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중학 동창들과 만물상 산행에서 촬영한 심원사
두어번 만물상 산행중에 내려다 보고, 해인사 소리길 도중에 스쳐지나기를 했지만 몇해만에 다시 들린 심원사는 이제 산중 깊은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라진 듯 보인다. 삼단으로 구획한 영역에는 불사를 마친 전각이 각각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화려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소박한 색조로 다가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주차장을 올라서면 공양간인 정행단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보이는 정견당, 그 위로 높은 축대 위에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문수전. 관음전 구역이다. 가장 상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2층 통층구조의 약사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뒷쪽 산자락 전각에는 산신각.숭모전.정견각 현판을 달고 있다.
수륜면 백운리 가야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심원사. 삼층석탑의 양식을 통하여 8C경 창건된 절로 추정되나 창건과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숭인(1349~1392)이 "심원 옛절은 가야산 속에 있는데..." 라는 시가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도 향화가 피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권28 성주목 병자에 전하는데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근의 법수사를 중심으로 도은암, 보현암, 백운암 등 100여 개의 암자가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법수사지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탑과 돌기둥, 주춧돌, 암자터 등만 흩어져 남기고 있을 뿐 건물하나 없이 모두 무너져 내러버려 최근에 복원하였다.
주차장. 코스모스가 반긴다.
축대 좌우. 대형 맷돌이 자리하여 옛시절 심원사의 규모를 전하고 있다.
석탑 초층 탑신. 이 석탑 부재로 미루어 심원사에는 현재 석탑 외에도 한 기 이상의 석탑이 금당 앞에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불두가 결실된 석불좌상.
석탑. 문수전. 관음전 영역이다. 이숭인의 시로 미루어 고려말 심원사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심원사 장로에게...이숭인
심원의 옛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을 들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을 빌어 얻을 수 있을런지
이숭인(1349~1392).성주 출생.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 원구와 어머니 언양김씨 사이의 2남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 14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이색의 문하에 있었으며, 16세 때 등과하여 숙옹부승을 제수받고 후에 장흥고사가 되었다. 21세 때 성균관의 생원이 되면서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박상충·정도전·권근 등과 깊이 사귀었다. 24세에 중국의 과거에 응시할 인재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나이가 미달하여 가지 못했다. 그후 성균직강·예문응교·전리총랑을 지냈다. 우왕 즉위년에는 친명파라고 하여 대구현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소환되어 성균사성·전리판서·밀직제학을 역임했으며, 1386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창왕 즉위) 최영 일파의 참소로 통주에 유배되었으나, 최영의 몰락으로 다시 소환되어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그 일파로 몰려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에 앞서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후 태종이 그의 죽음이 무고함을 밝히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문사로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문재로서 고려의 국익을 위해 기여했으며, 시는 후대에 많은 극찬을 받았다. 또한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아 유풍을 새롭게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첫째, 경전 위주의 문학관으로 사장 위주의 문예보다는 도학적인 면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시는 성정의 정에 근본해야 한다고 하여, 학문이 사무사의 경지에 들어가서 성정의 정을 얻은 후면 시는 저절로 된다고 했다. 셋째, 시의 효용을 교화 위주에 두었으며 넷째, 자연발로의 문학관으로 시는 억지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의 시는 정연하고 고아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에는 〈제승사〉·〈오호조〉 등이 있다. 산문은 표문이 많은데, 이는 그가 대외관계에 필요한 많은 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의 문학을 대변하는 문인으로 그의 도학적인 문학관은 조선의 변계량·권근에게로 이어졌다. 저서로는 〈도은집〉 5권이 전한다.
앞의 답사기 회연서원에서 자세히 언급한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의 가야산 유람록에는 심원사가 폐사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심원고사폐조...정구
심원사를 지나가는데 오래된 절이라 거의 허물어지고 중이 없는 상태였다. 과거에 내가 여러번 잠을 잤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절간 문밖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잡초와 나무를 헤치며 얼마쯤 가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벼를 탁발하던 스님을 만나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 중략
1989년 복원한 2기단, 3층 탑이다. 상하기단과 탑신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기단부에는 2개 탱주를 조출하였다. 기단의 2개 탱주로 미루어 심원사 창건은 9세기 초반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옥개석과 탑신은 별석이며, 낙수면은 물매는 깊지 않다.지붕돌은 전각에는 반전이 보이고 풍탁공이 남아 있으며 옥개받침은 4단이다. 2층 기단속에서 진단구인 4개 납환이 출토되었다고 한다.상륜에는 노반이 보인다.
