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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3 의풍지역, 의풍리와 도경계선
송태호 추천 0 조회 271 09.08.22 09:27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충청북도, 강원도, 경상북도 삼도가 접경하고 있는 의풍리는 김삿갓 묘소에서 시작된다. 김삿갓이 어머니를 따라 숨어

지내기 위하여 노루목으로 부르는 이곳에 들어 올때는 충청도니 경상도니 강원도라는 지방색은 없었을것 같다.

그저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산간벽지일뿐이었던 것 같다. 오지중의 오지 의풍리에서 행정구역은 별 의미가 없을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육칠십년대 들어오며 특히 지방화가 되면서 네땅 내땅을 따지며 의풍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것 같다.

여기에는 김삿갓묘소도 큰 역할을한 것 같다.

지도를 보니 백두대간 선달산에서 내려온 산줄기 어래산이 어설픈 삼도봉 역활을 하고 있고 경계선도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지나가고 있어 그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단순한 삶을 비웃기라도 하려는듯 복잡한 선을 이어가고 있다.

 

 

강원도를 알리는 안내판 뒤로 김삿갓묘소가 있고 도로를 확포장하는 곳이 충북 의풍리 지역이다.

다리를 건너 우측은 영월땅이다.

남대천(마포천)을 따라 가며 삼도가 거처 가는 계곡길중 충북지역이 제일 늦게 포장이 되고 있다.

 

 

 

의풍리 마을을 가기 위하여 김삿갓 문학관을 지나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고개를 넘어서니 얼마전에 포장된

말끔한 도로가 나오고 있다. 사진 뒤로 보이는 계곡방향으로 도계가 연결된다.

바깥세상과 거리가 멀게 보이는 의풍리에 들어서며 깨긋한 환경조성에 앞장서고 단순진솔한 생활을 하고 있는 김춘곤회원과

선생님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현재 한문교육을 하고 있는 김충식회원과 함께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과 인공위성 나로호

발사이야기를 하여본다. 예전에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때 의풍리는 어땠을까.

 

 

김삿갓계곡을 지나며 깊고 비탈진 협곡이라 더이상 마을이나 농경지가 없을것 같았지만 의풍리에 들어서니

좁은 골짜기에 마을과 논밭이 꽤나 보인다.

멀리 백두대간 우측으로 갈곶산이 희미한 모습으로 서있고 앞에 서있는 산은 의풍리 남쪽에 있는 형제봉이며

도경계선이 넘어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의풍리는 십승지의 다섯번째로 꼽히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 이유가 영춘의 베틀재나 하동방향 즉 밖에서 김삿갓계곡을

거처 들어오며 더 이상 길이 없을것 같은 계곡이 계속되다가 언덕을 넘자 갑자기 펼쳐지는 것처럼 나타나는 의풍리가 은든자들이

좋아하는 지형인것 같아서가 아닐까.

지금의 십승지는 사람살기 좋은곳 살만한 곳이라는 개념으로 해석을 하여야 할것 같다. 바뀌어야 한다면 과거의 십승지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영춘초교 의풍분교, 넓은 운동장에 교실도 여러칸이 있어 한때는 많은 어린이들이 오고갔을 그런 모습인데 지금은

폐교가 되어 새롭게 사람들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깝기도 하다.

 

                   

의풍분교 교문 입구에 우뚝 서서 바다만이 아닌 산간오지 의풍리를 지켜주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

 

 

의풍분교에 발령을 받으면 울며 갔다는 교사들이 사용하던 사택이 잡초에 덮혀있다.

 

 

꽃잎에 붉은 무뉘가 선명한 우리나라꽃 무궁화가 이쁘기만 하다.

의풍리 주변에는 무궁화가 많이 보인다.

 

 

고추며. 기장이며 호박이 매달려 익어가는 의풍리 들판.

더위가 한창 물오르며 햇살이 따가워진다. 곡식들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의풍교에서 우측 남쪽으로 고치령 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김충식 회원이 세조가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동생

금성대군을 고치령 넘어 영주 순흥지역으로 귀양를 보내자 금성대군이 고치령을 넘어 영월땅에 있는 단종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접 찾아보기도 한것 같다며 유서깊은 옛길임을 말한다.

