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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중국 베이징여행 ③ : 명·청시대의 찬란했던 문화가 만들어낸 황제의 집, 자금성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327 17.01.18 03: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자금성(紫禁城)


특징 :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宮闕)'자금(紫禁)'이라는 이름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궁궐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인데, 192510월 고궁 박물원(故?博物院)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였는데, 전국에서 건축 재료를 모아 오는 데만도 12년이 걸렸고, 3년에 걸쳐 약 50만 명의 인부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동서로 750미터, 남북으로 960미터 길이에 총면적이 72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또한 10미터 높이의 성곽과 깊이 6미터, 너비 52미터의 해자가 있어 성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자금성에는 무려 9,999(원래는 8,886개인데 좀 더 그럴싸한 숫자인 9999개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의 방이 있다고 한다. 갓 태어난 황제의 아들이 매일 방을 바꾸어 가며 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가 놀라울 따름이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으로 가는 길에 천안문(天安門)이 보인다. 천안문의 뒤편에 자금성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안문을 자금성의 정문(正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천안문은 황성(皇城) 내성(內城)의 남문(南門)일 따름이고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다.



 


가는 길에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을 지나게 된다.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청 시대에 황실의 신주를 모신 조묘(祖廟)로 사용된 곳으로, () 나라 때인 1420(영락 18)에 창건되었다. 1788(건륭 53) 전전(前殿)9칸에서 11칸으로, 후전(後殿)5칸에서 9칸으로 증축하고 담장과 문루(門樓) 및 그 밖의 부대시설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1924년 허핑공원(和平公園)으로 조성되었다가 1931년에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관할로 귀속되었다. 195051일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명칭을 바꾸고 농구장과 극장 등을 증축한 뒤로 시민들의 휴식 및 오락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국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어 있다.

 

 


잠시 후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 이른다. 중국어로 우먼이라고 하는데 궁궐 문으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문의 가운데 누각에 황제의 옥좌(玉座)가 마련되어 있는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황제는 이 누각에 올라 포로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마다 이 곳에서 새 역법을 알리고, 군대의 사열식을 지켜보기도 했단다.

 


오문(午門)''자 모양으로 생긴 점이 특이한데, 오문의 좌우측이 성벽으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은 세 개가 있는데, 그중 가운데 문은 황제만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단다. 참고로 오문의 오()는 남쪽 방향을 뜻하는데,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방위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광장과 함께 태화문(太和門)이 나타난다. 자금성 외조(外朝) 궁전의 정문으로 고궁(古宮) 내에서 가장 큰 궁궐문이다. 명 영락년(明永?)에 건축되어 봉천문(奉天門))이라 불리었으며 가경조(嘉靖朝)에 황극문(皇?門))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청의 순치(順治)가 베이징에 들어온 이후 태화문이라 명했다.

 


태화문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금수교(金水橋)를 건너야 한다. 금수교는 활 모양으로 생겼는데, 중앙으로 이동하는 황제를 화살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한다. 금수교 아래에 흐르는 물은 금수하(金水河)라고 한다.



태화문 앞 계단 중앙 대리석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과 구름, 산 등 다양한 상징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로보아 태화문은 황제가 지나가는 통로이고, 신하들과 외국의 사신들은 좌우측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화문(太和門)에서 바라본 오문(午門)의 뒷모습


 

태화문을 지나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태화전(太和殿)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자금성 관람의 하이라이트이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庭)으로 나뉜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 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란다. 외조(外朝)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太和殿),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中和殿), 그리고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保和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태화전이 자금성의 상징으로, 궁궐의 중심 건물이다. 황제의 즉위식이 이 곳에서 거행되었으며, 생일잔치나 중요한 명령 발표, 외국 사신과의 만남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12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길이 64m에 폭이 37m, 그리고 높이가 27m에 이르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될 수 있었단다. 또한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지붕의 기와는 물론 내부까지도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하기 짝이 없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외형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태화전 안의 옥좌(玉座) 위에는 편액(扁額)이 하나 걸려있다. ‘건극수유(建極綏猷)’, 황제는 법도를 세우고 백성이 이를 편안히 여기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보화전에 걸린 황건유극(皇建有極)’과 서경(書經)의 탕고(湯誥)편에 나오는 극수궐유(克綏厥猷)’를 합해서 만든 용어로 보인다. 극수궐유가 나오는 대목은 위대한 상제(上帝)가 아래 백성들에게 치우침 없는 덕을 내려주어 그 떳떳한 성품을 따르게 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르도록 안정되게 이끌어야만 임금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克綏厥猷 惟后)’이다.

