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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가 만개하는 요즘 같은 봄철 해빙기엔 산죽이 밀생하는 등산로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볼 일이다.
산죽은 수분을 좋아하여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토질 자체가 진흙성분이 많이 함유된 세립토 여야 하기
때문에 배수를 하지 않은 채 물을 머금고 있던 산죽 밀생지역의 미세토는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데 천상의 화원으로 철쭉축제가 유명한 지리산 바래봉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배수가 잘 되어 건축용 대지나 학교 운동장 등등 어디서든 환영을 받는 흙이 일명 마사토 인데
화강암이 비바람에 풍화암이 되고 풍화암이 다시 화강토로 바뀌게 되는데 마사토의 정확한 학명이 화강토이고
화강토가 빗물에 씻겨 하천으로 흘러 들면서 일부 미세토가 씻기면서 석영 운모 장석의 세 성분이 남게 되고
이 세 성분을 바로 모래(sand)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서울 서라벌은 거대한 화강암 판축 위에 조성된 천년의
고도이다.
서라벌은 한때 가구수가 15~6만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4인 가족으로 적게 잡아도 인구수가 60만이 넘는
거대 도시 였었는데 끄으름이 싫어 숯불로 밥을 해 먹을 정도로 융성한 문화를 누렸고 그 융성한 문화의
반증이 바로 오늘 우리 느림보가 찾아 가는 불교 노천 박물관 경주 금오산 이다.
경주 남산은 화강암 덩어리 임에도 불구하고 등산로 좌우로 제법 많은 산죽이 듬성 등성 보인다.
쾌청한 등산로를 타고 가면서 산죽을 감상하는 운치가 참으로 묘한 느낌을 준다.
비아냥 거리는 말로 경주돌 이면 전부 옥돌 이냐? 는 말이 있다 그만큼 경주 지역에선 옥돌이 많이 출토
된다는 반증인데 경주 일대를 다녀 보면 알겠지만 화강암 판축에서 분출하는 레이져 광선 같은 찌릿 찌릿한
기를 엄청나게 받게 된다. 절멋던 시절, 정확히 말해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 이곳 경주에서 공장
창업 이라는 무지개빛 꿈을 안고 천방지축으로 돌아 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 솟구치는 화강암 기운 땜에
시도 때도 없이 가운데 토막이 용틀임을 하여 애꿎은 바지 지퍼를 망가뜨리는 통에 만부득 도깨비 방망이를
오른 쪽 허벅지에 스카치 테이프로 밴딩을 하여서 지퍼 망가 뜨리는 불상사는 갠신히 면하고 나니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가운데 토막이 오른쪽 다리와 함께 부산의 영도다리 처럼 위로 번쩍 들렸던 탓에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여러번이나 둑을 뻔 했지 멉니껴?
경주 사람들 말로 경주에서 불국사 보다 더 유명한 것이 바로 황남빵 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음식이
팔우정 로터리에 있는 해장국인데 메뉴는 세가지다. 콩나물 육수에 메밀묵을 썰어 넣은 오리지널 해장국과
이쪽 사람들이 핏국 이라고 부르는 선지국 그리고 추어탕 인데 주방이 재래식 부뚜막을 연상 시키면서 예전의
다찌노미 즉 선술집 분위기의 팔우정 해장국집에서 대포 한잔 기울이며 김이 무럭 무럭 나는 해장국 한그릇을
시간 내서 언제 함 꼬옥 훌쩍여 보셔요. 쪕 쪕.
글구 금관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많이 출토된 황남대총 또한 유명한데 황남동에 있는 대총 즉 커다란 왕묘란
뜻이고 황남빵 또한 일제시절 경주 최부잣집 후손인 최 영화 옹이 일본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처음으로 이곳
황남동에서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어서 구웠고 최 옹이 타계 하시면서 그 밑에서 전수를 받은 장인이 황남빵은
둘째아들에게 가업으로 승계토록 하고 자신은 따로이 독립하면서 낸 상호가 바로 경주빵 이다.
요즘은 찰보리빵이 추가 메뉴로 등장하였는데 이 빵은 안직 먹어 보질 못했다.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은 빵을 통칭하여 풀빵 이라고 하는데 근자에 유행하는 붕어빵과 잉어빵이
대표적이고 그전엔 국화문양이 있던 국화빵이 있었고 이와 비슷한 형태로 구워 내는 오방떡, 천안의
호도과자 그리고 문어를 넣은 타코야끼 등등 많은데 이런 여러 빵들의 원조가 바로 일본의 도미빵 이다.
