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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thical Cultivation 윤리적 수양(계발?)
The question of how emotions can change leads to the last of our five themes: ethical cultivation. Kongzi hoped to improve society by putting virtuous people into positions of authority, but he was well aware of how rare true Virtue is. Consequently, he pioneered educational techniques for making people not just more skillful or more knowledgeable, but more benevolent, wise, and reverent.3 Kongzi’s general philosophy of education is summed up in a pithy quotation: “If you learn without thinking about what you have learned, you will be lost. If you think without learning, however, you will fall into danger” (2.15). Much of the lively debate among Confucians over the twenty-five hundred years after Kongzi’s death concerned the comparative emphasis one should give to “thinking” and “learning” in ethical cultivation, and what human nature must be like to justify this emphasis.
감정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다섯 주제 중 마지막, 윤리적 수양으로 이끈다. 공자는 덕있는 인물이 권위있는 자리에 앉아서 사회를 발전시키기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진실한 덕이 얼마나 드문 지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교육 기법을 창안했다. 사람들을 그저 더 교활하거나 더 지식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인하고 현명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공자의 일반적인 교육 철학은 함축적인 인용문으로 요약된다. “만약 배우는 것에 대해 생각없이 배운다면 잃어버릴 것이다. 배움없이 생각만 한다면, 위험이 빠질 것이다.” [學而不思 則罔 思而不學 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 사후 250년 넘게 벌어진 유학자들 사이의 생생한 많은 토론은 윤리적 수양에서 “생각하기”와 “배우기”에 전념해야 하는 비교 강조와 인간의 본성이 이 강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떠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Learning,” broadly speaking, is internalizing the actions, thoughts, and
feelings of those who are virtuous, especially sages. If we are fortunate,
these can be people we have actually encountered, but they can also be people
we learn about through classic texts. The Odes seems to have been the primary
classic text for Kongzi. This anthology of poetry was already quite old by
Kongzi’s time and is diverse in content, including poems about love, war,
farming, major dynastic events, religious ceremonies, and lamentations. We
begin to understand its role in ethical cultivation if we consider the very
first ode. It is about an impending marriage, and Kongzi praised it on the
grounds that it “expresses joy without becoming licentious, and expresses
sorrow without falling into excessive pathos” (3.20). When we read the ode, we
are drawn into the perspective of the poem and led to see (and to feel about)
marriage a certain way. We see it as something happy and sensual but not
frivolous or purely sexual. We sympathize with the natural longing of the
lovers but not in a way that is self-indulgently lugubrious.
“배우기”는 넓게 말하자면 덕있는 사람, 특히 현자의 행동, 사고, 느낌들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 들은 우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은 고전 문건을 통해 배우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시경은 공자에 대한 주요한 고전 문건이었던 것 같다. 이 시 선집은 공자 시대에도 이미 아주 오래됐고 내용도 다양해서 사랑, 전쟁, 농사, 왕조의 주요 사건, 종교 의식, 애도의 시가 수록돼 있다. 맨 첫 송시(頌詩)를 숙고해보면 윤리적 수양 측면에서 이 책의 역할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임박한 결혼에 관한 것이고 공자는 이 문구를 근거로 찬양했다. “음탕하지 않게 기쁨을 표현하고, 과도하게 비애에 빠지지 않고 슬픔을 표현했다.”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겁지만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 시를 읽으면, 시의 관점으로 이끌리게 되고 결혼을 특별한 길로 보게(그리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고 감각적인, 그러나 시시하거나 단순히 관능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본다. 우리는 연인의 자연스러운 갈망에 공감하지만 제멋대로 슬퍼하는 방식에는 그렇지 않다.
Other odes are more political in nature, such as that of the peasants who complain of over taxation by singing of their ruler, “Big rat, big rat, / Do not gobble our millet! / Three years we have slaved for you, / Yet you take no notice of us.”vi As someone who was raised in poverty, Kongzi no doubt wanted his students to learn to sympathize with the plight of farmers whose produce was the ultimate source of their salaries.
다른 시들은 사실상 더 정치적이다. 군주에 대해 노래하며 과도한 세금에 대해 불평하는 소작농의 시를 보라. “큰 쥐야, 큰 쥐야. / 우리 기장을 처먹지 마라! 3년간 노예짓 했는데,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네.” [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마라. 삼 년 이나 섬겼건만 나를 아니 돌보는가.] 가난하게 자란 사람으로서, 공자는 당연히 제자들이 농부들의 노고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기 원했다. 농부들의 생산은 그들 봉급의 궁극적인 원천이었다.
