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투명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푸르른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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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탁소리(www.moktaksori.org) 원문보기 글쓴이: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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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이라도 가 보고싶은 곳이기에 맘이 절로 넘쳐 납니다~자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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