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문무가는 버스를 타고
남곡리에 가다
감문 요양 병원ㄴ에서 내렸다
감문 요양 병원은 옛날 도명 국민학교 자리였다
남곡리로 가서
70 대 아저씨에게
봉수대가 어디 있는냐 물으니
내가 지도에서
예측 하였던 곳 과는 달리 남곡리 앞쪽의 산을 가르 키면서
그곳이 봉수대라 그랬다
그곳에 가면 무덤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9시쯤 능선을 타고서 그곳에 도착 하엿다
별로 높지 않은 곳이라서 1 시간 정도 걸렸다
바로 감문 요양병원 옆 산의 능선 이었다
감문 요양병원에서 산 꼭대기 까지
1 킬로 가까이 되려나?
그런데
그곳에 가서 조금 실망 하였다
봉수대 있엇던 자리에 누군가 크다란 산소를 만들어 놓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봉수대이면 분명히 개인 소유가 아니었을 것인데
어떻게 그곳에 개인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을까?
무덤 주인에게 이야기 해서 이장 하도록 하고
봉수대를 어느 정도 복원하여 교육용으로 사용하였으면 한다
(참조 : 감문국의 전설들은 여느 전설이 그렇듯 땅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감문국의 이름을 딴 감문면의 금라리 서쪽 (남곡리의)봉화산 아래에는 공개바위란 바위가 있다)
감문 요양 병원
감문 요양 병원
마을 앞 정가 집안 비석이 있는 곳
남곡리 뒷산
남곡리 마을 앞 정가문중의 비석이 있는 곳
남곡리 마을 앞 캠벨 포도밭
남곡리 마을
봉화대 있었던 축대
지금은 무덤 축대로 변하였다
무덤 축대 치고는 모양이 좀 그렇다
봉수대 축대 위의 무덤
무덤 둘러 있는 곳에서 주운 기와 쪼가리
봉수대에 구조물이 있었고
그 구조물의 지붕의 기와 같다
봉수대를 지나서 능선 따라 가다가
능선 아래의 큰 바위
남곡리 산 능선 너머 금곡 1리(노오래)
남곡리 마을 앞 정가 비석 옆의 고인돌 같이 생긴 것
봉수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설치한 통신 수단으로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되었다.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두어,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로 각각 신호하여 상황을 알렸다.
봉수의 간선은 직봉(直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 내륙 지방은 강계, 해안 지방은 의주, 서남은 순천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착점으로 하였다. 이 밖에 간봉(間烽)은 전선의 초소로부터 직봉선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거나 전선에서 직접 본진이나 본읍에 이르는 단거리의 보조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약 120년 전까지 사용하였던 봉수는 과학적으로 잘 갖추어진 통신 방법입니다. 봉수대에서는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신호가 전달하는 내용은 봉수대의 굴뚝에서 올리는 연기나 불꽃의 수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연기나 불빛을 이용하여 만든 신호는 인근의 봉수대에 차례대로 전달되어 한양(현재의 서울)까지 전달하였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봉수대를 세웠는데, 이렇게 설치된 봉수대는 전국에 600개 이상 되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세워졌던 봉수대 자리는 지금의 전파 중계소가 있는 곳과 거의 같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때까지 사용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 제도가 도입·정착되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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