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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묵상글 ( 연중 제20주일. -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장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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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장들
오늘 저의 나눔은 어쩌면 오늘 주제와 조금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랑의 등급이랄까,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차이랄까,
이런 것들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는 것에서부터 오늘 나눔을 시작할까 합니다.
성숙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미성숙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미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제일 미성숙한 사람,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실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미성숙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다음은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다음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더 성숙하고 더 행복한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자기부터 사랑해야 하고,
자기부터 사랑하는 것이 순서로 맞습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 사랑도 이웃 사랑도 못하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를 사랑치 않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를 사랑할 때 사랑의 토대가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계속 느끼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렸을 때 부모 특히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제때 받지 못한 사람에게 애정결핍이란 것이 있고,
애정결핍이 있을 때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며,
반대로 엄마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애정결핍이 없을 때
자존감과 함께 진정한 자기애가 가능하게 되고 이웃 사랑도 가능하게 되지요.
그런데 엄마의 사랑보다도 더
자존감과 자기 긍정과 자기 사랑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 체험이 근본적으로 없을 때 우리는 자기가 버림받은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 잉여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감이 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자기 사랑에서부터
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과 인류 사랑으로 사랑이 점차 확장되기 마련인데
자기 사랑의 근본이요 이 모든 사랑의 근본이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민족을 다 당신 사랑 안으로 초대하는 사랑인데
모든 민족을 당신 사랑 안으로 초대하기 위한 도구로,
초대장으로 먼저 뽑으신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이 오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 우리이고 나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모든 민족을 하느님 사랑 안으로 초대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집 곧 우리 교회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불릴 수 있도록
가서, 모든 민족을 초대하는 초대장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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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가나안 부인의 일화를 통해 참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믿음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 믿음의 체험의 단계를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세 단계로 나눕니다. 믿음의 첫 단계인 정화의 여정에서 찾아오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감각의 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외면이 정화되는 것으로써 인간의 외부 감각이 무질서하게 분산되어 피조물의 매력에 눈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런 첫 단계에 처해 있는 이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진솔하게 응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걷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려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된 신앙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어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자신의 생활을 그리스도의 생활에 맞추어 나가려는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합니다. 순수한 믿음의 길은 우리의 영적 여정이 어디 와 있는지를 염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나의 것보다 더 좋다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명의 길에서 믿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이해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확실성 없이는 우리는 초자연적 확신과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도 깨어 있음의 문제이며 은총에 달려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치의 길로 나가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는 믿음을 통해서만 터득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의 믿음은 완전한 겸손과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이 믿음의 길은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써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자기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존재라는 친숙한 깊은 샘속으로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에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곳에 이르렀을 때 감각과 기능의 우리는 자신에게서 해방되고 낡은 자신의 껍질을 벗어 버리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참여하게 되며 사랑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술광지밀의 은혜를 마셔라. 그러면 믿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술광의 지밀이란 인간이 지닌 세가지의 근본적인 능력을 뜻하는 것인데 그 세가지란 지성과 의지와 기억이다. 즉 지성으로써 상지와 지식을 마시며 기억으로써 천국의 영광을 상기하고 느끼면서 쉼과 즐거움을 마신다”
이런 믿음으로 다시 새로 태어나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성령에 따른 삶을 살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얼어붙은 연못 속의 성체
독일 - 1240년
사제는 이 가련한 죄인을 위로하고 병자성사를 베풀어 주고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눈덮인 산을 넘어 그 곳으혹 향하였다. 그는 자신의 여행 목적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에어푸르트에 도착하자 그는 몇몇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이 중대한 일을 하는 데에 자신을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주의 공현 대축일의 마지막 날인 1월 13일 일요일에 그는 사람들과 함께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그 도둑이 임종할 때 말해 준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이 꽁꽁 얼어붙은 연못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같이 온 사람들은 갑자기 두껍게 얼어붙은 연못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물 위에는 하얀 천이 떠 있었다. 매우 기뻐하며 그들은 천을 주워 올렸다. 그러나 그 천은 놀랍게도 전혀 젖지 않았으며 안에는 9 개의 성체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부는 사람들에게 그 비밀을 털어 놓으셨다.
신부와 주민들은 개선 행진을 하며 에어푸르트로 돌아와 그 거룩한 성체를 성모를 모신 성당에 안치시켰다. 한 신앙심 깊은 시민인 울리히 비얼링(Ulrich Vierling)은 다시 찾은 성체를 경배하면서 자신의 많은 재산을 봉헌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무한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성체를 찬미하고 경배하는 것은 끝이 없어라!’(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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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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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구원이 하느님에 의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불순종한 유대인들을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 마침내는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30-32)
<복음> 또한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 곧 이방인이면서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러나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청하였습니다. 마귀 들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하고(15,23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마태 15,25). 여인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하시는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겸손과 인내, 믿음과 확신을 밝힙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여인은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하느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13)라고 기도하는 세리처럼,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또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 믿음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했던 과부(루가 18,1-8)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창세 32,25-27)처럼, 끈질긴 믿음의 인내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자가 아닌, 완전한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1고린 10,13).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은 <행전>에서 이렇게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34-35)
이토록, 모든 이에게 열리는 구원의 충만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드넓으심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으로 쓰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도와주소서.”를 간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삶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은 삼킬 것 같은 풍랑 속에서 말없이 주무시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하오니, 오늘 당신의 침묵 속에서 제 믿음과 겸손을 양육하소서.
