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희망의 문턱을 넘어 원문보기 글쓴이: Swan
축일:4월24일 성 피델리스 식마린겐 사제 순교자 St. FIDELIS of Sigmaringen San Fedele da Sigmaringen Sacerdote e martire St. Fidelis de Sigmaringen, C. Mart Born:1577 at Sigmaringen, Hohenzollern, Germany as Mark Rey Died:24 April 1622 at Grusch, Grisons, Switzerland Beatified:24 March 1729 by Pope Benedict XIII Canonized:29 June 1746 by Pope Benedict XIV Fedele = fidato, devoto, dal latino = trusted, devout person, from the Latin
피델리스(1577 - 1622)는 독일 식마린겐의 저명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프리부륵 대학에서 철학과 법률학을 공부한 후 6 년동안 젊은 귀족 자제들이 유럽을 여행할 때 그들의 가정교사를 하였다. 후에 성공적인 법률가가 되어 가난하고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수호자"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1612 년 형에 뒤이어 까푸친회에 입회하였다. 사제요, 수도회 장상으로서 피델리스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자신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역질이 돌던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또한 보속과 기도의 고된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포교 성성으로부터 스위스 선교 책임의 명을 받고 정통 교리를 전파하다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Calvinists and Zwinglians)의 습격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포교 성성의 첫 순교자이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578년 독일의 식마린겐 읍에서 태어났다. 카푸친회에 들어가 보속과 밤샘과 기도의 고된 생활을 영위했다. 열심한 설교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였고 포교성성으로부터 스위스 그라우뷘덴 지방에 정통 교리를 전파하라는 명을 받았다. 거기에서 이단자들에게 추적 당해 1622년 스위스에서 순교했다.
성 피델리스 사제 순교자에 대한 찬사에서
피델리스는 그 이름 旻셀〉?삶에도 충실했다.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인 성 피델리스를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피델리스가 지닌 사랑의 풍성함은 이웃의 육신상의 필요를 채워 주고 도와주는 데 까지 뻗어 나아가, 아버지다운 자애의 포옹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맞아들이고 여러 군데에서 애긍을 모아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였다.
세력 있는 사람들과 황태자들로부터 도움의 길을 마련하여 과부와 고아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또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자기 힘 닿는 데까지 육신적으로 영신적으로 모든 수단을 다해 도와주고, 병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하느님과 화해시키며, 그들이 맞이할 마지막 투쟁을 잘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그라우뷘덴에 주둔했던 오스트리아 군대가 전염병에 걸려 고통과 죽음의 비참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 더 위대한 자선 행위의 열매를 거둔 일은 또 없다. " 그 이름 자체에도 삶에도 충실했던 성 피델리스(충실한 사람이라는 뜻)는 이 위대한 자비로써 뿐만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선포했던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로서도 뛰어났습니다. 자신이 피를 흘려 자기 신앙을 고백하기 며칠 전에 한 마지막 강론에서 흡사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오 가톨릭 신앙이여, 너는 얼마나 항구하고 얼마나 튼튼하며 얼마나 훌륭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또 얼마나 견고한 반석 위에 잘 세워져 있는가! 하늘과 땅은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너는 결코 사라지지 않은리라. 시초부터 온 세상은 너를 거슬러 말해 왔지만 너는 모든 것을 누르고 힘차게 승리를 거두어 왔도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세력 강한 임금들을 그리스도의 법에 복종시키고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로 하여금 치열한 투쟁과 혹심한 고통을 겪도록 하였겠습니까?
산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쾌락을 멸시하고 명예를 가벼이 여기고 재산을 발로 밟아 버리고 고독 속에 독신 생활을 하도록 했겠습니까? 무엇이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안이하고 유쾌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참으며 수고를 감수하게 해줍니까?
