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ecial Mountain - 캐나다 로키산맥 헬리스키… 8일간 30,500m 버티컬 다운 기록
커다란 새가 되어 비행하는 듯한 몽환 글 송철옹
CMH(Canadian Mountain Holidays)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동부 로키산악지대에 운영하고 있는 12개 헬리스키 전용로지 중 하나인 고딕스(Gothics)에 도착한 것은 1월 21일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1월 19일 인천공항을 떠나 밴쿠버로, 밴쿠버에서 다시 캘거리로 날아갔다. 캘거리에서 이번엔 캐나다의 1번 도로인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를 타고 밴프, 캔모어, 레이크루이즈, 골든, 레벨스톡을 거쳐 7시간 30분을 달렸다. 사흘간 순수 이동 시간만 20시간을 넘긴 만만찮은 여정. 여행에 지친 몸은 휴식을 원했다. 눈이 따끔따끔하고 가벼운 현기증까지. 그러나 잠이 오질 않는다. 고요하고, 어둡고, 침대는 따뜻해 잠들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춰져 있는데도 정신은 자꾸만 새록해진다. 시차 때문일 것이다. 낮밤이 뒤바뀌었으니까. 하지만 캐나다 로키 골든스트림 골짜기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 아담하고 포근한 로지에서 맞은 첫 밤, 나를 뒤척이게 한 것이 단지 시차만은 아니었다.
스키어의 로망, 헬리스키
캐나다 관광청을 통해 캐나디언 로키산맥으로 헬리스키(Helli-Ski) 취재를 와주지 않겠느냐는 CMH측의 제의를 받은 것은 겨울이 막 시잘 될 무렵이었다. 그때 난 강원도 횡성군 둔내에 있는 주택 신축현장 경사 35° 물매의 2층 지붕에서 서까래 위에 합판을 붙이는 작업 중이었는데 관광청 담당자의 전화를 받은 뒤 흥분해서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필자는 4년 전부터 전문목수팀 팀버스미스(TIMBERSMITH)를 운영하며 목조주택 짓는 일을 하고 있다).
헬기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순백의 버진 파우더(Virgin Powder)를 스킹하는 헬리스키는 스키어의 로망이다. 로망이 현실이 된다니 지붕 위에선들 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세계 유수의 스키장들을 취재해봤지만 고산등반가가 에베레스트를 꿈꾸듯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헬리스키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게다가 캐나디언 로키는 필적할 대상이 없는 지구상 최고의 헬리스키 포인트다.
날이 밝으면 오래 꿈꿔온 환상의 스킹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과 기대감으로 첫날밤 잠을 설친 것은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다. 새벽 5시 20분. 바지를 꿰입고 커튼을 젖혀 창밖을 내다보곤 맥이 탁 풀렸다. 족히 팝콘 크기는 될 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맑은 하늘에 별이 총총했는데 이게 웬일인지. 물론 눈이 없으면 스키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늘이 뚫린 듯 쏟아져서야 대체 어떻게 스키를 탄단 말인가.
로지 게시판에 스노 리포트가 붙었다. 밤새 신설이 올 들어 최고인 50cm나 내렸고 앞으로 4~5일은 눈이 계속 된다는 예보. 일정이 정해져있는 처지인 나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폭설 속에서는 스키도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헬기가 비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황은 나의 섣부른 판단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로지 앞 헬리포트에 서있던 Bell 212헬기의 로터가 아이들링을 시작한 것이다. 7시께부터 머케닉이 털모자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채 보조시동장치를 가동시키는 것을 지켜보며 설마 했는데 비행 가능으로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체념 속에서 홀짝이던 잉글리시 모닝티 잔을 던지듯 내려놓고 서둘러 복장을 갖춰 헬기에 올랐다. 눈은 한층 기세 좋게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 위의 다른 세계
트윈 엔진의 11인승 헬기는 폭설 속에서도 계곡을 따라 힘 좋게 올라간다. 지상 풍경은 거센 눈발 탓에 나무들 우듬지만 검은 깨알처럼 보인다. 골짜기를 따라 방향을 이리저리 틀며 고도를 높여가던 헬기가 2000m를 넘자 기압 변화로 멍멍했던 귀가 뚫림과 동시에 갑자기 커튼을 열어젖히기라도 한 듯 주변이 밝아졌다. 두터운 눈 구름층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헬리스키의 여러 장점 중 하나가 저지대의 기상과 관계없이 스키가 가능한 곳을 찾아다닐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착륙한 곳은 해발 3000m대의 능선.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허벅지까지 눈에 빠지며 나뒹군다. 거센 로터의 바람과 발을 내딛는 족족 빠지는 깊은 눈. 일행들이 여기저기서 쇠똥구리처럼 굴러다닌다. 제대로 서있으려면 우선 부지런히 발밑의 눈을 다져야했다. 헬기가 떠나고 로터가 일으킨 짧은 블리자드가 가라앉자 비로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히말라야와 다를 바 없는 설산.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저 멀리 아스라한 곳까지 오로지 눈에 덮인 산, 산들 뿐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림한계선까지 장애물 하나 없는 거대한 설원이 펼쳐져 있다. 제법 큰 눈처마를 호기롭게 무너뜨리며 가파른 설벽을 가로질러 빙하지대로 내려서자 첫 런에 벌써부터 아드레날린이 샘처럼 솟구친다.