천안에서 호도과자가 유명한 이유는 원래 호도가 고려말 원나라에서 처음으로 들어 와 천안의 광덕면에 있는
광덕사에 심었고 지금도 수령이 400년이 넘는 호도나무가 광덕사 경내에 서 있는데 호두는 가래나무과로
한문으론 호도 즉 오랑캐 복숭아란 뜻이고 우리 어릴 적엔 추자 혹은 앞에 당나라 당자 접두사를 붙여 당추자
라고도 했는데 호두과자 역시 밀가루 반죽에 호도를 넣어 일제시절 일본인이 개발한 식품이다.
경주의 옛지명에 나오는 월성은 성곽의 모양새가 반달 모양 이라 반월성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오늘 우리
느림보가 찾아 드는 남산은 본디 고위봉과 금오봉 두 산봉우리와 계곡을 통칭하여 경주 반월성에서 남쪽에
위치한 산이라 남산이란 산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오늘 우리 느림보 에이팀은 용장사가 있는 용장리에서
비이팀은 포석정에서 들머리를 잡고 금오봉에서 도킹하여 삼릉으로 함께 하산키로 한다.
문화유적 답사나 등산이 활성화 된지가 얼마 되지 않아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경주에 남산 즉 금오산이란 산이
그것도 불교문화유적이 온 산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지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금오산이
대중들에게 귀에 익기론 근대에 들어 유호가 작사 박 시춘이 작곡 하여 가수 현인이 불러 힛트한 신라의 달밤
이란 가사에서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노오래에를...
흐 흐 신라의 달밤은 빠바비바 빠바르바바 하는 전주곡이 끈내 준다. 그리고 그 이전
이씨조선 세종대왕 때 5세 신동으로 명성을 날렸고 생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 시습이 이곳 경주 금오산 기슭
용장사 인근에서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그 주인공인데 금오는 자라 오를 쓰고 김 시습은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두 글자를 따서 시습이란 이름을 지었고 생육신과는 달리 단종대왕 복위를
꾀하다 일이 실패하여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 중의 한 분인 성 삼문은 이름의 유래가 외갓집에서 출산을 할
적에 하늘에서 태여났는지를 세번이나(三問) 물어서 삼문이라고 했다는 정설과 명리학에 밝았던 성 삼문의
외조부가 산모의 출산 시를 늦추기 위해 다듬이돌을 자궁 앞에 막았다는 설과 장독에 산모를 넣었다는 또 다른
설이 있는데 좌우간 출산을 해도 좋은 지를 세번이나 묻다 결국엔 한시간 정도 이른 시간에 출산을 했기
때문에 환갑을 넘기지 못한 39세에 요절을 하게 되는데 한강변 노량진에 내 버려둔 사육신의 시신을 매월당
김 시습이 가매장을 하고 이어서 계룡산 동학사에서 초혼제 또한 김 시습이 올려 주었는데 이후 김 시습은
세상의 명리를 떠나 설잠이란 법명을 얻으며 한때 불가에 귀의도 하면서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외도를 하면 사육신 처럼 대역죄에 걸려 들면 본인은 능지처사 혹은 능지처참이란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집안은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본인도 문제지만 남은 가족 그 중에서도 부인을
비롯한 딸들과 같은 여인네들의 살아 갈 앞날이 문제다. 대부분 관노나 개인의 사노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데
왕이 승하한 후의 왕비나 후궁들의 경우엔 고려와 조선조 때 대부분 삭발을 하고 비구니가 되어 불전에 귀의
하는 묘수가 있는데 단종대왕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리고 말이 관노나 사노이지
사실은 한때는 아랫것들 이라고 호령하던 남정네의 성노리개가 되는 것이다. 이태리 깽조직 중에 마피아가