 


태화전 앞에 서면 자금성(紫禁城)을 이루는 많은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금성은 명·청 시대에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는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 마다 중국의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과거 중국 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금성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라는 얘기이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황제와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자그마치 5세기가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이제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태화전 아래에는 문무대신(文武大臣)들이 도열하는 널따란 광장이 위치한다. 황제의 즉위식, 황태자의 탄생 축하, 조서의 반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이 태화전(太和殿)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溥儀)'의 즉위식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목조(木造) 건물의 최대 약점은 화재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를 대비해서 궁궐 안에는 금수하(金水河)’라는 인공 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래 사진과 같은 방화용 물을 저장해두는 그릇도 곳곳에다 마련해 두었다. 그 크기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릇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드무또는 두무(頭無)’라고 부른다. 세간(世間)에서 뚜껑 없는 가마솥을 보고 두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자금성의 그릇은 아래에다 부뚜막을 만들어 놓았다. 겨울철에 물이 얼었을 때를 대비한 시설이란다. 또한 이 그릇들에는 칼로 긁힌 자국들이 나있다. 황금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본 침략들이 진짜 금()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긁어본 자국들이란다.

 


태화전의 좌측에 있는 중우문(中右門 : 남쪽을 바라보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우측이다)을 통과하면 오른편으로 2개의 건물이 보인다.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보화전(保和殿)이고,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중화전(中和殿)이다. 태화전을 비롯해 중화전과 보화전은 황제의 공식적 집무공간으로, 자금성의 중심 건물들이다. ‘삼대전(三大殿)’으로도 불린다. 이 삼대전의 이름은 청나라 때 붙인 것으로, 편액 이름에 화목할 ()’자를 넣어 통치철학을 담고 있다. 또한 전각 안에도 각기 국정이념을 담은 편액을 하나씩 걸어놓고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에서 치러지는 국가 주요 행사에 참가하기 전,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고 한다. 중화전에도 역시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다. 진실로 중심을 잡으라는 의미이고, 서경에 나오는 용어다. 중용에도 나온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한 말 하늘이 내린 차례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심을 잡도록 하라에서 유래한다. 훗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는, 이 윤집궐중 앞에 말을 더 보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사람의 마음(욕정에서 나온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의리에서 나온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중정(中正)을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좌측에 보이는 보화전(保和殿)은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라고 한다. 보좌 위쪽에는 '황건유극(皇建有?)'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청의 건륭제가 친히 썼다고 한다.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최고의 법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오직 황제라야 법도나 표준을 정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오로지 크고 작은 전각들뿐이다. 자금성의 건물들은 목조(木造)가 지배적으로 쓰였다. 지붕은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전통적인 왕의 색깔이란다. 궁궐(宮闕)은 다섯 채의 커다란 전당(殿堂)과 열일곱 채의 궁전(宮殿)이 있다. 그 궁전들은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남쪽 구역, '전조'(前朝)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고,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북쪽 구역, '내정'(內廷)이다. ·청대에 걸친 500여 년간 자금성에서는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가장 단명했던 황제는 즉위 29일 만에 사망한 명 광종 태창제이고,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는 청 성조 강희제로 61년 동안 황제의 직을 수행하였다. 궁궐은 국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공간이자 그들의 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궁궐에는 이들 황제 일가에 봉사하는 수천 명의 궁녀와 내시들이 살았다.




자금성을 둘러보는 길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후원(後園)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을까봐 애초부터 심지 않은 것이란다. 그뿐만이 아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도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는 40여 장이나 되는 벽돌들을 겹쳐 쌓았다고 한다. 궁궐의 나무 바닥을 걸을라치면 경쾌한 발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보화전 뒤편으로 보이는 난간이 포토존(Photo Zone)이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첩첩이 쌓여있는 전각(殿閣)들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모양이다. 천자(天子)인 황제가 머물렀던 자금성(紫禁城)의 공간들에는 하나같이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우선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北極星)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금성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물품들이 가득해, 황제들의 생활 모습과 옛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수많은 보석, 서예,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의 벽과 바닥을 장식한 돌조각 하나까지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란다.

 


보화전의 뒤편에는 용이 여의주를 쫓아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정교하게 새긴 길이 16.57m 3.7m 무게 250t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있다. 보화전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는 위롱다스댜오(雲龍大石雕 : 운룡대석조)이다. 이 바위는 50밖의 채석장에서 캐온 것으로, 한겨울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다음 수많은 인부와 말을 동원해 옮겼다고 한다.