더 깊이,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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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영원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 엎드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고, 다시 여인이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셨습니다. 또다시 여인이 도와달라고 청하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은총은 준비된 사람에게 우선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의미로 구원의 혜택이 이방인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확고하게 믿으면 그만큼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방인 여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자식을 위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세 번의 끈기 있는 간청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결국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느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4천여 전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선민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을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강아지’‘돼지’라 부르면서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표현으로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말씀하시고,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며 간절한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정신 차려라!’는 꾸중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이요, 강아지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하느님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칠 위험이 큽니다. 특별히 선택되었다면 그에 걸맞은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고 다른 모든 민족이 배척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우리 내덕동 주교좌성당의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해 본당설정 66주년을 지냈습니다. 청주교구의 중심성당으로써 많은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습니다. 주교좌성당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고 사느냐?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풍요로움 속에 있으면 고마움을 잊게 됩니다. 따라서 더 큰 믿음과 사랑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겸손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더 많은 이가 미사참례와 기도로 성당을 지켜야 합니다.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보편적 구원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2).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는 어머니를 봐야 합니다. 강아지 취급받는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5,11).
우리는 어떤 바람이 있을 때 반드시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죄를 짓고 잘못에 떨어졌다 해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향으로 인내하면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입니다.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고 낙심의 치료제입니다. 슬픈 이들의 위안이며 의로운 이들의 승리고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통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데 백인대장의 처신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이 믿음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미사 안에서 영성체 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무엇을 주시든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도 믿음으로 병이 나았고(마태9,20-22), 주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하시며 눈 먼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하시며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큰 만큼 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설령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을지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이 마치 예수님께서 외면하는 듯 여겼을지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지켰듯이 우리도 어두운 밤이 올수록 더 큰 신뢰를 지니고 믿음을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기대하는 바와 간절한 소망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리석은 끈기
크고 튼튼한 집게발을 가진 어리석은 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게는 늘 자기의 튼튼한 집게발을 내 보이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난 무엇이든 한 번 물면 놓지 않아.”친구들은 모두 겁을 먹었습니다. 게는 더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어느 날, 어리석은 그 게는 낚시꾼의 낚싯대를 물고 가며 친구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난 한 번 물면 놓지 않아! 절대 놓지 않아!”(이규경).
엉뚱한 고집 부리지 않는 지혜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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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글을 읽을 때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단어는 글의 기본입니다. 단어가 문장이 되면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면 글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를 주는 글, 용기를 주는 글, 비판과 비난의 글이 됩니다. 문단과 문단의 맥락을 이해하면 글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은 대부분 신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어째서 시대의 징표는 모르느냐?” 단어와 문장에만 머물면 글의 목적과 가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글의 맥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주체적으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유익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지, 몸에 독이 되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받아들일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치유력을 새로 일깨우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절름발이 교회를 야전병원으로 만들고 민중의 빛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교회와 종교를 게토, 폐쇄되고 요새화된 벙커, 철 지난 과거 신조들로 장식된 무덤, 진정제나 수면제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신뢰를 잃고, 자유 좌파들에 의해 단호히 배격당하고 외면된 그리스도교가 다양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호 존중과 소통, 가치 공유의 도덕적 풍토로 바꿀 수 있는 정치 문화를 형성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어떤 유형의 신앙이 다가올 시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오후라고 지칭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신학, 영성이 어떤 형태의 변화를 격어 나가야 하는지 대답하고 싶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토마시 할리크가 진단한 시대의 징표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소의 감소로 성직자들의 고령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제가 없는 성당은 폐쇄되거나 이웃본당과 통합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블랙홀이 되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저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쌓고 있는 탐욕과 욕망의 바벨탑은 아름다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폭염, 가뭄, 화재는 삼종세트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큰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 내보내는 ‘온실가스’는 지구열대화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를 훼손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땅, 물, 공기가 오염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땅, 물, 공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생명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평등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모욕과 수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새로운 권위를 지니셨고, 기존의 질서와 틀을 허물었던 예수님은 늘 당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믿으셨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부탁한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징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저의 말을 듣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또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그 믿음은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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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
-주님이 답이다-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라”
요즘처럼 나라 걱정 많이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참 고약하게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같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생각도 그러할 것입니다. 남북의 분열 못지 않게 남남분열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통합의 길은 참 멀고도 멀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길 강력히 희망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그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를 보듯 신문을 보고, 신문을 보듯 성서를 보라는 개신교 신학자 칼바르트의 오래 전 언급을 잊지 못합니다. 성서를 읽듯 그런 깊은 안목의 눈으로 새롭게 신문을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 양 일간지 1면 톱기사와 사진이 참 불길하다 싶었습니다.
