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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수오재의 솥뚜껑 삼겹살
수오재(守吾齋·054-748-1310)에 짐을 푼다. 일종의 한옥 펜션. 울산이 고향인 기행 작가 이재호씨가 1994년 경주로 터전을 옮긴 뒤 칠곡, 마산 등에서 점찍어둔 한옥을 해체한 뒤 다시 복원했다고 했다. 총 네 채 중에서 한 채를 자신이 쓰고 나머지 세 채, 방 9칸에서 손님을 받는다.
정약용의 장형 정약현이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이었던 수오재는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는 뜻. 하지만 세상살이 그러기가 어디 쉽던가. 이날 수오재를 찾은 또 다른 손님들과 너른 앞마당에서 솥뚜껑 삼겹살에 막걸리 잔치가 벌어진다.
경주에서 5대째 한의원을 이어가고 있다는 대추밭 백한의원 백진호 원장이 "욕심을 버려야 장수한다"며 한 잔. 또 7개월 된 갓난아기를 데리고 서울서 여행 온 젊은 신랑은 아궁이 지핀 따뜻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신부를 기다리며 또 한 잔. 씨름선수 몸통만한 주문 제작 난로 안에서 장작불은 익어가고, 난로 위 우산만한 솥뚜껑에서 이미 익어버린 삼겹살은 거부하기 힘든 향을 뿜어내고 있다. 자정 무렵 떠오른 달이 수오재 별채에 둥실 걸렸다. 2인 1박에 10만원부터. 솥뚜껑삼겹살 저녁식사(1인 1만5000원)는 미리 예약해야 가능하다. www.gjgotaek.kr/index/
06:15 창호지로 스며든 아침 햇살을 피할 도리가 없다. 온돌에 밤새 지진 몸이 가볍다. 차로 5분 거리인 낭산 동북쪽 황복사지 3층석탑을 찾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번뇌의 풀'을 뽑은 곳. 속세의 올가미를 벗고 출가한 절이다.
석탑 맞은편으로 손에 잡힐 듯 진평왕릉이 보인다. 석탑 뒤편 선덕여왕릉이 아버지의 능을 우러러보고 있다. 왕릉 주변에는 가지 축축 늘어진 낙락장송들이 호위무사처럼 여왕을 지킨다. 아버지의 능을 향해 가는 길이 여러 번 갈지자(之)를 이룬다. 신라 최초의 여왕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난을 일으켰던 사내들을 겪을 때마다 어떤 심정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을까. 이리저리 제맘대로 굽고 휘어진 소나무들도 주인의 마음을 헤아렸을까.
수오재에서 아침을 먹고 그녀가 지배했던 궁성(반월성)을 향한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과 경주향교, 첨성대가 밀집한 신라의 중심, 아니 경주 관광의 중심으로.
13:20 용산 회 식당의 '회와 밥'
"집 꼬라지가 이래 미안심더." 하지만 안주인 김정애씨가 동시에 내뱉는 강력한 통보. "한 팀당 소주 2병 이상은 절대 안돼예!"
절반쯤 녹았던 경주 음식에 대한 편견은 이 6000원짜리 '회와 밥'에서 완전히 녹아버렸다. '회덮밥'이 아니다. '회와 밥'이다. 냉면 대접만한 양푼에 절반 이상 수북하게 잡어회가 담겼다. 바깥주인 서종태씨가 새벽 3시에 일어나 포항 구룡포에서 가져온 숭어와 물가자미다. 또 다른 양푼에 가득 담긴 초장을 그 위에 뿌린다. 이렇게 넣어도 되나 싶을 만큼 계속 넣다가 불안할 때쯤 한 숟가락 더 넣고 마친다.
경상도답지 않게 심심하고 상큼한 초장 맛이 일품이다. 회를 먼저 먹다가 배부를 때쯤 옆에 따라나온 공깃밥을 넣고 회덮밥을 만든다. 그래도 충분한 양이다. 반찬으로는 가자미식해와 젓갈 시금치가 밥도둑. 특히 잡어 젓갈로 양념한 시금치는 계속 손이 간다. 함께 나온 재첩국도 말끔하다.
아침 7시부터 문을 열고, 그날 회가 떨어지면 장사를 마친다. 메뉴는 단 하나. 지금까지 6시 넘어 장사를 해본 적은 없단다. 경주교도소를 지나 내남방면으로 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다. 허름한 간판과 외양이라 지나치기 십상이다. 명함을 부탁했더니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전화번호가 적힌 누런 갱지를 건네준다. 〈용산 회 식당 054-748-2119〉이다.
신라 '왕의 길' 5선… 王道, 나도 한번?
1. 남산 따라가는 왕의 길
동남산·통일전→정강왕릉(50대)→헌강왕릉(49대)→서남산·일성왕릉(7대)→포석정옆, 지마왕릉(6대)→삼릉, 아달라왕릉(8대)→신덕왕릉(53대), 경명왕릉(54대)→경애왕릉(55대)→경덕왕릉(35대). 경애왕릉까지는 약 7㎞, 경덕왕까지는 약 12㎞.
2. 통일신라의 왕의 길
신문왕릉(31대)→신무왕릉(45대)→효소왕(32대), 성덕왕(33대)→구정동방형분(알 수 없는 왕이나 귀족무덤)→괘릉(원성왕38대). 약 10㎞.
3. 궁성(반월성) 주변의 왕의 길
오릉(1대 박혁거세왕릉)→반월성→내물왕릉(17대)와 동부사적지고분→대릉원(미추왕릉 13대, 황남대총98호분, 천마총 등 총 34기의 고분들)→노서, 노등고분(봉황대, 서봉총 등). 약 5㎞.
4. 매혹적인 선덕여왕과 그의 아버지 진평왕릉
사천왕사지→선덕여왕(27대)→황복사지→진평왕릉→설총묘→연화문당간지주→보문사지석조, 금당터, 당간지주→효공왕릉. 약 5㎞.
5. 수레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추령터널입구 추원마을→약수터→모차골→성원사→용연폭포→기림사→골굴암→양북→용당리 감은사지→이견정→대왕암. 약 15㎞.
(추원마을~용연폭포 직전까지는 현재 경주 국립공원에서 생태보전을 이유로 입산 통제. 용연폭포부터 기림사 방면으로 트레킹을 추천)
추천·이재호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