의 성의(盛儀)’라고 보도하였다. 장례 행렬은 10리에 걸쳐서 행진하였는데 이 날 형평사에서도 조기를 보내왔다. 이를 본 유림 중 일부 인사가 형평사의 조기를 치워버리라고 하여 말썽이 벌어졌으나, 장의위원회는 동산이 형평운동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형평사의 조기는 당연한 것이라며 반발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가 사거한 지 1년 뒤에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 때 안동청년동맹 풍산지부에서 보내 온 「추도고동산유선생문」이 남아 있어 그를 추모하는 안동인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에서도 추도문을 보내왔다. 한편 동산의 1주기 추도식 때에는 조선형평사총본부에서도 애도문을 보내왔는데, 여기에는 동산을 ‘동지’라고 표현하여 친근감을 표하였다.
2007년 8월 10일, 동산이 협동학교를 세워 안동의 근대화를 이끌어 나갔던 바로 그 자리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우뚝 섰다. 비로소 보수의 완고한 고장 안동에서 혁신을 부르짖은 ‘민중의 선각자’ 동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자리매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일제 강점기에 온 몸으로 부딪히며 깨뜨리고자 한 시대적 소명이 있듯이,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동산의 유지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수행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류인식 [柳寅植] - 시대의 선각자, 안동의 혁신유림, 건국훈장 독립장 1982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