솜이불 같은 파우더의 푹신한 감촉. 스키에 압력을 가하면 부드러운 눈이 몸을 둥실 띄워준다. 깃털 속을 통과하듯 저항 0%의 활주다. 입으로 불면 훌훌 날아가는 고품질의 파우더는 폴로 찍어 봐도 허공인지 설면인지 감각이 없다. 스키를 타는 게 아니라 커다란 새가 되어 여유롭게 날갯짓하며 비행하는 느낌이다. 세상에.
전나무 숲 속의 트리런
눈사태의 위험이 있거나 가시거리가 짧은 경우 숲 속에서 트리런(Tree Run)을 하게 된다. 숲에서는 나무들이 지지말뚝이 되어 개활지에 비해 눈사태의 위험이 적고, 또한 나무가 차선이나 도로 표지판 역할을 해 지형 파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높이 30~40m, 지름 70cm에 달하는 더글라스퍼(전나무)와 스프러스(가문비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숲 속은 아찔한 급경사. 나무에 부딪히면 어딘가 부러지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뛰어들어보니 스키 부츠가 완전히 파묻힐 만큼 깊은 눈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여준다. 턴 사이즈를 2m쯤으로 좁게 잡고 업다운 동작으로 리듬을 주자 스키는 부드럽게 눈바다를 항해한다.
평균 경사가 40° 이상이어서 앞선 스키어가 만든 쉬푸르에 들어서면 도저히 감당 못할 속도가 난다. 그 결과는 십중팔구 나무와 정면충돌. 무조건 푹신한 신설만을 골라 내려가야 한다. 트리런에서 충돌 말고도 조심해야할 것이 또 하나 있다. 트리웰(Tree Well)이다. 나무 밑둥을 중심으로 반경 1.5m쯤의 원형으로 도사리고 있는 이 함정은 빙하지대의 크레바스에 비견할 만하다. 제대로 빠지면 자력 탈출이 어렵다. 올 겨울 들어 누적 적설량이 6m에 육박하는 이곳의 나무 밑둥 주변은 나뭇가지가 우산역할을 하므로 눈이 덜 쌓이는데다 눈의 밀도가 낮다. 문자 그대로 우물처럼 깊은 함정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이날 스키가 벗겨지지 않은 채 가슴까지 잠기는 깊은 트리웰에 빠져 10분여의 사투 끝에 모래밭 개미귀신집에 빠진 개미처럼 녹초가 되어 탈출했다.
이튿날 눈발이 다소 약해진 가운데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첫 런을 시작했다. CMH는 이 지역의 모든 봉우리와 꿀르와르, 빙하지대, 트리런 지역에 클론다이크, 모닝스타, 발렌타인 등 이름을 붙여놓았다.
첫날 스킹으로 설질 파악과 워밍업을 끝낸 팀 멤버들은 한층 공격적으로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일본 나가노에서 온 시오하라씨를 비롯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온 후안, 메르세데스, 미국 미네소타에서 온 마크, 엘리자베스, 필, 도나, 스킵, 마저리, 프랑스에서 온 앙드레 등 우리팀 멤버들은 파우더 초보인 나와는 달리 모두들 적어도 다섯 시즌 이상 CMH 헬리스키로 파우더를 경험한 고참들. 그중 요트 디자이너인 스킵(64세)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30여 차례나 참가한 '왕단골' 고객이다. 스킵의 버티컬 다운(Vertical Down)은 무려 1,134,645m에 이른다. 버티컬 다운은 헬기 착륙 지점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온 위치까지의 표고차를 누적 계산한 기록으로 헬리스키에 있어 개인 경력증명과도 같다. 완벽한 눈, 완벽한 날씨
사흘째. 꿈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예보보다 일찍 고기압대가 찾아온 것이다. 헬기가 1000m대에 형성된 구름층을 벗어나자 모두들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아야했다. 선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내려다본 풍경은 장엄했다.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진 하얀 산들의 바다.