Kongzi summarized his approach to the Odes by saying that they “number several hundred, and yet can be judged with a single phrase: ‘Oh, they will not lead you astray’” (2.2)[思無邪]. In other words, the Odes ultimately are a guide to not swerving from the Way. This passage also illustrates Kongzi’s fondness for seeing multiple layers of meaning in a poem. The phrase “Oh, they will not lead you astray” is a quotation from the Odes, and in its original context it refers to a team of stout, reliable horses that will not go off the path. However, Kongzi used it as an ethical metaphor (cf 1.15 and 3.8). Some scholars think this shows that Kongzi did not care about the meaning of the Odes themselves, that they were simply a pretext for expressing his own views. However, many ethical traditions believe that the metaphorical sense of the classics is part of their meaning. Augustine, for example, gave an elaborate metaphorical reading of the creation story in Genesis and saw it as part of God’s meaning.
공자는 시경에 대한 그의 관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시들은 “수 백 개에 이르지만 한 구절로 결정될 수 있다. ‘아, 읽는 이를 타락시키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경은 궁극적으로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길잡이다. 이 시구는 또한 공자가 시에서 의미의 다층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 ‘아, 읽는 이를 타락시키지 않을 것이다.’는 시경에서 인용되었고, 원문에서는 길을 벗어나지 않을 튼튼하고 믿음직한 말떼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이것을 윤리적 은유로 사용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공자가 시경 자체의 의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단지 그의 개인 의견을 표현하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윤리적 전통에서는 그 고전의 은유적 감각은 시의 의미의 일부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정교한 은유적 해석을 주었고 그것을 신의 뜻의 일부로 보았다.
Literature can also teach us to perceive and think about ethical matters in a more profound way. As Iris Murdoch said, “By opening our eyes we do not necessarily see what confronts us. We are anxiety-ridden animals. Our minds are continually active, fabricating an anxious, usually self-preoccupied, often falsifying veil, which partially conceals the world. … It is a task to come to see the world as it is.”vii Trained as a philosopher, Murdoch became a novelist because she felt that imaginative literature often does a better job of helping us with this “task.” The later Confucian Mengzi illustrates such a use of literature when one of his disciples cites an ode that says one must inform one’s parents when getting married, and then asks why Sage-King Shun did not follow this injunction (Mengzi 5A2).
문학은 또한 우리가 윤리적 문제에 대해 보다 심오하게 인식하고 생각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아이리스 머독이 말한 것처럼 “눈을 뜨고 있다고 반드시 앞에 있는 걸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걱정에 사로잡힌 동물이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활동하고,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고, 대개는 스스로 걱정에 빠져 있고, 자주 거짓 핑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편파적으로 세상을 숨긴다. …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러 나오는 것은 고역이다.” 철학자로서 훈련된 머독은 소설가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상상의 문학이 종종 이 “고역”을 하도록 우리를 돕는 일을 더 잘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후대의 유학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문학의 효용을 나타냈다. 한 제자가 어떤 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에게 알려야만 한다는 시를 인용하고 나서 물었다. 왜 현군이라는 순임금은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지.
Mengzi explains why Shun’s abusive parents made his failure to inform them of his marriage a legitimate exception to the rule. This simple case shows how the Odes and the stories of the sages can help us to think more deeply about complex ethical situations. Examples abound in other traditions as well, including the fervent discussions in the Indian tradition of whether, in the Ramayana, King Rama treated Queen Sita fairly in banishing her. This kind of learning is possible because great literature consists not just of entertaining stories, but of narratives about complex people wrestling with difficult issues central to human life. To grapple with these issues is to grapple with our own existence.
맹자는 왜 순임금의 몹쓸 부모로 인해 그의 결혼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은, 규율에 합법적 예외를 만들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이 간단한 사례는 어떻게 시경과 현자의 이야기가 복잡한 윤리적 상황에 대해 보다 깊게 생각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른 전통에서도 사례는 충분하다. 라마야나에서 라마왕이 시타 왕비를 쫓아냈을 때 정당하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인도 전통에서의 격렬한 토론도 있다. 이런 종류의 배움은 가능한 것은 위대한 문학은 단지 재미있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인생의 중심적인 난제와 씨름하는 복잡한 인간들에 대한 서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과 맞붙어 싸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와 싸우는 것이다.
Of course, Kongzi was also aware of the practical value of a good education for people who want to take part in public life. Being well read, eloquent in expression, and a careful reader are skills that are immensely useful and highly sought after in every literate society. Confucian learning was, therefore, something like a liberal arts education. It did not train one for any one particular task: as Kongzi put it, “The gentleman is not a vessel,” meaning he is not a specialist good at only one thing (2.12; cf 9.6, 13.4, and 19.7). Rather, the gentleman has general skills that can be applied to a variety of activities. However, in Kongzi’s society, as in our own, some were critical of the value of such a literary education, because it requires a great investment of time without providing training in any particular craft. So we can understand why Kongzi said, “It is not easy to find someone who is able to learn for even the space of three years without a thought given to official salary” (8.12; cf 9.2, 12.8).
