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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란
출 1: 1-22
앞으로 몇 년은 족히 걸리겠지만, 오늘부터 주일 낮예배에 출애굽기를 강해 하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출애굽기에는 험란한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는 비결이 있고, 곤고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늘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라는 제목은, 헬라어 Exodos에서 파생된 라틴어 인데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나 나온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모세이고(17:14, 24:4, 34:27), 신약성경도 모세의 글이라고 인정했습니다(막7:10, 12:26, 눅2:22,23).
내용은
1.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1:1 -12:36
2. 출애굽에서 시내산까지 12:37- 18:27
3. 시내산의 이스라엘 19:1 - 40:38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상6:1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4년에 솔로몬이 성건 건축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4년이면 주전 966년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은 주전 1446년의 일이 됩니다. 지금으로 부터 3450년 전의 일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지만, 잘 기록되어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출애굽기 서두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는 따로 떨어진 책이 아니라 창세기의 연장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출현은 우연히 되었거나 자기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이 있었으며, 그 약속에 의해서 애굽에 내려갔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는 말로 출애굽기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정황과 그 원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놀랍도록 많이 번성했다, 그리고 심히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형들이 요셉을 판 일로 인하여 요셉이 애굽에 먼저 들어갔고,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온 가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서 애굽에 들어간 기록이 창세기 45장 이후에 나옵니다. 그때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총 수는 70명 이었습니다. 그 숫자는 이미 애굽에 들어가서 총리가 된 요셉과 그가 낳은 두 아들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출애굽기가 이 숫자를 먼저 밝히는 것은, 그 적은 숫자로 시작된 그들이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70인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되어 애굽을 떠나게 됩니다.
7절에 기록된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며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는 말씀은 그들의 인구증가가 특별한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다섯 번이나 강조하는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애굽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아주 강력하게, 폭발적으로 번성했다는 설명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인구증가는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번식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한 가정이 다른 나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때 수 백만명의 대군이 되어 나온 예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는데, 그들로 가나안의 주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당신의 나라를 만드시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성실성의 입증하는 것인데, 다 늙은 아브라함과 단산한 여인 사라에게 네가 자식을 낳을 것이요, 너의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약속을 남발하는 분이 아니라 진실하고 사랑이신 역사의 지배자시요, 인간의 구원자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유일한 신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렇게 대접을 받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많이 번성하고 나자 애굽의 왕조가 바뀌었고, 요셉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는 요셉을 채용한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무너지고 제18왕조인 함족왕조(1560-1350)의 투트모세1세가 정권을 잡은 때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원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제 애굽에서 나갈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환경을 변경시키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이스라엘을 대적한 애굽의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추진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유대인들을 박해했고 말살하려 했으나, 그것마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번성에 대한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전에 요셉이 베푼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적인 실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일부러 요셉의 은혜를 모른 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가족인 번성하는 이스라엘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기 시작 하였습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혼란할 때, 유대인들이 적과 동맹을 하고 애굽을 무너뜨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그들에게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기 위하여 바로는 세 가지 탄압정책을 점진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첫째는 노역을 심히 강화시켜서 지쳐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노예처럼 동원하여 국고성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는데, 그런데 그럴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강해지고 더욱 번성해 갔습니다(12).
이스라엘에게 일을 호되게 시킬수록 건강해 지는 것을 본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을 더욱 위협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아살해 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것이 두 번째 정책입니다.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에게 해산하는 여인을 돕다가 남자아이는 살해하도록 은밀한 지시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런 일을 하지 않았고 "히브리 여인들은 건강하여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해산하기 때문에 아이를 은밀히 죽이지 못했다." 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 계획도 실패한 애굽 왕은, 이번에는 공개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을 시작합니다. 남자 아이는 무조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최대의 위기를 맞아 통곡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바로는 미래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더 증가할 것과, 전쟁이 일어날 것과,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적들과 합세 할 것과, 결국은 애굽을 탈출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새 왕은 비상한 머리로 이 모든 상황들을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에 하나님을 포함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뜻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그는 알지 못했는데, 그것이 그의 최대의 무지였습니다.
창15:12-16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제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고 하신바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 약속을 500년 후에 정확하게 이루셨습니다.
