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창조하는 일, 또는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가능할까요? 생명에 관한 한 신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조처는 생명이 살아있을 때에 한합니다. 여태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면 어찌 될까요? 있을 수도 없지만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좋은 일이 생길까요, 나쁜 일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분명 나쁜 일이 생깁니다. 설령 선의로 이룬다 할지라도 악의로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다이너마이트를 전쟁무기로 사용하려고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발명 후 생산이 아니라 파괴하고 살생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는 의미로 ‘노벨상’ 제도가 생겼습니다.
과학의 발전을 바라지만 또 한편 두려워지는 것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잘 쓰자고 만든 것이 잘못 사용되어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 발명한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됩니다.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 되고 맙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핵문제일 것입니다. 그 엄청난 힘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힘이 아니라 푀괴력으로 나타날 때 인류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 조그만 지구촌에 얼마나 많은 핵무기가 산재해 있습니까? 사용도 하지 않을 것을 어찌 저렇게들 보유하고 있을까요? 여차 하면 쓰겠다는 뜻입니다. 함께 죽자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난다 하면 소위 악당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맘대로 악한 짓들을 행하며 지낼 것입니다. 하기야 악행을 당해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러나 그만한 비용을 어찌 감당합니까? 역시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부자들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집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자들만 죽어나는 불공정의 사회가 이룩됩니다. 정의사회나 공정사회 같은 말은 옛날 교과서에서나 찾아보겠지요. 있는 자들의 법질서가 이룩되고 자기들만의 세상이 만즐어질 듯합니다. 게다가 그들끼리도 더 가지려 싸울 것입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원시시대가 되리라 짐작합니다.
과학실험실, 죽은 개를 가지고 실험합니다.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실패를 계속하다 드디어 성공합니다. 반응이 정상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분명 살았고 전의 모습과 차이가 없습니다. 일단 조그만 우리에 가둬둡니다. 아직은 비밀로 해둡니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학과장이 연구실로 찾아와 연구 중단을 선포합니다. 게다가 연구자료가 이미 어느 기업체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분명 학교 재정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거액에 넘겼음에 틀림없습니다. 연구원들이야 권한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료를 다 빼앗겼다 하지만 학교 몰래 다시 한번 시도합니다. 그것을 자료로 남겨 보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난 개가 말썽을 피웠습니다. 연구실 안팎으로 찾으려는데 사고가 터집니다. 연구원 중 한 명이 그만 사망합니다. 학교에서 알았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들은 이미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갈팡질팡하다가 리더가 결단합니다. 그래 그 연구자료로 이제 사람을 살려내자 하는 것이지요. 이게 가능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데.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입니다. 또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사람이 죽은 사고가 발각되면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연구원들은 당연히 모두 감옥행이겠지요. 자칫 청춘이 끝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 함께 다시 작업을 개시합니다. 이게 가능해? 가능해? 하면서도 그러나 가능하기를 바라며 노력합니다.
살아나기는 한 것 같은데 전과 같은 그 사람일까요? 이미 살아났던 개도 사라진 후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중요한 과정이 빠져있었습니다. 바로 임상실험이라는 것입니다. 약이 발명되어도 실용화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임상실험입니다. 그대로 사용해도 별문제가 없는지 이 모양 저 모양 실험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대뜸 적용했다가 무슨 돌발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호기심이나 남다른 실적 등 공명심으로 함부로 생명을 다루는 일을 시행했다가는 큰 사고를 당합니다. 실험실 내부가 공포의 도가니가 됩니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이라도 등장한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는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평소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던 연인 ‘조이’가 연구 진행 중 사망했습니다. ‘프랭크’는 개를 살렸던 것처럼 조이를 살리려 달려듭니다. 살아나기는 했는데 다른 사람입니다. 조이는 어려서의 트라우마에 대한 숙제를 풀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대가는 다른 동료들의 목숨입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몇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난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살려주신 ‘죽은 나사로의 사건’(요 11장)은 유명합니다. 그 ‘나사로’의 이름이 ‘Lazarus’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라자루스’(The Lazarus)를 보았습니다. 2015년 작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