있는데 이 마피아의 어원이 바로 오 불쌍한 내 딸 이라고 한다. 이태리는 지정학적으로 외침이 많고 남의
떡맛을 볼려고 몰려 온 해적들이 아버지 면전에서 딸을 자빠뜨리면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아버지가 마피아만
부르 짖다 후일 이런 강인한 근성으로 미국땅에서 대부를 탄생 시키게 되는데 우리는 깡패를 건달이라고들
하는데 건달은 불가의 건달바에서 나온 말이고 깡패는 깽(gang)과 패거리의 합성어 이고
형벌 중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이 능지처참인데 살점이나 신체 부위를 아주 조금씩 베어 내서 최대한 오래 도록
고통을 느끼다 전신이 완전 해체된 연후에 죽도록 하는 것이고 이미 죽어 버렸을 경우엔 육시랄 놈의 육시란
걸 행 하는데 죽은 자의 몸을 한번 더 해체 하는 것이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가 있을 경우엔 부관참시
라고 하여 관 뚜껑을 열고 시신을 한번 더 난도질 한 연후에 파묘를 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열형은 팔 다리 머리를 수레에 묶어 사방에서 잡아 당기는 형벌인데 한방에 훅 가니 그래도
능지처참 보다는 백배 나을 것 같다. 아무리 구래도 형벌 중에서 놈들이 가장 두려운 형벌은 본인이 제안한
담금형 이랄 수가 있다. 지난 산행기를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잠시 담금형을 간략히 소개하면 물총을 아무
곳에나 쏘아 대는 놈들의 가죽물총을 오초순간 뽄드를 그득 담은 간장 종지기에 푸욱 담구었다가 오초 후에
건져 내면 형 집행이 간단하게 끝납니다. 구럼 뽄드를 전신에 뒤집어 쓴 물총이 스물네시간 빳빳하게 기립을
하기 때문에 차라리 횡재를 한 것이 아니냐구요? 알아서 하셔요
오줌도 못 누는데 물총에서 물이 나오니껴? 캬 캬.
붉은 색과 평북이 고향인 김 소월님의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덕분에 한때는 사람들이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
로 오인하여 입에 담기를 꺼림칙 하게 생각한 때가 있었는데 북한의 국화는 산에서 핀다고 하여 산목련이라
고도 하고 모양새를 따서 함박꽃 이라고도 하는 북한에서 말하는 목란이 바로 북한의 국화이고 일본은 오늘
경주 보문단지 일대에서 향연을 벌이게 될 벚꽃이 국화인데 벚꽃이 우리나라에서 잘 성장함은 토질이나
기후가 잘 맞다는 얘기이니 구태여 일본 국화라고 외면시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는 벚꽃이 본디 우리땅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 갔다 역수입된 것 이라며 자위를 하는 분도 있는 가 본데 꽃이 이뿌면 우리 것을
만들어 보고 즐기며 되는 것이다. 폭죽을 쏘듯
팦콘을 튀겨 올리듯 쓰나미가 몰려 오듯 일시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꽃 잔치 한마당은 마냥 즐겁다.
만개한 벚꽃을 보노라니 미쓰비씨 엔진의 굉음을 울리며 일본의 해군 제로센 전투기가 미국땅 하와이 진주만을
초토화 시키던 시절에도 우린 자전거 한대 제대로 맹글지 못하고 겨우 일본놈들이 만든 국화빵틀을 사선
풀빵이나 호도과자를 구워 내던 시절이 생각난다.
삼릉 주차장에서 걸판진 뒷풀이를 마치고 보문단지로 발길을 돌리니 예상 했던 바 이상기온으로 벚꽃의
절정기는 지났지만 큰 물레방아가 하염없이 돌고 도는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운 그곳에서 모두들 사진촬영에
정신들이 없다. 마치 수학여행 온 어린 학생들 처럼.
초등핵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와서 불국사에서 석굴암 까지 깨엿 하나 빨면서 먼지길을 하염없이 걸어
올라 가서 돌절구 처럼 생긴 부처님 한번 보곤 마냥 실망 했던 어린 시절과 절멋던 시절 이곳 경주에서
자그만 공장을 창업하던 참으로 물이 좋았던 그 어느 세월이 꿈처럼 몽실 몽실 떠 오른다.
마지막으로 실화 한토막 들려 드리며 경주 금오산 산행기를 접고져 합니다.
