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보낸 지 1924일이 되었습니다. 종탑에 오른 지 50일이 되었습니다.
한라산에 올랐을 때 바닥을 기면서 자라는 향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뿌리 옆으로 가지가 뻗어있고, 잎들도 이끼처럼 바닥에 붙어 있습니다.
바람이 많은 곳에서 살기 위해 이렇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누운향나무라고 했습니다.
높이 오를수록 나무도 풀들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습니다.
5년을 길거리, 가장 낮은 곳에서 보냈습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기에, 이대로 더 내려가서 땅 속으로 묻힐 수는 없기에
하늘로 오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바람이 많아 더 낮게 엎드려야 하는 곳으로 올랐습니다.
일터에서 쫓겨나고 삶에서 밀려나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삭발을 하거나, 굶거나, 거리에서 구르거나, 하늘로 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기막힙니다.
그래도 대답 없는 세상이 기가 막힙니다.
거리에서 보낸 지 1924일이 되었습니다. 종탑에 오른 지 50일이 되었습니다.
커다란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짐승만도 못한 용역깡패들의 겁박에 치를 떨며 한뎃잠을 자야했습니다. 때로는 한밤중 취객의 소란에 놀라 깨어서 날이 밝아오길 기다려야 했습니다.
거리에서 보낸 여섯 번째 겨울의 마지막 문턱입니다.
우리들의 일곱 번째 겨울은 어디에서 맞게 될까요?
노동조합을 시작했던 때를 생각해 봅니다.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조회하고, 교육받고, 무거운 교재가방을 들고 수업하러 나가면
밤 열시를 넘겨서 끝나기가 예사였습니다.
내 아이가 아파도, 내 몸이 아파서 천근만근이어도 회원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아침 전단지 홍보, 주말 홍보, 휴일 출근, 한 달을 꼬박 이렇게 일해도
영업실적이 좋지 않은 달은 급여가 대폭 깎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관리자의 부당한 영업 강요였습니다.
100% 영업목표 달성, ‘마이너스는 없다! 무조건 제로 이상을 맞춰라!’
지국에 그달의 영업목표가 내려오면 ‘무조건’ 거기에 맞춰야 했습니다.
그만둔 회원들의 회비를 대신 납부하며 회원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회원교육비 100%입금, 못받은 회비를 입금시키기 위해 마감 때마다 카드를 긁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1999년 겨울, 노동조합을 만들고 도곡동 사옥 점거파업을 시작했습니다.
‘꼭 다시 돌아올 거야.’라며 이별을 고하고 한 집 한 집 문 닫고 돌아설 때마다 울음이 나왔습니다. 일주일을 주택가 길거리에 눈물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선생님, 언제 오세요?’하고 묻는 회원의 전화를 받고 농성장 후미진 곳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다가 같은 처지의 동료와 눈이 마주쳐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특수고용노동자란 말이 있는지도 몰랐던 그때, 설립신고서 접수 40일 만에, 파업농성 18일 만에, 위탁계약직 최초로 노동조합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았습니다.
좋아서, 기뻐서, 너무나 벅차서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축제와 같이 즐거웠습니다.
교사들은 이제 더 이상 주눅 든 근로자가 아니라 당당한 노동자였습니다.
단체협약을 체결하며 불합리한 제도들을 고쳐나갔고 복지를 늘렸습니다.
이제 사무실에서 관리자들은 전에는 일상이었던 부당한 업무를 함부로 지시할 수 없었습니다. 부당함에는 함께 맞서서 따질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지국의 교사들뿐 아니라 다른 지국의 교사들이 함께 나서서 사과를 받아냈고, 잘못을 고쳤습니다.
그렇게 노동조합의 깃발아래서 참으로 격한 행복을 맛보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회사는 우리가 당당하고 행복하게 일하는 것이 그렇게 언짢았나 봅니다.
근로자는 좀 수그리고, 주눅 들고, 눈치 보고, 군말 없이 일하는 것이 저들의 구미에 맞았나 봅니다.
조합원들이 모두 쫓겨난 지금의 현장에는 예전보다 더한 파렴치가 판치고, 유령회원들이 주눅 든 교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한때 전국의 조합원 수가 3,800명이 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현장관리자들의 주 업무가 조합원들을 탈퇴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영업은 이제 뒷전이 되었고, 조합원 탈퇴 실적에 따라 고과가 매겨졌습니다.
회식자리에서 팀장들이 조합원을 집단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주부교사의 아파트에 술 취한 국장과 지구장이 밤 12시가 넘어서 찾아가 백지를 들이밀며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노조탈퇴서를 써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조합원을 지국의 팀에 소속시키지 않고 책상을 혼자 때어놓기도 했습니다.