`사랑으로 표현되는’ 산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사람들이 미래의 보화를 희망하면서 현재의 보화를 포기하도록 하고 또 현재의 것을 미래의 것으로 바꿈질하게 합니다." (가톨릭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만일 한 가난한 사람이 피델리스에게 약간의 의복을 요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의 반이라도 잘라서 그 사람에게 주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관대함이 이 성인의 생활 특징이다. 1578년에 태어난 마르코 레이-피델리스는 그의 수도명임-는 변호사가 되어 언제나 가난하고 억업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변호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란 별명을 가진 피델리스는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부패와 불의를 보고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될 결심으로 법률가의 길을 청산하고는 카푸친 수도회 소속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자기의 형 제오르지오에게 갔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궁핍한 신학생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프란치스코의 추종자로서 피델리스는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계속했다. 한번은 그가 수도원의 관리인으로 있던 도시에서 심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 피델리스는 수많은 병든 군인을 돌보아 주고 치료해주었다. 그는 스위스의 칼뱅파와 츠빙글리파에 대항해서 설교하러 가는 카푸친 수도회 회원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지역은 상당히 격렬한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그들의 선교 활동을 본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이 피델리스의 설교와 가르침보다는 그가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는 농민들의 범국민적 열망에 대한 적대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가 친구들의 충고도 무시하고 스위스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그를 향하여 누군가 총을 쏘았으나 그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혼란 속에서 어떤 개신교 신자가 피델리스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렸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무장한 사람들에게 불잡혀 살해되었다. 베네딕토 14세가 1746년에 시성했다.
피델리스의 끊임없는 기도는 자기가 하느님께 충실을 다하고 어떠한 미온적 태도나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내가 만일 가시관을 쓰신 대장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반쪽 마음을 가진 군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스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재앙이다."
그의 기도는 무관심에 반대한 것이었고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능을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세계의 정의를 위해 일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가 보인 표양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세상을 변형시키는 데 있어서 정의 편에서 행동하고 참여하며 투신하는 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건설적인 차원으로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인류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명과 여러 가지 억압된 상황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정의로운 행동이며 세상을 변형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5세기에는 영국에 존 위들레이나 보헤미아에 요한 후스 등이 나와서 교회에 위반되는 이단설을 주장해 수위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어 전 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밀어 넣은 화근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묘한 섭리로 여러 명의 성인, 성녀를 보내시어 불신과 악으로 흐르려고 하는 세상을 각성시키며, 미로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으 가르쳐 주시려고 매우 노력하셨다. 여기의 성 피델리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577년 독일의 남부에 있는 식마린겐에서 태어났다. 영세 때 받은 본명은 마르코였다. 아버지는 요한 로이, 어머니는 제노베파로서 두 사람 다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으나, 요한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르코는 어려서 베네딕토회의 수도원에 맡겨져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일찍이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여 탁월한 지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겨우 16세로서 프리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하는 등 일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앞길에 여러 출세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에서 출세하기를 원하며 특히 가난한 이와 학대받는 이들의 변호사가 되리라 결심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기 위해 우선 대학원 학생 수명과 더불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유명한 대학을 순방하고 6년간이나 견문을 넓히는데 노력했다.
귀국 후 그는 아인지스하임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항상 정의를 존중하고 세상 재물로 인해 좌우되어 그르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곧 청렴결백한 인사라는 평판이 근방에 퍼졌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특별하게도 빈궁한 자들을 동정하며 혹시라도 그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이를 꾸짖었으므로, 뒤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매우 무서워하며 또한 그를 모함하며 해치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마르코는 다시금 세속의 악독함에 증오를 느끼게 되어 변호사를 페업하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카푸친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본래 청렴결백하고 학문이 깊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는 특별허가로 유난히도 빨리 착복식을 하고 신품성사를 받았다. 피델리스라는 수도명을 얻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는 수련 기간 중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표양을 본받아 미사 성제를 행할 때나 경본을 볼 때에는 세라핌과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했고, 세속에 있을 때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입회 후에는 그것들을 모두 잊은 것처럼 밥그릇 닦기부터 복도 청소, 장작 쪼개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열심히 이를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서원을 발하기 직전에 공정증서(公正證書)를 작성해 자신의 재산을 2등분하여 일부는 빈민 구제를 위해, 다른 일부는 가난한 사제(司祭) 지원자 원조를 위한 기부금으로 기부했다.
