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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고택과 김정희(金正喜)
2014. 5. 3
추사 고택 위치도
추사(秋史) 고택(古宅)이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忠淸南道 禮山郡 新巖面 龍宮里)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동산 아래쪽으로 규모를 갖춘 기와집채가 보인다. 그 곳이 바로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 앞에 펼쳐진 넓은 예당평야(禮唐平野)가 한눈에 들어온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曾祖父)이며, 영조대왕(英祖大王)의 부마(駙馬)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명당설을 뒷받침하는지 추사의 위대성을 뒷받침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가 태어날 때 집 뒤뜰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 버리고 뒷산인 팔봉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도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추사는 어머니 뱃속에서 스물넉 달 만에야 태어났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주변에는 김정희의 초배(初配)인 한산이씨 묘와 계배(繼配)인 예안이씨 묘, 삼위를 합장한 추사 김정희의 묘,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 묘와 정려문(旌閭門), 백송(白松), 추사선생 집안의 원찰(願刹)이며 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華巖寺), 등 추사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다.
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華巖寺)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 묘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정려문(旌閭門)
추사고택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안채,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본래 곳간채가 더 있었다. 또 대문채와 사당채도 1977년에 집을 복원할 때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렸기 때문에 변형도 꽤 심하게 되었단다. 말끔히 수리하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먼저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서니 남향을 한 ‘ㄱ’ 자형의 사랑채가 보인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사대부의 가택 개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이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 데 긴요하게 쓰였을 것이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를 새겨진 돌기둥은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가 보인다. 실학사상(實學思想)을 받아들인 김정희의 생각이 나타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글씨는 추사 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刻字)한 것이다.
추사(秋史)고택의 사랑채
사랑채 앞의 해시계 석년(石年)
추사(秋史)고택의 문간채, 사랑채, 안채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夾門), 광 등을 갖춘 ‘ㅁ’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튓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 있는 대청은 6칸으로 그리 흔하지 않는 규모이다. 이러한 ‘ㅁ’ 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 형이다.
추사(秋史)고택의 안채 1
추사(秋史)고택의 안채 2
안채의 봉창
비나 햇볕을 막기위한 안채의 눈썹지붕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는 누구나 알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韓末)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창한 경학자(經學者)이기도 하며 불교학(佛敎學)에도 조예(造詣)가 깊다. 그는 경주(慶州) 김씨(金氏) 집안에서 정조(正祖)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그는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황을 지냈다. 말년에 생부 노경(魯敬)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果川)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10일(철종 7년)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舊文化) 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신문화(新文化)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기도 하다.
추사선생이 화암사 뒤 석벽에 새긴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암각문
선생은 북학파(北學派)의 거벽(巨擘)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에는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고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추사선생이 화암사 뒤 석벽에 새긴 시경(詩境) 암각문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詩), 서(書), 화(畵), 전각(篆刻) 등 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獨自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至高)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이 있다.
추사 영정(秋史 影幀)
추사의 작품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김정희 하면 추사체, 난 그림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추사 생가에 와서 <세한도(歲寒圖)>를 보면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 책에서 <새한도>는 대했지만 세한도에 숨겨져 있는 김정희의 생각과 제자 이상적(李尙迪)에 대한 얽힌 이야기는 전연 몰랐다.
문화해설사의 말을 빌리면 <세한도>는 ‘겨울이 온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안다“. 라는 글과 함께 초라하고 엉성한 초가집이 한 채 있고, 그 양쪽 옆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네그루 있는 그림, 역관인 이상적은 중국 사신으로 갈 때 마다 최신의 서적을 구해다가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스승과 제자사이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한 번은 연경(북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이란 귀한 책을 구해서 김정희가 있는 먼 제주도까지 보내 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은 권력 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 되었을 텐데, 제자 이상적은 바다 멀리 유배(流配)되어 아무 힘도 없는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책을 받은 김정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뭉클한 감정에 눈물을 짓게 된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논어(論語)에 나오는 글귀의 이미지를 빌어서 세한도를 그렸다. 즉 논어에 나온 구절은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이다. 즉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는 의미이다. 공자(孔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 자신도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된 신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상적의 뒤를 봐 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으로 보답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김정희는 붓을 들어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광창(光窓) 하나 그려진 조그한한 초가집 하나, 앙상한 고목(枯木)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댄 소나무와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김정희는 또 다른 종이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이상적의 의리를 칭찬하며 겨울에도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는 내용 이였다. 그림을 마치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썼다. 즉 ”이상적 감상하게나.“ 라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즉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藕船)!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세한도(歲寒圖)
백송(白松)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묘
세한도의 발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반포서생 블로그에서 인용)-
松柏是毌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 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悲夫.