바로의 실수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계획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수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바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을 몰랐고, 그 약속으로 인하여 지금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의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사전에 다 계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만에 나오되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 까지 이미 말씀해 두셨습니다. 그것도 몇 년 전이 아니라 500년 전인 아브라함 때에, 이스라엘 사람중 한 명도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인간 중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하신다.”고 하신 그 백성의 번성을 바로가 어찌 막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는 무지하게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합니다. 애굽 왕은 하나님을 빼놓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이 강한 왕이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보면, 그는 결국 실패할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넘어지기 쉬운 가장 무서운 과오는 하나님을 심중에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계획하는 모든 일은 기껏해야 단지 한 순간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별짓을 다 해보아도 지속적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계획이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견고하고 현명하게 보일지라도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애굽 왕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인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과 출애굽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손으로 바다를 막으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비록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지만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번성하여 갔다" 는 말씀으로, 바로의 수고는 손으로 해를 가리는 짓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고 웃으십니다. 시2:4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신다." 라 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를 둔 모든 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애굽의 박해정책은 모두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정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애굽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게 된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시 전능하신 역사의 지배자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남의 나라이고, 그들의 성장을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땅입니다. 그곳은 그들이 살아갈 땅이 아니라, 잠시 번성하기 위해 빌린 터전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번성했으니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천대를 받을지라도 애굽에는 먹을 것이 있으므로 거기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애굽에 대하여는 정이 떨어지게 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은 박해를 강화했고, 박해가 강화 될수록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이곳이 남의나라이고, 자기들의 땅이 아니며 우리는 이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에 보낸 이는 요셉을 미워한 형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여 한 민족을 형성한 뒤에 나오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으며,
이스라엘이 박해를 받은 것은 이유 없이 뜻밖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들을 각성시켜 애굽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식을 보급하기 위함이었고,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 이는 애굽 왕이 아니라 거기서 나가도록 서두르게 하시는 하나님이셨고,
아이를 나일 강에 던지게 한 것도 이스라엘을 말살하기 위한 애굽왕의 뜻 때문이 아니라 모세를 왕궁으로 들여보내어 기르시려는 하나님의 계산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의 시작과 결말을 함께 보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이 계획 속에 있다는 말씀이 과연 진리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 있었느냐 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미약했고 무시무시한 탄압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노예들을 부르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역사의 지배자이시며. 당신의 백성을 흥왕케 하시며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조성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을 번성하게 하셨고, 지금은 왜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어느 한 가정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뜻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히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선택되고 조성되고 준비 된 대상이 아브라함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민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분의 창조에서 벗어난 인생이 없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 윤리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선택된 당신의 특별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제 애굽에서 떠나서 독립된 행동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세계의 배꼽인 가나안으로 보내서 거기서 독특하고 복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당시에도 메소포다미아 문명과 나일 문명의 교차점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요충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에 보내셔서, 거기서 애굽과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섬기되 광야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독특한 삶을 살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법도와 능력을 온 세상에 보여줌으로, 세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찾고 섬기며 복을 누리게 하려는 뜻이 계셨습니다.
출애굽기의 큰 주제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이스라엘은 죄인이었습니다. 한때 인간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즐거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고 난 뒤에 그 교제의 줄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하여 엄중한 심판을 선고하셨으며, 인간은 사망아래 놓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이 문제점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정죄를 받은 죄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 속으로 불러들이셨습니까?
그 해결책은 인간이 내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어린양의 피, "내가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탈출하는 전기는 유월절인데, 유월절은 단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떻게 탈출했나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서 벗어나 은혜의 품속에서 살아가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고,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보여주는 기록이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의 중심은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을 진노에서 제외시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어린양 되신 주님께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을 통한 생명, 어린양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구원, 피가 없는 집에는 가차 없이 심판의 사망이 덮이고 통곡이 쏟아졌지만, 피를 바른 가정은 예외 없이 구원과 평강이 넘쳤으니, 피 없이는 구원이 없음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히 9:22)라고 하셨습니다. 피를 인한 구원, 피를 통한 구원,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보여줍니다.
앞으로 우리는 출애굽기를 주일마다 배우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에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황에서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난과 절망과 슬픔과 고통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위대하심을 우리 이웃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3. 결론, 우리의 형편과 하나님의 능력
그들은 아주 작았고(5), 지금도 박해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합니다(7절이하). 그들은 겨우 70명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남자 장정만 60만명이 되어 애굽을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의 박해 앞에서도 무기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기필코 구원하시는데, 흠 없는 양을 사용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의 과거의 조성, 현재의 구원, 미래의 사용,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믿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나라, 교회라는 당신의 나라를 만드시려고 몇 사람을 모으셨습니다. 열 두 명입니다. 가룟유다가 보기에 너무나 가난하고 무식하고 형편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자기부터가 엉터리인데 이 엉터리 몇 명을 가지고 어떻게 그 큰일을 하시겠는가 하고 우습게 생각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포기해 버리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오셨을 때,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누가 그들을 붙들고 계시고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날마다 문제를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앞에 다가온 상황에 너무 쉽게 실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은 위대하신데 우리는 힘든 상황 앞에서 그 말씀을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형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형편이 어려울 때일수록 위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위기에서 필요한 것이고, 비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과 그 약속을 보고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후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바보짓을 하고 있었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범사에 하나님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바로의 분노, 가혹한 감독들의 채찍, 괴로운 짐들, 끊임없는 일거리, 지겨운 진흙과 벽돌들, 나일 강에 내버려지는 자기의 사랑스런 아이들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보아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하나님의 어김없는 약속,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다가오는 구원의 날, 세밀하신 하나님의 섭리 등 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까? 눈만 뜨면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현실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섭리를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후5:7)라고 말씀한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살지 말고, 보여주신 비전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늘 승리합시다.