88년, 올림픽과 5공화국 청문회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시절 쟘바때기 한벌 걸치고 경주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공장부지 물색으로 정신이 없던 나에게 서울에서 친구들이 가끔씩은 응원차 내려 와서 밤이면 밤마다
거하게 술을 마시던 어느 날 지하 맥주홀엘 들어 가니 젊은 지배인이 동국대 경주분교 학생이라 선배 후배
어쩌며 약간 친해 져서 흥이 오르는 지라 노래방이 없던 시절 홀에서 쌩음악으로 친구 놈들과 몇 곡의 노래를
부르며 개지랄을 떨고 있는데 카운터에 계시던 주인장 되는 초로의 미인 할머니가 느닷 없이 자신의 비용으로
뺀드를 불러 주지 멉니껴? 거의 새벽녘 꺼증 곤죽이 되도록 마시다가 그 다음에 또 찾아 드니 카운터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나를 알아 보시곤 야 야 동완아(젊은 후배 지배인)! 인쟈 고만 샷다 내리고 뺀드나 불러 오그래이
그날도 삐빳빠 룰라에 막춤을 곁 드려 밤새도록 분탕을 지겼는데 할머니 께서는 우리가 장을 파하고 가게문을
나설 때 까지도 카운터 그 자리에 계시면서 마냥 우리를 지켜 보고 계셨다.
외항선장인 할아버지 덕분에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도 충분하고 시간도 많은 지라 자신의 건물 지하에 맥주집을
열긴 열었는데 돈에는 큰 관심이 없고 30대 중반의 나와 내 친구들이 잼나게 노는 모습이 마냥 구여웠었던 가
본데 당시로선 그 할머니의 심사를 이해하긴 정말 어려운 일이였다. 허나 내가 벌써
그 할머니 나이가 되었고 이 나이가 되니 언제 부턴가 나이 어린 학생들이 재잘 거리며 노는 모습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이기 시작 한다. 당시의 미인 할머니는
절믄 나를 보면서 자신의 젊었던 시절의 실루엣을 그리며 잠시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쵸콜릿트 상자
속으로 들어 가셨고 어마나 어느 새 그 할머니의 나이가 된 나는 또 다른 젊음을 보면서 온 세상의 여자가 전부
내 여자인 줄로만 알면서, 막춤을 추고 노래 부르며 놀던 서라벌의 처용을 연상 시키던 그 시절로 마냥 돌아
가곺은 염원으로 몸부림을 쳐 볼 뿐이다. 이때면 언제든 잔잔하게 깔리는빽뮤직이 있다.
가수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
경주시 천북면 화산리에서 불도져로 부지를 정지하던 공장터와 카운터에서 내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를 즈음이면 연신 돌 부장 최고다를 외치던 천진난만한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화들짝 피웠던 벚꽃도 어느 새 내린 봄비에 페이브먼트 위를 구르는 신세가 될 터이고 귓볼에 솜털이 뽀송
뽀송했던 내 청춘도 어린이날 아이들이 쏘아 올리는 풍선 처럼 자꾸만 자꾸만 그 먼 곳을 향하여 걸음을
뚜벅이게 될 것이지만 그래도 이번 생은 영 젬병은 아닌 듯 하다. 안즉도 아련한 추억이 있으므로.
분당 탄천변 쑤루메기 돌삐 드립니다.
첨언 : 물고기들은 짝짓기 철이 되면 특히나 숫컷의 경우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몸전체가 군인들이
위장을 하듯이 화려한 색조를 띄고 몸형태도 일부 변하게 되는데 이를 혼인색 이라고 한다. 제
고향땅인 낙동강 수변에선 숫피래미가 무지개빛으로 혼인색을 띄게 되면 그때 부터는 이 숫피래미를
쑤루메기 라고 합니다. 현란한 혼인색으로
사방을 거침없이 내 달리며 암컷들을 유혹하던 그 쑤루메기 시절이 마냥 그리워 집니다. 그럼 지금은?
탄천 모래 속에 숨어서 눈까리만 이리 저리 굴리는 모래무지 신세져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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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려했던 돌삐님의 추억이 어린 경주..
세상이 온통 내것인냥 놀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리웠겠습니다.
누구나 젊었을적 한가닥 하던 시절이 있겠지요.
그 시절이 경주 땅이라니 이번 경주 금오산 산행이 남다른 감회가 서리었을것 같습니다.
돌삐님의 이야기보따리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이야기를 듣노라니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찌 머릿속에 넣어두고 계시는지..놀라울 따름입니다.ㅎ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아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경주벚꽃은 지나가 버리고..
다시 한번 경주에 가야 될 것 같습니다.
돌삐님 할아버지 되심을 축하 축하 드립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