우리팀의 헬기 파일럿 로키가 연신 “아이구(Oh, my), 이런(Damn!), 제기랄(Fuck!)”을 연발한다. 환호성을 지르며 헬기에서 어린아이들처럼 왁자지껄 뛰어내리는 우리들을 보며 이 멋진 날 온종일 스키어들을 실어 날라야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7년째 CMH 파일럿 일을 하고 있는 그는 폭설 뒤 날씨가 좋아졌을 때의 스킹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우리들을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헬리스키의 또 다른 즐거움은 헬리 런치다. 이곳 가이드들이 왈라비(캥거루보다 좀 작은 유대류)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6인승 Bell 407 헬기가 햇볕 좋고 널찍한 장소로 식사를 배달한다. 산 속의 식사인 만큼 메뉴는 소박하지만 모두 별미다. 보온통에 담긴 뜨끈한 수프, 치즈를 두껍게 넣은 칠면조 샌드위치, 과일, 굴통조림, 훈제 청어. 그리고 식사 후 마시는 티와 그 잔을 차가운 손으로 감쌀 때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와 향기. 여기에 맥주 한 캔만 더해진다면 세상에 어떤 왕도 부럽지 않은 호사이겠으나 불행히도(?) 음주 스키는 이곳에서도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그루밍 된 인공 스키장의 슬로프에서도 그렇듯 파우더에서도 안정된 스킹의 핵심은 결국 뉴트럴 포지션 유지 여부였다. 초반 이틀 동안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까지 아팠던 것은 깊은 눈에 스키팁이 박힐 것만 같아 자꾸 상체를 뒤로 제낀 결과였고, 그것은 로키산맥이 파우더 생초보인 내게 요구한 짭짤한 신고식이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만큼 헬기 착륙 고도가 계속 높아졌다. 최고 3500m까지 올라가 구름바다가 시작되기 직전인 1000m까지 햇살 가득한 곳만 골라 스킹을 한다. 우리는 한번의 런을 마치면 각자가 그려놓은 라면발 같은 쉬푸르를 올려다보며 스스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나흘째엔 인간의 시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였다. 저지대 계곡에만 지형적 요인으로 안개가 일고 있을 뿐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로키산맥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 큰 눈이 내린 뒤여서 착륙 지점 어디나 완벽한 버진 파우더가 보장됐다. 가파른 설벽을 돌파해 광대한 빙하 위 설원을 누비고 삼림한계선 아래로 내려서서 트리런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키는 아토믹사의 헬리대디(Helli-Daddy). 파우더인 이곳의 설질에 알맞게 진화시킨 팻스키(Fat Ski, 뚱뚱한 스키)다. 카빙스키에 비해 사이드컷이 거의 없고 폭은 넓다. 지지력이 약한 신설의 표면층 가까이로 떠다닐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것이다. 스키폴도 바스켓이 크고 손목을 감아쥐는 스트랩이 없다. 눈사태에 묻힐 경우 스트랩이 치명적인 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 지점에서 일행들이 모두 내려간 뒤 잠시 혼자서 주위를 둘러본다. 물속처럼 고요하다. 로키의 한가운데 서서 자연이 빚은 거대한 작품을 보고 있는 내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꿈속에서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의 경지. 이날 저녁 식사는 흥분한 스키어들이 와인과 맥주를 나누며 수다를 떠느라 3시간이 넘게 끝나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스키어들이어서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던 차에 최고의 날씨 속에 최고의 눈을 맛보고 있으니 할 얘기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서로 찍은 사진을 돌려보고 자신이 갔던 코스를 설명하는 등 유쾌한 화제가 끊이질 않은 덕에 로지의 와인셀러는 이날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게다가 발동(?)이 걸린 로지 매니저 겸 수석 가이드 제임스가 눈밭에 장작불을 피우고 온갖 종류의 치즈를 안주로 준비해 야외 와인 파티를 여는 바람에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폭발하는 파우더
목조주택을 짓는 현장에서 사용하는 내 툴박스엔 PAT(Powder Actuated Tools)라는 공구가 있다. 강철못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이 폭발하며 못이 발사되는 것으로 완전히 양생된 콘크리트를 간단히 꿰뚫는 막강한 툴이다. 이 PAT에서처럼 파우더는 '다져지지 않는 눈'이라는 뜻도 있지만 '화약'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헬리스키를 하면서 파우더가 갖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사실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헬기를 타고 산정으로 날아올라 프레시 파우더에서 스키를 타면 턴을 할 때마다 얼굴까지 눈 파편이 폭발해 올라오며, 그것은 가슴을 폭발시킬 듯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까지 날씨와 설질은 가히 완전무결했다. 해발 600m의 로지는 구름에 잠겨 있어도 헬기로 1000m만 올라가면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맑은 날씨와 좋은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정에서 만나는 차갑고 드라이한 공기와 온몸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운 햇빛, 아무리 엉망으로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것 같아 마음대로 내지르는 거칠 것 없는 스킹. 어떤 날은 정상에서 삼림 한계선까지 단숨에 내려가 트리런을 했다. 햇살 좋은 날의 트리런엔 눈 내릴 때와는 또 다른 특별한 멋이 있었다. 짙은 숲속, 하늘을 가린 침엽수 사이를 비집고 비쳐드는 햇살의 기둥들. 그 빛기둥 사이로 고운 눈 알갱이들이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몽환적인 풍경을 보고 있자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에서 보여줬던, 그런 환상의 세계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더 바랄게 없는 최고의 조건에서 8일간 30,500m의 버티컬 다운을 기록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해발 고도의 세 배를 훌쩍 넘기는 높이다. 하늘과 눈과 산, 그리고 그 속에서의 감동적인 스킹. 로키산맥의 슈퍼 스크린이 남긴 잔상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또 다시 잔잔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