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래빗(rabbit)’, 임무는 북한군 동향 파악, 실패할 경우 자결할 것.” 6·25전쟁 때 미군 첩보원으로 3년 넘게 군생활을 한 심용해(81·여·서울아시안교회) 권사. 2016년 9월 1일 경기도 수원 자택에서 만난 심 권사는 두 눈을 꼭 감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며 치를 떠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험한 꼴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경제발전도 남북 분단 때문에 더딘 것 같고…. 부디 살아 생전에 이 나라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복음통일이 되는 것을 꼭 보고 싶습니다.”
미군 첩보원이 된 겁 없는 소녀
6·25전쟁이 발발한 해 그는 15세였다. 경기도 용인 신갈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전쟁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죽으나 전쟁에 나가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이듬해 2월 미25사단 8240부대에 입대했다. 일명 ‘켈로(KLO)부대’다. KLO는 ‘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한국 연락사무소를 뜻한다.
8240부대는 신탁통치를 하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첩보작전을 위해 미 극동군사령부가 극비리에 만든 부대다. 전사하면 새 요원을 뽑는 방식으로 6000명 정도가 참전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여성 20%는 북한에서 첩보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부대 특성상 계급도, 군번도 없었다.
여기에다 유엔군사령관이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서해 5도와 북한 중간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면서 부대는 목숨을 걸고 지켰던 황해도 지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도 잊혀져 갔다.
하지만 이날 심 권사는 당시 켈로부대 첩보원들의 활동을 생생히 증언했다. 최근 개봉 한 달여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한 직후였다. 이 영화는 켈로부대원들의 활동상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으로 심 권사도 감명 깊게 봤다고 했다.
“동네 정미소에 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었어요. 처참했습니다. 며칠 뒤 동네에 미군이 여자 첩보원을 모집하러 왔어요. 저는 동네 언니들한테 달려가 ‘언니들, 우리 군대 가자’고 했지요. 그런데 언니들이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얘 좀 봐. 용해가 이상한 짓 하네’라면서요. 그래서 겁 없는 10대, 20대 여자들이 의기투합했어요. 우리 동네에서 23명이 입대했는데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당시 지원한 첩보원 중 나이가 가장 어렸다. 하지만 그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했다. 오직 ‘나라를 위한’ 소녀의 일념이었다.
“제가 어릴 때 무서움이 좀 없었어요. 캄캄한 시골길을 씩씩하게 혼자 걸어 다녔으니까요.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에 쌈짓돈을 전달하며 몰래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와 고모부에게 물려받은 ‘나라사랑’ 정신도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는 독도법, 각개전투 등을 교육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적의 화기 및 병력 배치를 머릿속에 넣어 오는 게 주요 임무였다.
피란민으로 위장해 남루한 옷을 입고 전선에서 숨어 지낸 적이 많았다. 무덤을 베개 삼아, 때론 시체 옆에서 잠을 잤다. 산열매 등으로 허기를 때우기 일쑤였다. 서울 미아리와 경기도 남양주 광릉·퇴계원, 의정부 동두천 철원 등 중부전선이 그의 활동무대다.
미군은 첩보원들의 정보를 토대로 폭격지점을 찾아냈다. 전쟁은 진격과 퇴각을 반복했다. 걷고 또 걸었다. 장마철에 강물이 불어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다. 폭격을 피하려다 산비탈을 뒹구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3개월간 팔 깁스를 하는 등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중공군에 붙잡혀 일주일간 끌려 다닌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밧줄에 묶여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살려주세요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평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갇혀 있던 방공호 반대쪽이 뚫려 있었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심 권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생존 400명 중 여성은 10명
켈로부대 첩보원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인천의 북한군 동태를 샅샅이 파악해 아군에게 보고했다. 덕분에 한·미 해병대는 인천 월미도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고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계기를 마련했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400여명 됩니다. 그중 여성 전우는 10명이 채 안됩니다.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심 권사의 ‘나라와 하나님 사랑’ 정신은
세 딸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첫째 딸 김은희(60·서울 오륜교회) 집사는 국내 대표적인 기독 서양화가다. 김 집사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또 제자들과 ‘채로마아트회’를 조직, 전시회를 열어 해외 선교사와 빈곤층을 후원한다.
둘째와 셋째 딸 은옥(57) 은주(54)씨는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태국선교 20년째인 김은옥 선교사는 남편 김진규 선교사와 태국새비전선교센터와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고 활발히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
막내 김은주 선교사도 남편 김도연 선교사와 10년째 태국순회 선교사역, 태국어 성경 및 태국어 전도자료 무료 보급사역을 펼치고 있다. 현지 교회를 5곳 설립했다.
심 권사는 9월 8일 켈로부대 전우회 동료와 함께
인천에서 16㎞ 정도 떨어진 팔미도에 간다. 등대 탈환·점등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켈로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급여나 특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부대장을 지낸 일부 장교를 제외하면 모두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참전명예수당을 월 20만원 받는다.
심 권사는 200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하지만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금은 받지 못했다. 국군이 아닌 유엔군 소속이라는 이유에서다.
심 권사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존재할 수 없다. 자유로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국민 모두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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