■ 출애굽기 1장
출애굽기 1:1-5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애굽에 거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하게 된 것은 그들의 소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때문이었다.
5절에서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다”고 함으로 창세기 46장에서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거하게 된 내용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일에 대하여 두려워했던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의 당위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었다(창 46:3-4). 그러기에 야곱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창 47:29-30; 48:4).
창세기 15:13-16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즉 약속의 땅에 있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야곱의 후손들에게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애굽에 거하여야 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민족 단위로 약속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애굽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애굽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7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의 결과이다(참고 창 12:2).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넘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말하고 있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약의 백성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있었던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이 약속이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으로 백성의 수를 많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하는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아브라함 언약의 한 면이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이유는, 약속의 다음 단계를 이루어갈 전조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사도행전 7:17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고 표현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근거해서 일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때에 일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범주 안에서만 구원사역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시다. 전능한 하나님이란 바로 이런 분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데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철저히 이루신다는 의미에서 말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한 개인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한 개인의 고통이나 형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아닌가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기준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다(마 3:17; 17:5).
그러나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의 관심은 항상 “나”에게 있다. 인간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자신이 신이 되어 하나님을 향해 도전했던 바벨탑에 반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하여 언약을 주신 것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가? 혹은 내가 어떤 직장에 들어갈 것인가?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내 관심이지 하나님의 관심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물어야 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교회에 다닌다면 교회에 나오는 것과 절간을 찾는 것, 무당을 찾아가서 뵙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지금의 한국교회는 목회자나 교인이 합력하여 목사를 무당으로 만들고 있고, 교인들은 굿하는 무당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무당의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들로 인해 계속 모독을 당하시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은 무당의 하나님이고 부처와 같은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이단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라고 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최종적인 성취는 오직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근거나 원리, 방법 등은 십자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삶의 모든 초점이 여기에 모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세상의 일로 인해 분주해질 수밖에 없고 거기에 관심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마지막 남은 사건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삶은 세상에 관심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 관심을 두고 그분을 증거하는 삶이다.
출애굽기 1: 6-14
6절에 의하면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8절에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린다”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적으로 요셉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만 앞에서 이미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을 말한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란, 그 반대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는 것은, 요셉의 때에 요셉을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약속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애굽 안에서 그냥 방치되어 있는 민족으로 보였기에 자기네들의 국가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제공하는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덕분으로 애굽이 강대국이 된 과거의 모든 일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이용하고자 하는 그런 시점에 와 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반해 비언약 백성인 애굽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유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백성과 비언약 백성과의 차이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여기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신자가 아닌 자는 자기 힘으로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세상은 힘의 체계이기 때문에 그 힘을 구축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힘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기에 많이 가지는 것이 힘이고 그 힘에 의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근거를 십자가에 두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라는 의미이다.
새로운 왕은 이때부터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다른 민족이 쳐들어 올 때에 그들과 합세하여 그들과 함께 도망할 것 같아서이다(10절).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9절)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힘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힘을 누름과 동시에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도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항상 자기 힘을 기르고 크게 하기 위해 소위 자기 출세를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예수 이름을 팔아먹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가지고 권세를 휘두르는 마귀의 속성이다.
출애굽기 1:15-22
그러나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다”(12절). 그러자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자들이 출산 할 때에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려두라고 명령하게 된다(16절). 좀 더 근원적으로 이스라엘의 힘을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씨를 없애려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정면 도전일 수밖에 없다.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의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였다(17, 21절). 이 또한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의해 산파들을 통해 언약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20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사람들로부터 방해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어떠한 장애와 힘에 의해서 중도에 포기되거나 소멸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번성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활동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신자가 세상의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힘보다도 세상의 힘을 더 두렵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너무도 힘없는 분으로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나님이 힘이 없었으면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박혀 죽는가? 인간들에 의해 제거당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믿을만한 신이 되는가? 이것이 우리가 가진 생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십자가이다. 또한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전 1:23).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고전 1:18). 사람들이 연약하게 여기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십자가의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힘이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힘을 얻는데 예수님을 알라딘의 마술 램프정도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자는 세상이 힘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늘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종교생활에 몰두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종교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관심가져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왜 애굽을 빠져 나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동안 별 어려움없이 400여년이나 지나왔는데 이 시점에서 왜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굳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바로 그 근거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베풀어진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출애굽이란 언약을 아는 자와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와의 구분이다.
애굽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의 힘의 체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언약을 아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자가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유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복이다. 이스라엘은 이 복의 전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가 그러하다면 교회의 존재 의미도 여기에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7:38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은 곧 오늘날의 교회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야곱 한 개인으로서 계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셔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셔서 한 공동체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결국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들의 힘을 구축하려는 세력으로부터의 건져냄을 당하되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을 중심 메시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공동체로 세상을 정죄하고 세상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불심판이 이 세상에 대하여 있다는 사실을 증거할 기관은 교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축복받고 출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비언약적 사고방식이다. 참된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성품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함으로 이러한 세력들에 대하여 복음으로 대항하는 자들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