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린저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글래스 가족 이야기’
『프래니와 주이』는 글래스 집안의 일곱 남매들 중 여섯째와 일곱째인 이십대의 젊은이 프래니와 주이의 이야기이다. 샐린저의 출간작 다섯 권 중 세 권이 글래스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글래스 가족 이야기’ 집필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로 삼았던 샐린저는 “글래스 가족 이야기를 작업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일생 동안 이 이야기들을 기다려왔다. 나에게는 적절한 조심성과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이것들을 끝맺을, 꽤 괜찮고 편집증적인 계획이 있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글래스 집안 사람들에 대한 다른 단편들은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와 『아홉 가지 이야기』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방황하는 이십대의 초상
영혼을 탐구하는 연극 전공생, 프래니
「프래니」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남자친구 레인 쿠텔과 예일 대학 풋볼 경기를 보며 주말을 보내러 온 프래니 글래스의 이야기다. 프래니는 연극을 전공하는 빼어난 미모의 여대생으로, 주연급 역할을 맡아 무대에 서고 있다. 프래니는 사람들과 세상사에 매우 비판적인데, 그중에서도 에고이스트들을 못 참아한다. 자신에게도 자기가 비난하는 에고이스트 같은 면이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한다.
오랜만에 즐겁게 데이트를 즐기려던 둘의 계획은 점심식사 자리에서부터 틀어진다. 프래니의 심리 상태가 영 불안정한 것이다. 프래니는 레인에게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애정 표현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공격적인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비판을 멈출 수가 없다. 프래니는 레인에게 겉치레만 중시하는 대학 생활과 교수들의 자만에 질렸다고 불평한다. 그녀는 연극 전공을 그만두었다고, 출연이 예정되어 있던 연극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말한다. 연기하는 자신과 다른 이들이 허세에 가득찬 에고이스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냥 경쟁이 두려워서 그만둔 건 아니냐고 레인이 묻자 프래니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인다.
“나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모르겠어? 난 내가 경쟁을 하려 할까봐 두려워. 그게 바로 내가 겁내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연극 전공을 그만둔 거야. 내가 다른 모두의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끔찍하게 길들여졌다고 해서, 내가 갈채를 보내고 나를 극찬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이 되는 건 아니야. 난 그게 부끄러워. 신물이 나.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이 신물이 난다고. 화려한 평판 같은 것을 바라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신물이 나.” (44~45쪽)
‘예수기도문’의 이야기가 담긴 작은 연두색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닐 정도로 그것에 골몰해 있는 프래니는, 레인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그 작은 책의 내용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책은 쉼 없이 기도하라는 성경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 위해 순례를 시작한 러시아 농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시아 농부는 기도문을 외우고 계속 또 외우면, 궁극적으로는 그 기도문이 자율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가치관 전체를 순화하고 삼라만상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면 기도가 심장의 일부가 되어 영혼의 정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인은 이야기를 듣고도 “정말로 그런 걸 믿는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물을 뿐 시큰둥하다. 레인의 반응이 뚱한데도 프래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프래니」가 발표된 당시, [뉴요커]는 역사상 가장 많은 문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어리고 당돌하면서도 삶에 대한 고민에 아파하는 프래니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저벨 아처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데이지 부캐넌이 그들의 시대를 대표하는 만큼이나 프래니도 그녀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시간이 흘렀으나 깨달음의 길을 찾으려 애쓰는 프래니는 여전히 매혹적인 여주인공으로 독자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신을 위해 연기하고, 신의 배우가 되어라!”
주이의 따뜻한 조언들
[뉴욕 리뷰 오브 북스]가 “분명 샐린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한 「주이」는 프래니와 레인의 데이트가 있었던 주말이 지난 월요일, 뉴욕의 글래스 가족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장의 첫머리에서 글래스 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간단하게 소개된다. 글래스가의 칠 남매는 [지혜로운 어린이]라는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던 어린이 스타였다. 칠 남매의 맏이인 시모어는 칠 년 전 자살했고, 그의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는 여전히 가족들을 맴돌고 있다. 이 장의 주인공이자 프래니의 오빠 주이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고 있는 연기자로, 활동한 지 이제 삼 년 남짓 되었다.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 스타는 아니지만 텔레비전의 젊은 주연으로서 괜찮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이는 신경쇠약에 빠진 듯 누워서 울고만 있는 프래니가 몹시 걱정된다. 둘은 인생과 종교에 관한 긴 토론을 하기 시작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프래니와 주이가 남매의 첫째와 둘째인 버디와 시모어에게서 여러 가지 동서양 종교가 혼합된 가르침을 전수받으며 자랐다는 것이 드러난다. 같은 교육을 받았고 같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기에, 주이는 프래니가 어떤 감정적 격동을 겪고 있는지 이해한다. 그렇기에 주이는 프래니에게 “너는 왜 그렇게 허물어져버린 건데? 그렇게 힘껏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면 왜 그 힘을 자신을 제대로 열심히 지탱하는 데 쓰지 못하는 거냐고!” 하고 물으며 감정적 혼란의 에너지를, 역으로 자신을 곧추세우는 데 쓸 수 있지 않느냐고 지적한다. 그리고 프래니의 비판과 불평이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 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얄팍하게 훑어보기만 한 후에 감정적으로 뱉어낸 개인적인 차원의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주이는 프래니가 예수기도문에 집착하는 이유도 예리하게 꿰뚫어본다. 그녀가 일상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대신 기도에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프래니처럼 총명한 여대생이, 그저 드러누워 예수기도문을 외우며 신에게 훈훈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줄, 작고 신비한 경험을 내려달라고 빌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이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프래니의 믿음에 대한 열의가 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바로 프래니가 진정한 재능을 보이는 연기에 헌신하는 것이다. 믿음을 실천하는 행위는 일상과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인 일은, 연기야. 원한다면, 신을 위해 연기하고, 원한다면 신의 배우가 되어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또 있겠어? 원한다면, 적어도 노력은 해봐. 노력하는 건 괜찮잖아.” (249쪽)
주이는 프래니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영성이 다른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가장 평범한 부분에 있음을, 어머니가 딸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끓여낸 따끈한 닭고기 수프 한 그릇에 있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적어도 배우라면 당연히 연기를 해야 한다”며 프래니가 배우로서의 삶을 계속해나가도록 격려하고, ‘뚱뚱한 여자’로 대변되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무대에 서는 것이 프래니가 그토록 바라던 지혜를 얻는 길임을 말한다. 주이의 말을 들은 프래니는 커다란 환희를 느끼고, 오랜만에 편안하고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는 것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젊은이들의 치열한 여정!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양철학과 원시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금보다 훨씬 절박하고 리얼한 존재성을 띠었고, 비트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였다. 이러한 종교성은 반물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며 압도적 번영을 반성 없이 향유하던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차갑고 경직된 아카데미즘이나 상상력이 모자란 획일적 미디어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또한 제2차세계대전에 병사로 종군하며 격전지를 헤쳐온 샐린저가 짊어지게 된 깊은 트라우마의 절실한 위안 수단이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말하고자 했던 영성은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일반적인 ‘신을 원하는 심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샐린저의 메시지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과 거만한 기성세대에 절망하기 쉽고, 허세와 자기 포장이 먹혀드는 광경과 인간성이 무너져내리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어떤 이들은 기만적인 세상과 타협할지, 아니면 아예 등을 돌려버릴지 극단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누군가는 믿음에 대해,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해 『프래니와 주이』는 비관할 거리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길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끝없는 여정에 두려움 없이 나서는 데에 있다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