 

 

 남대천(지도에는 마포천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개울옆에 있는 소백산매점에 사람들이 있어 들어가며 인사를 하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 엉덩이를 디밀고 함께 한다.

들판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있는것 같다.

하얀 머리를 하고 있는 권용덕씨 나이 62세 2004년 서울에서 내려와 귀농생활을 하며 유기농사과 농사를 짓고 있고

전국 사과품평회에서 1위를 하고 가장 비싼 시과로 판매를 하고 있으며 의풍리 개발위원장을 하고 있단다.

영춘지역은 석회암지역이라 물이 안 좋고 이곳은 화강암지역이라 물이 좋아 좋은 사과가 나온다고 한다.

한때 300가구가 넘게 살았으며 현재 86가구로 작은 마을은 아니다. 그만큼 삶의 공간이 된다는 이야기로 일제강점기때

문을 연 의풍분교도 한때는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었다고 한다. 중학교는 백두대간을 넘어 부석중학교로 다녔다 한다.

생각만하여도 끔찍하다.

의풍리가 사람들이 모이고 영춘까지 뱃길이 이어져 상품이 들어오고 예전에는 장이 서기도 하였다 한다.

어래산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선달산이 백두대간 주능선이며 도계가 상식을 넘어

엉뚱하게도 어래산으로 가고 있으니 훗날 기회가 오면 주민들이 협의하여 주민들을 위한 행정구역 조정이 필요한

지역임을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하여 주니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어 반가워 한다. 마을사람들은 일제때 경찰수사와 행정편의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남자들은 일터로 나가고 가게주인인 전석남(뒤에 검은옷을 입은사람)씨에게 몇학년 몇반이냐고 묻자 칠학년 사반이란다.

어머니와 같은 나이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한마을에서 시집장가를 가고 여지껏 살아오고 있단다.

생활이 어떠 하였느냐고 묻자 콩팥을 머리에 이고 이리저리 삼십리길인 부석장이나 영춘장에 내다 팔고 생필품들을 사다쓰던

그 시절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지난 일요일 대청호 옥천의 높은벼루마을에 살던분들과 비슷한 삶이다. 이마을 1호 전화기가 이댁에 들어와 멀리서 전화가

올때마다 집집마다 전화받으라며 뛰어다니던 그때가 한창때였는데 하며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한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빨간 상의를 입은 사람)는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은 귀농연습을 하고 있고 본인도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

신랑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어디 특별히 갈곳도 없고 골짜기를 배경으로 청춘남녀가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연애하며

살던 사람들이다.

충북으로 가는 길은 한길, 강도로가는길도 한갈, 경북으로 가는 길만 두길로 마구령과 고치령이 있어 경북으로 많이들 나간 것

같다. 다만 바깥소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땅을 파일구어 농사가 잘 되고해 떨어지면 호롱불앞에 모여 밥상을 차리고  

배가 부르면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던 생활이 그냥 행복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그런 곳으로 보인다.

 

 

의풍리를 지나 마포천을 따라가자 작은 언덕 고개가 나오며 경북과 충북의 경계선 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여러개 보인다.

커다란 안내판 네개중 세개가 경북을 알리고 한개가 충북을 알리고 있다. 차량통행이나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런 곳을 알리기

위하여서일까.  어서오십시요 선비의 공장 경상북도 영주시입니다 라고 쓴 간판이 크게 보인다.

백두대간 주능선은 저멀리 앞에 있고 우측으로 마포천을 건너 형제봉으로 오르면 백두대간 주능선으로 가게 된다.

이곳부터는 행정구역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된다.

 

충북북도를 알리는 안내판에서 북으로 어래산이 보이고 어설프게 도경계선이 만나는 삼도봉 어래산이다.

