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후 생각나는 이야기들
그 무서운 전쟁이 일어 난지 벌써 65년이 된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결재을 득하고
저지른 악마의 노름. 볼테르는 말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가장 나쁜 자이다.”
핵무기룰 들고 또다시 전쟁을 위협하는
북한에 정말 잘 대응해야겠는데
안보 불감증(不感症)이 심해져서 큰일이났다.
생후 1년 된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것은
안보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화장(化粧).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는 룸 쌀롱,
노래방, 유리방, 호스트 빠, 뽀뽀방, 전화방.
일 안하고 혈세를 빨아 먹는 국회의원들,
업자들의 술 접대를 받고 위층에서 성희를 즐기던
고급 공무원들 그리고 무죄!
이런 것들이 안보의식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이다.
지금부터라도 허리띠 조이고
한 손에 안보, 다른 손으로는 건설!”
하면서 한 번 더 나아가야 겠다.
1. 20만이 넘는다는 전쟁미망인들
망자를 미처 따라가고 있지 못한다는 뜻의 미망인(未亡人)들.
아이들 때문에 갈 수도 없고 아이들 먹여 살리려고 two jobs 까지 마다않던 서러운 미 망인들, 하다하다 안 되면 미군기지 촌에 들어가 외화(外貨) 벌이 했었다.
6.25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들. 나머지 일생을 어떻게들 살아갔나?
2. 십대의 하우스 보이(house boy)
고아들이나 극빈자 아이들이 선호했던 최상의 직장.
미군 개개인의 어린 하인이 되어 미군의 구두닦이, 세탁하기, 청소하기 등
월급은 없어도 세끼 먹여주기만 해도 너무나 황송.
끼니마다 “Made in U.SA."이었으니까.
그 얼굴 뽀얗고 군복을 줄여 입은 윤기 나는 미군 점퍼,
밝은 얼굴들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하우스보이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김장환 목사
유명한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님은 임종덕 박사와 수원 비행자에서 함께 하우스보이를 했다. 김목사가 하우스 보이 1호 유학생이고 2호가 임종덕 박사다.
신호범씨
워싱턴 주 상원의원으로 2회 연속 선출되다.
임종덕 박사
하바드대 정치학 박사 특히 임박사는 12살 서울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인민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거지가 되어 미군 가방을 흠치다 들켰으나 동 경에서 막 도착한 미 5공군 사령관의 하우스 보이가 되어 나중에는 그 분의
양 아들이 되어 하바드대 박사가 되었다. 육군 대령으로 백악관에서 안보 담당 보좌관 으로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을 보좌하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14살의 임종덕은 미5공군 사령관 화이트 중장의 하우스보이가 되기 전 거지 왕초노릇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수칙을 지키게 했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14살의 임종덕은 서울 중학교 학생답게 동굴 고아원을 이렇게 재미있게 운영 하며 129명이나 되는 고아를 먹여 살렸으니 저 수칙을 읽으면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난다.
3. 전쟁노래
전쟁전후 전쟁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와 어머님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한 주옥같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우야 잘 가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꿈에 본 내고항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삼팔선의 봄, 병원선, 추억의 40계단, 타양일기 등
여기서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일절만 소개한다.
마치 흥남부두 철수 때 LST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온
오빠가 동생 금순이와 흥남 부두에서 헤어지고
애 타게 동생을 찾는 장면이 눈에 선한다.
흥남부두에서 놓쳐버린 이산가족이 실제로 상당하다고 하였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4. 판자촌
월남 피난민이 6.25전에 약 백사십만, 1.4후퇴때 또 백만 이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1.4 후퇴 때 서울사람들과 함께 대부분 부산으로 몰렸다.
부산의 용두산 영도의 영선동 언덕 서면의 산 허리 초량동 언덕배기 산이고 평지 고 틈이 있으면 널빤지, 양철, 플라스틱판 조각, 나무 판대기로 집을 짓고 또 지었 다. 공동 화장실 공동 수도가 수 십 미터 아래에 있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 다. 그래도 이런 빈민굴에서 교수도, 의사도, 동장도, 선장도, 장사꾼도 , 목사도, 사장도, 절도범도, 사기꾼도, 쓰리 꾼도, 강도도 나왔다.
5. 자유부인
소설가 정비석이 쓴 소설로 대학교수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외간남자와
호텔까지 갔다가 정신이 돌아와서 몸도 허락하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얘 기로 지금 같으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그 때만해도 퇴폐적이고 음란하다 하여 이승만의 지시로 작가는 특무대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는데 당시 고문 관들은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을 퇴폐화 시키려고 쓴 것 아니냐는 기맥힌 심문 을 하였다 한다. 이 소설은 판금되어 해제될 때 까지 4.19 올 때를 기다려야했다.
6. 춤꾼 박인수 사건
예비역 해군 대위인 박은 당시 춤의 명수였다. 70여명이나 되는 처녀와 관계하였 다. 당시 유명한 E대생, 고위층 딸들이 많았다 한다. 구속사유는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었지만 박인수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혼인을 하자고 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여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고 하였다.
자기가 접촉한 여인 중 처녀는 단 한 명, 미용사였다고 하였다.
1심 법원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며 무 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 됐다. 이 판결의 결과를 보면 당시 판사들의 성 의식이 얼마니 보수적 이었는 알 수 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 혼인빙자 간음죄도 간통죄도 없어지고 보니 이제는 동성연애자들이 동성결혼을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동성간에 벌리는 성희는 변태다. 이들을 모두 정신병원에 보내야 할 바퀴벌레이다.