물론 공자도 공직에 나서길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교육의 실용적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박식하고, 표현이 유창하고, 신중한 독자가 되는 것은 모든 인문 사회에서 너무나 쓸모있고 매우 수요가 많은 기술이다. 유학은 그래서 교양과목 수업과 비슷한 것이다. 특정 업무를 위해 누군가를 훈련시키는 게 아니었다. 공자가 쓴 것처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이 의미는 그는 오직 한가지 일만 잘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군자는 여러 활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사회에서는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일부는 그러한 인문 교육의 가치에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특정 직업에 대한 훈련도 없이 막대한 시간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왜 공자가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단 3년만이라도 녹봉에 대한 고민 없이 배울 수 있는 자를 찾기 쉽지 않다.”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삼년을 배우고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이를 얻기가 쉽지 않다]
We have been examining Kongzi’s view of learning, but thinking is necessary for every aspect of learning. Kongzi himself never encouraged rote memorization or mindless repetition. If one learns in this way, one will be “lost” (2.15), knowing only a jumble of confused and undigested bits of trivia. As the later Confucian Xunzi put it, “The learning of the petty person enters through his ears and passes out his mouth. From mouth to ears is only four inches—how could it be enough to improve a whole body much larger than that?” (Xunzi 1; Readings, p. 259). Kongzi was therefore very demanding of his students:
우리는 공자의 배움에 대한 견해을 검토해왔지만 생각하기는 모든 배움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공자 자신은 결코 기계적인 암기나 영혼없는 반복을 독려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이런 식으로 배우면, 그는 “잃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소화되지 않은 잡동사니의 범벅만 알뿐이다. 후대 유학자 순자가 쓴 것처럼 “소인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온다. 입에서 귀까지는 겨우 4인치다. 그 보다 훨씬 큰 몸 전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어떻게 충분히 가능하겠는가?” [小人之學也(소인지학야), 入乎耳(입호이), 出乎口(출호구),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가는데, 口耳之閒則四寸(구이지한즉사촌), 입과 귀의 사이는 네 치인데, 曷足以美七尺之軀哉(갈족이미칠척지구재). 어떻게 일곱 자나 되는 몸체를 아름답게 할 것인가?] 공자는 그래서 제자들에게 요구가 많았다.
I will not open the door for a mind that is not already striving to understand, nor will I provide words to a tongue that is not already struggling to speak. If I hold up one corner of a problem, and the student cannot come back to me with the other three, I will not attempt to instruct him again. (7.8)
나는 이해하려고 이미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 않는 정신에게는 문을 열지 않을 것이고, 말하려고 이미 열심히 애쓰지 않는 혀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문제의 한 귀퉁이를 지지하고 있는데 학생이 나머지 세 개를 갖고 내게 오지 못한다면, 나는 그를 다시는 지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마음속으로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도 남은 세 귀퉁이를 가지고 반응해 오지 않으면 다시 더 가르쳐 주지 않는다.]
At the same time, Kongzi believed that unless thinking works upon what one has already internalized via learning, one will “fall into danger” (2.15). Why? This relates to a point we discussed earlier: Kongzi’s emphasis upon tradition. If our thinking has any content to begin with, it frames that content in terms of the language, concepts,
values, and paradigms that we have inherited from our culture. If our understanding of that cultural tradition is shallow, then our thinking will also be shallow. Thus, from an authentic Confucian perspective, the thoughtless conservative and the unrealistic radical are really just the flip sides of the same coin: someone who mouths slogans he does not understand, and rejects positions he does not fully appreciate. The true Confucian gentleman learns deeply, always thinking about what he has learned, and applies it in his life and in trying to change the world for the better.
동시에, 공자는 배움을 통해 이미 내재화한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고? 앞서 논의했던 요점과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에 대한 공자의 강조이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시작할 내용이 생긴다면, 생각은 우리가 문화로부터 상속받은 언어, 개념, 가치,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그 내용을 구조화한다. 만약 그 문화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얕다면, 우리의 생각 역시 얕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 유교적 관점에서, 생각없는 보수주의자와 비현실적인 급진주의자는 실상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구호를 입에 올리는 자, 그리고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입장을 거부하는 자인 것이다. 진정한 유교적 군자는 깊이 배우고, 늘 배운 바에 대해 생각하고, 삶에서 적용하고, 세상을 더 낫게 바꾸는데 적용한다.
What are some of the other characteristics of the Confucian gentleman? And how does the emphasis upon producing a morally exemplary person make Confucianism a form of virtue ethics? To these questions we turn in the next chapter.
유교적 군자의 다른 특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리고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을 만드는 데 대한 강조는 유교를 어떻게 덕 윤리학의 형태로 만드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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