신학의 충분한 연구를 마친 피델리스는 주로 독일 남부와 스위스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개종을 위해 활약하며 밤낮으로 열렬한 기도와 극심한 고신 극기를 해가면서 잠시도 쉴새 없이 동분서주하며 열변을 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은 그르 대단히 미워하며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를 방해하려 했으나, 그는 더욱 굳세게 악에 대항해 싸운 보람이 있어 얼마 안 되어 그의 활동의 효과는 현저히 나타나 외교도로서 참 종교로 개종하는 이, 죄인으로서 충심으로 통회하는 이가 연거푸 나타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피델리스는 문서 선교의 방면에도 주력하며 교회와 이교의 차이점을 명백히 한 많은 서적과 팜플렛을 발간했는데, 이것이 또한 얼마나 외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1622년 피델리스는 관구장의 명을 받들어 스위스의 그라프분덴 주의 개종 촉진의 포교를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부근은 칼빈파 이단의 중심지로서 가장 관신자(狂信者)들이 많아 이전에도 가톨릭 사제 수명이 그들의 독수에 걸려 참살된 장소였으므로 피델리스도 점점 영광의 순교이 날이 다가온 줄 생각하고 기꺼이 그리로 향해 갔다.
그의 활동은 과연 기대한 바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럴수록 이단자들의 미움도 더 사게 되어, 마침내 그들은 피델리스를 살해하려 결심하고 우선 간교하게도 겸손되이 찾아와서 그리스도 부활 축일에 세위스라는 마을의 교회에서 설교해 줄 것을 의뢰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델리스는 쾌히 승낙하고 나서 당일 1622년 4월 24일 약속한 대로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자 어디에선가 그를 향한 총탄이 날아왔다. 이단자들이 그의 설교 도중 총으로써 그를 사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명중되지 않아 무사히 난을 피했으나, 설교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다시 대기하고 있던 이단자들은 달려들어 망치와 창칼등의 흉기로써 그를 무참하게 죽였다.
그래도 그의 태연하고도 용감한 태도는 이단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를 본 한 목사는, "아, 이 같은 죽음의 마당에서도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힘을 주는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다!" 하고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 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 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 OFM,OFMConv,OFMCap-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11.000여명의 카푸친 형제들이 그 전통에 따라 성 프란치코의 복음적 이상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아일랜드 관구에서 온 4명의 형제들에의해 그 현존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한국 형제들을 포함하여 8명의 종신서원형제,4명의 유기서원 형제들이’ 천사들의 성마리아 효창동 형제회’와 수련소인’성 펠릭스 가평 형제회’ 그리고 인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형제들이 강화의 ’성요셉 형제회에서 형제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 카페에서)
칼빈주의 영어 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1509∼1564)이 인간의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일으킨 종교사상. 칼빈주의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이미 의지의 내적(內的) 자유가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리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국으로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요점은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요강≫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느님은 절대무한(絶代無限)한 존재로 우주에서 하느님만이 참된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피조물은 하느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의지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는 절대적 `예정설’이다. 그의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외적(外的)으로 결부시키려는 점에 있고, 그것이 이 신앙의 유일한 구원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전례나 성사도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단체이며 내부에는 사제직이나 교계(敎階)제도도 없고, 교단은 공화적(共和的)으로 조직되어 국가로부터 독립된다. 국가는 관념적으로 신정제(神政制)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너무 엄격했던 처음의 절대적 예정설이 완화되면서 급속히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변증법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설은 막스 베버(Max Webe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동의 쾌락과 노동의 성과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증표로 보는 칼빈주의의 구원사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주의의 노동윤리, 즉 `세속생활의 금욕주의’라는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퓨리턴에게 인민주권(人民主權)의 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 (가톨릭대사전에서)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