7. 중석불(重石弗) 사건
1952년 6월 이승만 정권은 중석을 수출한 대금인 달러를 민간기업에 헐값에 팔아 이 민간기업은 그 달러를 가지고 비료와 밀가루를 들여와서 농민에게 시세의 최 대 10배를 받고 폭리를 취했던 사건이다. 이 이익의 상당한 부분은 정치자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前線에서는 건곤일척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이렇게 파렴치 한 일들을 서슴치않고 벌리고 있었다. 이 범죄에 관련된 장관 공무원 업자 들 전원 무죄 방면되었다. 정치자금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한 뇌물을 먹은 사람이나 뇌물을 준 사람들 어쩌면 지금과 그대로인가? 역사는 전진해도 뇌물은 그대로다(?)
8. 국민 방위군 사건
1951년 1.4 후퇴때 약 50만의 청년들이 서울에 모여 부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옷, 신발, 식사, 무기 아무것도 지급하지 아니하고 걸어서 부산까지 가게 한 사건이다. 국민 방위군 설립 취지는 일선에서 소모되는 국군에 대한 보충병 원활히 공급하기 위합이었다. 그 추운 알 겨울 가다가 아사하고 동사하고 병사하여 약 5만명을 잃었다. 이 마을 저마을 몰려다니며 구걸하던 그 분들이 눈에 선하다. 1951년 봄에서야 이 사실이 국회에 알려져 신성모 국방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본 사건의 수사가 방해 받는 것을 보고 이 시영 부통령이 사퇴하였다. 군 경험이 전무한 대한 청년단장 김윤근이란 자가 별을 달고 사령관 노릇을 하고 그 밑에 윤익헌(경성고보 중태/황포군관학교 졸업)과 그리고 민간인 출신 간부로 채우고 당초에는 반도 남쪽에 51개의 훈련소를 세우려고 했으나 훈련소는 물론 장병들의 식비, 생활용품 비를 몽땅 착복하고 장병들은 거지처럼 몰려다니다 병들어 죽었다. 굶주린 병사들은 잔치집, 굿 판을 습격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이어 국회는 “제2 국민역 비상대책 위원회”를 설치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신성모와 김윤근은 콧웃음 치며 “빨갱이 짓이다.”라고 딴소리 했다. 윤보선 조병옥등이 이승만을 찾아가 진상을 설명하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거창 양민 학살건도 그렇고 이번 건도 모두 공비가 한 것이라고 동문서답한다. 더욱이 국민 방위군 사건을 부추키는 자들은 모조리 공비라고 하니까 윤보선이 무슨 증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냐고 심하게 달려들었다. 정부는 곧 공비의 루머라고 발표했다. 3개월 동안 방위군 간부들은 무려 50억원이나 착복했다. 1952년 4월 국회는 국민 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관련된 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 되었다. 1차 공판에서는 김윤근 무죄, 윤익현 3년 6월. 이 결과에 대해 국민이 봉기할 태세가 되니 그해 7월19일 2차 공판에서는 김윤근등 5명은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되었다. 그들의 생전에 국회의원에게로 흘러 들어간 정치자금 내역을 밝히라고 대학교수들 야당인사들이 요구하였으니 죽은 자들은 말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갔다. 마치 성완종이 죽어서 말이 없으니까 결정적인 증거가 들어나도 모두 소용이 없는 것 같이.
아무리 필요해도 아무리 정당해도 전쟁이 범죄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 어네스트 헤밍웨이-
첫댓글 비록 60여년이 훨씬 지난 사건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 되는군.
1.4후퇴 부산피난시절 마치 거지꼴로 나타나신 방위군 출신 아버지,
소설가 정비석님의 자유부인 영화 유행, 박인수의 여자춤바람 사건,
국민 방위군 착복 사건...등등
헤아릴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던 시기였지요.
하우스보이 1호 유학생은 부산에 있는 장환이가 아니겠죠?...ㅎㅎㅎ
현인의 굳세여라 금순아를 답글로 뒤에 담았습니다.
다시는 전생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국가자가 한국에 와보고
'거지소굴 이라고 했답니다. 부산에 있는 김장환 교수가 아니고 영어를 참으로 잘하는 김장환 목사입니다.
반총장보다 박대통령보다 훨싼 잘 하는데 이번의 하우스보이 얘기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 . . 나는 6.25 때 어려서 뚝섬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되겠다는 데 동감합니다.
6.28일날 서울역에 나가니 인민군 탱크가 줄지어 들어오는데 3학년 짜리 내가 기분이 많이 상하더라고요.
1947년 이북에서 월남했는데 그 때도 이북에서는 먹을 것이 없었어요. 빨갱이가 있는 곳에는 굶주림이
있지요. 역시 석달동안 먹는 것이 없어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전쟁이 난지 65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휴전은 계속되면서 서로간의 적대감은 줄지가 읺으니
왜 같은 민족끼리 이처럼 원수가 되어 으르렁거려야 되는지, 참으로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지금이 상당히 위험한 것 같습니다. 똘똘 뭉쳐서 대응해도 어려운데 이건 해 쳐먹고 싸움질 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이러다가 무슨 일 나면 미국이 와서 또 구해 줄 까요? 이북 아이들이 원자탄을 갖고 있어 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