阮堂老人書
세한도 발문
지난해에 晩學 大雲 두 책을 부쳐오고
금년에는 또 藕畊文編이라는 글을 부쳐오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으로
여러해 걸려서 얻은 것이라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도도함이
오직 권세와 이익을 추향해 일삼는데
마음을 쓰고 힘을 씀이 이 같이 하고
권리로 돌아가지 않고
이에 바다 밖의 한 초췌히 매마른 사람에게 돌아옴이
세상의 권리를 추향하는 자 같다.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리로 합한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 진다했는데
君도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의 하나로
그 초연히 도도한 권리밖에 스스로 뽑아나니
권리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솔과 잣의 나중에 시듬을 안다 하였으니
송백은 사계절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 이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일컫고(칭찬)
지금 君의 나에 대함이 전부터도 더한 것이 없었고
이후로 말미암아도 덜한 것이 없다
그러니 이전부터 말미암던 君을 일컬을 것이 없어도
이후로 말미암는 君은 또한 성인이 말한 것에 가히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성인이 특히 일컬은 것은
단지 나중에 시드는 貞操와 굳센 절개됨만 아니라
또한 歲寒의 때에 느껴 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호! 서한의 순박한 두터운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어짐으로도 賓客이 더불어 盛하고 衰하고
하비 방문 같은 것은 박절한 것의 극이로다. 슬프다.
완당 (추사 김정희) 노인 쓰다.
이렇게 그려진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달되었고 이상적은 중국 연경으로 사신으로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지고 갔었다. 이상적의 중국 친구 16명은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하고 김정희의 처지를 안타가워 하는 제찬(題贊)을 써주었다. <세한도>에 담겨진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한 김정희의 마음을 형상화(形象化)한 것이다. 김정희를 감동시킨 의리와 절개는 조선시대 선비의 핏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와 절개(節槪)를 표현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후 평양감사를 지낸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에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 민규식이 완당연구가인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에게 팔아넘겨 졌다.
후지즈카 치카시는 일제강점기 때 추사연구를 개척한 사람으로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로서 추사 김정희에 대한 매력에 빠져들면서 그에 연구로 전공을 바꾸게 되는데, 그는 중국과 한국에서 추사관련 자료를 수집한 700여점의 서찰과 관련서적 수천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세계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손재형(孫在馨)은 후지즈카가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갈까 봐 그를 찾아가 원하는 값을 모두 쳐드리겠다며 <세한도>를 양도해 줄 것을 청하나 후지즈카는 완당을 존경하며 그림을 고이 간직하겠다고 거절한다.
1944년 세계제2차대전 말기 후지즈카도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패전 뒤를 생각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손재형은 도쿄 후지즈카 집에 까지 찾아가서 세한도 달라고 졸라대는데, 두 달간 매일 찾아간다. 이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이는 바로 손재형이라며 <세한도>를 넘겨주는데, 선비가 아끼는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며 무상으로 넘겨준다, 손재형이 수장한 <세한도>는 이근태, 손세기의 손을 거쳐 지금은 손세기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후지즈카 치카시의 아들인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아버지가 수집한 1만 5000여점의 추사의 유품을 과천추사박물관에 기증하여, 특별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백송공원
추사기념관
충남 예산지역의 답사를 마치고
김기현, 권오규, 류진환, 오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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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네 몸살은 다 나았는가? 역시 자네다운 해설일세 덕택에 공부 잘 하였네.
덕분에 감기 몸살이 서서히 숨어들어가는 것 같네.
걱정해 주어서 고맙네!!
명품 답사기에 멋진 친구들, 부럽고 반갑네그려.
언제 뭉칠때 나도 한번 끼워주시게나...
이학장 !
반갑네!
기회가 닿으면 함께 가도록 하세.
* 참조 : 서울소식 32쪽 : 945-949(2012년 4월 9일)
밥계」서해안 부부동반 여행하다 - 秋史 金正喜 先生 古宅
세삼스럽게 공부했네요. 역시 전문기자가 쓴 답사기는 다르단 말이여. 답사동행한 4사람 모두 청년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