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승 鄭寅承(1897 ~ 1986)】 「1937~1938년 조선어학회 출판부 간사」
1897년 (음)5월 19일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계북면(溪北面) 양악리(陽岳里) 에서 한학자인 아버지 정상조(鄭相朝)와 어머니 송성녀(宋姓女)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호는 건재(健齋)이고, 아명은 경범이다.
어려서는 한응수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10년 전라북도 진안(鎭安) 출신 황양례와 결혼하였다. 1915년 9월 19살의 나이에 진안에 위치한 용담공립보통학교(龍潭公立普通學校) 2학년에 입학하였다. 용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서울로 올라가 연정학원(硏精學院)과 중동학교(中東學校)를 거쳐 내자동(內資洞)에 있는 종교교회(宗橋敎會) 영어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9년 봄 법률전문학교에 지원하던 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였다. 체포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같은 해 겨울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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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4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다. 재학시절에 국문학자 정인보(鄭寅普)와 김윤경(金允經)의 영향을 받았다. 정인보를 통하여 수사학을, 김윤경을 통하여 주시경의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였다. 재학 시절 학생회 총무와 전문학교 연합 조선학생회 간사를 맡았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普通學校)에 교사로 임용되었다.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는 영어와 한국어 과목을 담당하였고, 주당 1시간인 한국어 시간을 독본(讀本) 2시간, 문법·작문·습자(習字) 각 1시간씩 5시간으로 늘렸다. 이 학교에서 1935년 8월까지 근무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경기도 고양군 돈암리(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산양 목장을 하였다.
1936년 4월 연희전문 교수인 최현배(崔鉉培)의 권유로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였고, 조선어학회의 출판부 간사(1937~1938), 조선어학회 간사(1938~1943)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선발되어 명사, 감탄사, 부사 등의 어휘 풀이를 담당하였다. 1937년 6월부터 1942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맡았다. 1940년 6월 공표된 「한글맞춤법 통일안」 개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1941년 1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도 기여하였다.
1942년 9월 일제는 사전 편찬원인 정태진(丁泰鎭)을 검거한 것을 계기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42년 10월 1일 붙잡혀 함흥경찰서와 흥원경찰서에서 고무막대기로 일주일간 고문을 받았다. 특히 아침·낮·저녁 하루 세 번을 끌려 나가 형사들에게 속내의 등만 걸친 채 매질을 당하곤 하였다.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귀가 굳어 평생 동안 짝귀가 되었다.
1944년 9월 개정된 이른바 치안유지법의 ‘결사 가입’과 ‘결사 목적 수행 행위’가 죄목으로 적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일제는 독립을 목적으로 한 조선어학회에 가입하고, 조선어사전 편찬 업무에 참여한 점, 기관지 『한글』을 편집한 점, 한글맞춤법 통일안 개정 작업에 참여한 점 등을 문제삼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같은 해 2월 6일 감옥에 있을 때 모친이 사망하였다. 약 3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45년 8월 17일 풀려났다.
1945년 8월 25일 안국동예배당에서 조선어학회 임시총회가 열렸고, 조선어학회 간사와 이사를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 큰사전』 발간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 1948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의 첫째 권이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1935년부터 1957년 10월 9일까지 총 6권의 『조선말 큰사전』 완간을 주도했는데, 『조선말 큰사전』은 총어휘 164,125개이며, 전체 분량은 3,600쪽이다.
한편 미군정청(美軍政廳)에서 발행한 『한글 첫걸음』이란 초등학교용 교과서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글전용 가로쓰기로 출판된 이 책은 광복 후 첫 국어 교재였다. 1946년 문교부 학술용어 제정위원, 1948년 3월 한글문화보급회 부위원장,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잠시 부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에서 전시연합대학과 명륜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명륜대학은 1951년 4월 종합대학 전북대학교로 바뀌었는데, 이 학교에서 교무처와 학생처를 합친 교학처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1년 전북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건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6부터 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또한 1957년 『큰사전』편찬공로상과 국어운동특별공로상, 1959년 학술원공로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저술로는 『한글독본』(1946), 『표준 중등말본』(1949), 『표준 옛글』(1955), 『표준 고등말본』(1956), 『의문 해설 한글 강좌』(1960), 『표준 문법』(1968) 등이 있다. 2005년 10월에는 장수군의 생가 옆 부지에 서책·노트·원고·사진 등 1,000여 점을 진열한 전시관 등을 갖춘 정인승기념관이 개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