 

 

 


보화전의 정 중앙 뒤편으로는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 중앙 아래에 보이는 문이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건청문(乾淸門)이다. 건청문은 황제가 정무를 보던 외조(外朝)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내정(內廷)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건청문을 지나면 황제가 정무 이외에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는 내정이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중축선상에 위치한 3(後三宮)’ 즉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명나라 가청 연간에 준공), 곤녕궁(坤寧宮)이 있다. 3궁의 좌우로는 비빈들이 거처하는 동6궁과 서6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36이다. 내정의 중심 건물은 건청궁이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이자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건청궁은 청나라 옹정 황제가 양심전이란 곳에 새로운 침실을 마련하고 태화전에 이어 보조 직무실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옹정 황제 이후부터 건청궁은 황제의 서재이자 고위 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고, 때론 외국 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이자 연회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의 모습은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 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다. 건청궁 옥좌 뒤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이 액자는 초기 청나라 황제였던 순치 황제가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건청궁 뒤쪽에는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였다. 교태전 역시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옥좌 뒤에는 건륭 황제가 강희 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無爲)’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하지 않았다. 여자들의 한()과 암투(暗鬪)로 절어있는 장소라서 자칫 잘못하다간 귀신이 옮겨 붙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겁박에 넘어간 때문이다. 아무튼 교태전을 둘러본 후에는 어화원으로 향한다. 황제의 비빈(妃嬪)들이 살았다는 전각들도 그냥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잠시 후 역대 황제들의 후원이었던 어화원(御花?)이 나온다. 자금성 내부로 오는 동안 나무와 풀, 그늘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멋진 정원이 나타나니 신기하기만 하다. 어화원은 황제와 황후가 쉬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만든 정원으로 대자연의 다양한 경치를 압축시켜 놓은 곳이다. 자금성의 번영과 멸망을 지켜본 거목과 기괴한 모양의 바위,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정자, 사계절의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만춘정(萬春亭)이다. 아래는 아() 모양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원형이다. 반대편에는 똑 같이 생긴 천추정(千秋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산처럼 쌓인 기암괴석은 퇴수산(堆秀山)이라고 하는데, 거대한 돌들을 가져다가 서로 붙여서 만든 거라고 한다. 퇴수산 위쪽에 있는 정자는 어경정(御景亭)이다. 이곳에서 황제와 황후가 궁 밖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단다.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자금성에 사는 여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퇴수산은 매년 음력 99일에 황제가 죽은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어화원(御花?)을 둘러보고 나면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정문인 오문(午門)과 동문인 동화문(東華門), 그리고 서쪽 문인 서화문(西華門)과 더불어 자금성의 4대문 중 하나이다. 신무문의 원래 이름은 현무문(玄武門)이었다. 풍수지리상의 사상학(四象學)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 따르면 현무가 북쪽 방위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후 청나라 강희 연간에 이르러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휘(避諱·임금의 이름과 글자가 겹치지 않도록 함)하기 위해 신무문(神武門)’이라고 개칭했으며 그 설계는 오문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수준이었다. 신무문은 궁궐에서 일상적인 출입 용도로 사용되었다.

 


신무문을 빠져 나오면 황실의 정원으로 사용되었던 경산공원(景山公園)의 정자와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경산공원은 자금성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떤 구조와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정상에 지어진 정자 앞에 서면 완벽한 대칭 구조의 자금성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뒤돌아본 신무문(神武門), 본래의 현판보다도 훨씬 더 커다랗게 만들어 붙인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란 간판이 눈에 거슬린다.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 밖으로 나오면 자금성은 또 다른 모습으로 관광객들 앞에 나타난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벽(城壁)이 해자(垓字)에 둘러싸여 있는 풍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펼쳐지는 것이다. 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다리를 놓아 자금성의 출입구 역할을 하게 했단다. 참고로 궁궐 주위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에 이른다. 그리고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자금성은 도시(都市) 속에 지어진 또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해자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 도시는 영락제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1406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만리장성 이후의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이 공사에는 총 15년간 백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현존하는 궁궐 중 세계 최대인 이 자금성은 정전인 태화전을 중심으로 남북을 축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남문의 이름이 천안문이다. 영락제는 자금성이 완성된 1421년 북평으로 천도하여 북경으로 고쳐 부르고, 자금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800여 개의 건물과 10m의 높은 성벽, 52m 너비의 거대한 해자로 구성된 거대한 궁궐 자금성에는 1억만 개의 벽돌, 2억만 개의 기왓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200톤에 이르는 돌이 수십 킬로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되었으며 사천지방에서 자란 나무가 기둥으로 쓰이기 위해 4년에 걸쳐 운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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