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후면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에 퍼다가 올리는 육이오 사변 동영상들 1 부
지금 한국 상황은 마치 월남전 마지막 몇 달이 재현되는 것을 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사실상 100% 로 보인다. 물론 세상에는 기적이란 것이 있기에 한국을 동북아 방어선에서 재외했던 미국이 육이오 전쟁 발발 사흘만에 개입을 결정하고 우선 공군기를 보내 남하하는 적군을 지연시킬 수 있었고 국제사회 한국전 참전 여부를 결정짓기 위한 유엔 안보리 긴급 회의에 소련의 예기치 않은 불참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유엔군이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현 대세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서 이미 대선의 승자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이런 비관적인 예측을 하는 것이다.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니나 만약에 이런 비관적인 예측이 적중된다면 육이오 사변에 관한 도큐멘타리들은 현재의 대한민국과 미국의 입장에서 제작된 것들은 짧은 시일 안에 자취를 감출 것이고 대신 북한과 중공의 입장에서 제작된 것들이 유튜브 상에 우루루 나타날 것이기에 우리 입장에서 제작된 현재의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라도 카페 회원들과 공유해 보고자 올리는 것이다.
특히 파로호 전투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사라질 동영상 아닐까 한다. 그만큼 이 파로호 전투는 중공과 북한은 물론 국내와 해외에서 설치고들 있는 빨갱이들과 친중반미 사대 매국노들이 잊고 싶어하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들만 퍼왔지만 이후 계속 검색하여 2 부, 3부... 하는 식으로 시간이 닿는 한 잇달아서 올릴 것이다.
급한 나머지 다소 두서없이 퍼다 올리면서 마치 급히 피난짐을 싸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유튜브상에 육이오에 관한 비데오가 갑자기 많이 나타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다.
회원 여러분들은 이 것들을 다운 받으셔서 보관해 두시기 바란다.
나는 육이오 사변을 모질게 겪었기에 까맣게 어린 시절 일인데도 아직도 스틸 사진이나 8mm 짜리 짧은 흑백 영화처럼 기억에 남아있고 지금은 그런 일이 사라졌지만 삼십대 후반 까지도 독감이라도 앓게 되면 잠잘 때면 그 때의 일들로 악몽을 꾸면서 헛소리를 하다가 내 소리에 깨기도 했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입장의 카페 회원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이다.
첫댓글 화천호 근방에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24,000여명을 사살하고 전사자 시체를 화천호에 수장(水葬)시킨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화천호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하고 성대한 명명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파로호 전투 기념을 위해 1955년 파로호비가 건립되는 모습.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지암리·파로호 전투'를 보면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인 1951년 5월 24∼30일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 숫자는 2만4천141명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포로는 7천905명이다.
다부동 전투(多富洞戰鬪, Battle of Tabu-dong)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의지를 꺾었다.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은 무기와 훈련이 부실한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승리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7월 5일에는 오산 전투에서 미군까지 격파하고 7월 20일 대전을, 7월 말 목포와 진주, 8월 초 김천과 포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가 몇 차례씩 벌어졌다.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