사람들은 강원도 와석리 노루목(김싯갓 묘소가 있는곳)과 경북 남대리 짐대배기, 충북 의풍리 용담 등 세 마을을

삼도마을이라고 말하나 엄밀히 말하면 남대천을 따라 강원도와 충북, 경북순으로 마을이 이어가고 있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을 위하여 한곳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충북마을인 의풍리가 있고 영춘과 포장도로가 연결되고 있다.

 

 

내려다보니 지나온 의풍리가 길게 이어져 있다.

 

 

고개 정상에 커다란 소나무와 엄나무가 서있다.

 

 

언덕배기 도계에 경상북도를 알리는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정자며 의자들이 놓여있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표지석에 쓰여진 문구가 특별하게 눈길을 끌고 있어 자세히 읽어본다.

 

 남대리 유래비

여기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조선시대에는 순흥부, 삼부석면, 지경으로 이지점은 남대리 끝마을인 속칭 마흘천

(짐대배기)으로 부르는 바로 삼도의 경계점이니, 곧 북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외석리, 서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다.

(정확히는 마을뒤에 솟은 어래산의 주봉이 영접점이다.

왼편에 경상도를 켜안고 오른편으로 강원_충청_전라도와 경계를 이루워 천여리를 휘어 뻑은 소백산맥(백두대간을 말하고 있다)

이 여기 한도막에서만 잠시 도계의 구실을 사양함으로 남대리는 단산면 마락리와 함께 소백산맥(백두대간)의 분수령을 넘어

강원도와 충청도 두도의 틈서리를 비집어 자리한바 돼뫼 이곳이 경상도 땅으로는 유일한 한강수계로 외로이 타관에 떨어진

영남의 소중한 막내격이다.

여기 남대리동천은 북서에는 선달산,어래산 형제봉 연맥들이 둘러있고 동남으로는 준엄한 마구령, 미내령, 고치령이 철옹성을

이루어 세상티끌이 넘어들지 못하는 별천지로 아름다운 천석에 농토도 좋은 편이어서 실로 도원경이라 이를만한 천혜의 동산이다.

남대리는 남쪽에 있는 대궐이라 하여 속칭 남대궐이다. 영월에 유배된 비운의 임금 단종과 순흥에 안치된 그의 숙부 금성대군에 얽힌

한서린 유적이 있으며 구한말 의병대장 이강년 장군이 여기 유진했고 의병중군장이다가 대장에 오른 김상태 의장이 여기서 적에게

잡혔다. 의병전쟁이 바로 이곳 짐대배기에서 격전을 벌였음을 마을 원로들이 전하니 짐대는 당간 곧 깃대로 의병의 깃발을 꼽았던

자리라 하여 마을이름이 짐대배기라 한다. 역사유적으로도 예사롭지않은 남대리이다.

잘 본존하고 가꾸워야할 소중한 터전임을 절감하여 도민과 시민의 뜻으로 이제 이처럼 자리를 다듬어고 그 유서를 새겨 표하게 됨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매우 의의있고 값진 일이라하겠다.

 

남대리 유래비에 적혀있는 글귀중 소맥산맥(백두대간)이 도계의 구실을 하다 잠시 도계의 구실을 사양하여 기존의 상식적인 도계를

벗어나 충청도로 들어오고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한마디로 백두대간의 주능선으로 도계가 가지않고 형제봉에서 마포천을 건너 어래산으로 올라 선달산으로 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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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8.22 11:22

    첫댓글 송태호님 오지 의풍지역의 역사와 실상을 현지답사로 소상이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치령과 마구령을 밟고 지나쳤고, 김삿갓묘도 다녀왔었지만 님의 글이 아니였으면 눈뜬 장님이 될뻔하였습니다.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작성자 09.08.22 13:08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언제 뵙고싶습니다. 올해가 대둘 5주년, 청주삼백리가 6주년이라 다음달 대전둘레에 함께 할까 예정입니다. 늦더위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09.08.28 16:44

    안치운씨의 "그리운 우리 옛길"에서 보고 가고 싶었던 곳인데 송대장님 덕분에 오지마을과 변화된 모습을 잘 보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구월이 오면.

  • 작성자 09.09.11 23:02

    김대표님 안녕하시지요. 9월 셋째주가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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