기단 탑신
삼층석탑 영역의 축대 아래에는 복원중 발굴된 부재를 모아 두었으며 경북 문화재 자료 52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심원사 중창중에 발견된 석조부재들. 기단갑석. 2개(?)의 노반 심원사에 석탑은 몇 기가 있었을까??
불두가 결실된 비로자나불상
주형거신광배로 두광.신광을 두겹 동심원으로 중앙,좌우에 화불 좌우에 화불을 두었다. 맨아래 좌우에는 향로 2좌가 새겨져 있으며 이런 사례는 특이한 경우이다. 위의 사진 비로자나불의 광배가 아니었을까? 불상과 광배는 주지스님의 꿈에 현몽하여 나투시었다고 전한다.
신방석
연화문이 새겨진 배례석
석탑 부재. 옥개석 탑신이 한 돌로 최상층의 부재 같다.
괘불지주
석등하대석. 불상대좌
금당영역에는 대웅전. 극락전. 약사전이 자리한다. 좌측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하였다. 극락전의 지붕은 4모 지붕으로 절병통으로 마감하였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가섭과 아난을 협시로 모셨다.
약사전. 2층 전각으로 4모지붕 절병통이 아름다운 통층 전각이다. 3층은 목조 석탑 양식으로 몇몇 절집에서 보이지만 2층은 유례가 있었던가.
멀리 보이는 전각은 중앙에 숭모전. 좌우에 산신각.정견각 현판을 건 재미있는 전각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봉안한 전각으로 판단 된다(직접 올라가 뵙지를 못했다). 예전에 올린 나의 해인사 답사기를 아래에 가져오니 전각의 상징성을 참조하갈 바란다. 국사단.
해인사의 국사단과 정견모주 이야기는 나의 해인사 답사기에서 가져 왔다.
국사단.가야산에는 산신이 있고 해인사 가람 터에는 이 터의 형국을 주관하는 토지신이 있다. 국사단이란 이 토지신을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가람을 수호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국사신앙은 불교의 정통적인 신앙이 아니라 한국 전래의 토속신앙의 대상이다. 그래서 건물의 명칭도 전이나 각이 아니라 단이다. 국사단은 통도사. 표충사. 제천 신륵사에서도 볼 수 있다.
국사단에 봉안된 가야산신 정견모주 벽화.
정견모주(正見母主) 는 가야연맹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여자 신이였다. 대가야 및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라고 한다. 원래 가야산(伽倻山)의 산신이었는데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 (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선도 성모는 혁거세의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령한 아들을 낳아 동쪽 나라의 첫 임금이 되었다. 나라에서 민간으로 내려온 산신 신앙을 인용하여 높고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하늘신 이비가지를 마음에 품고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 정견모주의 사당이 원인이 되어 모주의 울음을 재촉하는 기우 방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견모주는 가야국의 비로서 짧은 일생을 살았으므로 원한에 맺혀있다. 가야사람들은 가야산 여신을 높여 `정견모주`라 우러르게 되었다 한다.
정견모주의 첫째 아들 붉은해는 왕위를 계승하니, 보일(宝日)은 비지태자(比只太子)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는 가야산 여신인 정견모주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이뇌왕이고 이뇌왕은 신라에 청혼,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월광태자를 낳았다. 522~52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심원사에서는 구수헌이라는 템플스테이와 어린이를 위한 검정고무신 동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은 심원사에 직접 연락바란다.(054-931-6886)
구수헌龜睡軒...거북이 충전소 거북이도 쉬고 한가함을 즐긴다는 선현의 말로 일상에서 벗어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의 시름을 내려 놓고 활력을 불어 넣어 평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산사 체험
심원사. 법수사지는 최근에 개방된 가야산 만물상 코스 산행과 함께 추천한다. 단체가 이동하는 산행이 아니면 모두 차량진입이 가능하여 크게 발품 팔 필요도 없다. 주변에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식당도 다수 있으며 가천면 소재지에는 막걸리 양조장도 가동하고 있다. 또한 야생화 전시관, 회연서원, 금봉리 비로자나불.보월동 석탑 등 문화유산이 지근에 산재하고 있어 한나절 답사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2012.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