수업을 빼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따돌리고, 이간하고, 회유하고, 매수하고, 협박하여 한명 한명씩 집요하게 탈퇴시키거나 퇴사시켰습니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 형무소에서 했던 것처럼, 마치 유신 때 감호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상전향서를 받듯이 ‘탈퇴각서’를 받았고
2010년 12월 31일, 이를 거부한 조합원들을 전원 해고했습니다.
재능의 투쟁이 어찌 1900여일이겠습니까? 10여년을 싸워왔습니다.
3번의 단체협약 갱신체결 때마다 2년 이상을 싸워야 했습니다.
삭발, 단식, 고공농성, 가두선전…, 그리고 회사의 손배가압류, 민형사 고소고발….
배달호 열사께서 가압류에 항거하여 분신하신 2003년도에 재능교육은
이 노조탄압 수법을 재빨리 받아들여 조합비와 간부급여 약 9억 원을 가압류했습니다.
당시 단식투쟁으로 이에 항거했던 고 정종태 위원장은 그 후 2년도 되지 않아서 위암이라는 병마를 얻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년 12월 21일에 시작한 거리농성투쟁 1500일 즈음에, 우리는 또 한 명의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렇게 아팠으면서도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봐 괜찮다고만 했던, 웃음이 너무나 맑았던 고 이지현 법규부장.
해고자의 멍에를 진 채 가족과 우리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달 그달의 실적에 따라 수십만 원씩 급여가 들쑥날쑥해지고, 많게는 100만원이 넘게 급여가 깎이는 이상한 수수료제도 도입, 이에 불응해 시작한 천막농성.
회사는 우리의 살과 같은, 피와도 같은 단체협약을 파기했습니다.
여름 휴가비를 없앴습니다. 자동충당제도를 도입해서 월급 560원짜리 교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전임자를 해고하고, 노조사무실을 폐쇄하고, 사무실 집기를 실어갔습니다.
청약저축통장을 압류하고, 23억이 넘는 손배소를 청구하고, 채무불이행자로 등재하여 신용불량자로 만들었습니다.
깡패들에게 조합원들의 신상을 알려주고 미행을 시켰습니다.
시어머니께서 혼자 계신 집에, 회사직원과 집달리들이 들이닥쳐 장롱에, 컴퓨터에, 세탁기에, TV에, 자식들 김치 담가 주신다고 손수 장만하신 김치냉장고에 압류딱지를 붙였습니다.
농성장에서 급히 달려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농성물품을 빼앗아가는 경찰에 항의하다 구속되어 35일을 감옥에서 보낸 여성조합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차마 옮기지 못할 소리를 들을 때 그녀들은 얼마나 치떨렸을까요? 얼마나 무섭고 수치스러웠을까요?
이들이 타이어를 뚫어놓아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바람이 빠져 차가 주저앉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절망했을까요?
이제 용역깡패들을 철수했다고 해서, 이제 가압류를 일부 풀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1900여일의 죄과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저들에게 악행의 승리를 학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조합 인정!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반드시 승리해서 땅을 밟겠다는 마음으로 종탑에 올라왔습니다.
1924일이라는 야만의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지만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해 온 정규직 사원들에게 두들겨 맞고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다녔지만,
뜯겨지는 천막을 보며 마음도 힘없이 뜯겨져 나갔지만,
용역깡패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우리의 목소리에 동료도 사회도 외면하던 시간이 있었지만,
우리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재능교육은 이미 이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재능교육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해 온 재능선생님들에게
가짜영업 가짜회원을 강요하며 부당한 이윤을 축적하고 있지만,
회사를 증오하면서 일터를 떠나고 있는 많은 선생님들,
비윤리적이고 반교육적인 경영방식에 분노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기에,
용역깡패, 손해배상, 압류, 고소·고발이 아니고서는 버틸 수 없기에 이미 패배했습니다.
“노동조합 인정!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너무나 정당한 우리의 요구입니다.
재능교육은 노동조합의 요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노동조합이기에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요구입니다.
노동조합이기에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우리의 요구입니다.
노동조합이기에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12명의 전원복직이 우리의 요구입니다.
종탑에 올라온 지 50일이 지났습니다.
하얗게 덮여 있던 종탑 위의 눈이 다 녹아 없어졌습니다.
낮 시간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볕은 봄기운을 잔뜩 가져다 놓아
나뭇가지마다 새잎과 꽃망울을 피우기 위해 한껏 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봄맞이를 위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사력을 다해 물을 길어 올리듯,
우리의 투쟁도 봄을 맞이하기 위해 ‘단결의 물’을 ‘연대의 물’을 ‘투쟁의 물’을 사력을 다해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지쳐있는 어깨를 서로 토닥이며 함께 승리하는 투쟁 만들겠습니다.
승리는 정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