“초밀착 한-미-일, 준동맹 한-미-일”
이라는 제하에 삼국정상 사진이 나란히 나와 있었습니다. 동맹이라 하지만 흡사 강대국 두 정상에 꼼짝없이 포위된, 미-일의 덫에 걸린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동안 어렵사리 북방외교에 힘쓴 결과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는 물론 남북의 관계도 “이젠 전쟁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신냉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위기감까지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미-일-중-러 사대 강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부단히, 꾸준히 추구해야 되는데 그반대로 역행, 퇴행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보다는 현재의 분단과 대결구도를 원하는 4강대국입니다. 국제관계의 잣대는 국익이지 결코 정의, 평화가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고군분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남북이 이런 엄중한 상황을 깨달아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을 추구해야 하는데 참 암담한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한민족의 저력과 지혜를, 무엇보다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의 보호를 믿기 때문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1년반 전쟁동안 양쪽 군인의 사상자가 무려 50만이라 하는데 민간인까지 하면 그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쟁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여 상처와 손실의 회복, 복구가 참 요원하다 싶었습니다. 전세계가 기후재난에 힘을 합쳐도 역부족인데 설상가상 이런 어리석은 전쟁이라니요! 참으로 국가지도자의 첫째 의무가 나라의 안위요 전쟁방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긍정적 표지도 발견하고 안도했습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속에 새어 나오는 희망의 빛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전쟁은 없겠구나!” 말마디와 더불어 안도감까지 들었습니다. 바로 어제 가톨릭평화신문 한면의 기사 때문입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개최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물길 열릴 것”이란 제하에 태극기를 든 청년들의 밝은 모습의 사진이었습니다.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동아시아 지역평화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란 내용도 반갑고, “아, 하느님은 이렇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이든 신문이듯 자주 들여다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빛을, 희망을, 길을 찾는 심정입니다. 말그대로 빛을, 희망을, 길을 잃은 시대같습니다. 무엇보다 국민 대다수가 보는 눈을, 안목(眼目)을 잃은 듯 도대체 올바른 보는 눈, “관(觀)”을 보기 힘듭니다. 올바른 국제관, 역사관, 사회관, 시국관, 교육관, 결혼관등 보는 눈이 없습니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것도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과 참사람이 되는 것인데 교육현실은 이와는 너무 멉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나라가 건재해야 천주교 신자생활도 건재할 수 있습니다. 나라잃은 종교생활 너무 비참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바친 순교요, 나라 사랑에 목숨을 바친 순국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힘써야 겠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집무실 예수님 십자고상밑에 태극기를 붙여놨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길을, 희망을, 빛을, 보는 눈을 잃어버릴 때,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병들도 많고 죄악도 많고 유혹도 많고 괴물도 많고 악령들도 활개치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서는 길을, 희망을, 빛을 찾습니다. 제대로 보는 눈을 지니길 원합니다. 눈뜨고도 못보는 진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길을, 희망을, 빛을 보게 하고, 우리 모두 보는 눈을 지니게 합니다. 평화의 길, 상생의 길, 지혜의 길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궁극의 길은, 희망은, 빛은, 눈은 주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주님이 길이, 주님이 희망이, 주님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세가지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이교인 가나안 여자가 그 믿음의 모범입니다. 제대로 빛이자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찾아낸 가나안 여자의 눈입니다. 평생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살다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주님을 정조준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과녁은 정확했고 집요했습니다. 좌절이나 절망이 없는, 뒤로 물러날줄 모르는 불퇴전의 참으로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현대판 마귀들린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면, 자비송을 바치면 눈물이 난다는 분의 진솔한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명품성을 보장하는 미사전례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 보내라고 아우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냉정한 대답에도 가나안 여자는 개의치 않고 엎드려 절하며, 재차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표현이 기도요, 이런 기도가 믿음을 견고히 합니다. 마지막 주님과 가나안 여자의 대결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게 하는 모욕적인 주님의 말씀에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굴할줄 모르니 과연 배수진을 친 불퇴전의 믿음의 전사답습니다.
“주님,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여자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토록 주님께 대한 가나안 여자의 신뢰와 사랑은 깊었습니다. 빛이자 희망이자 길이신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가나안 여자가 우리에게는 빛나는 믿음의 표지, 희망의 표지, 사랑의 표지가 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대로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유쾌한 항복(降服) 선언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의 승리,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가나한 여자는 믿음의 싸움에서 주님을 이겼고, 자신을 이겼고, 은근히 포기하기를 바랬을 악마의 유혹을 이겼으니 삼중(三重)의 승리를 뜻합니다. 그대로 가나안 여자를 통해 제1독서 이사야 예언, “이방인들에게 내린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그대로 우리에게도 성취되어 주님의 거룩한 산, 불암산 기슰 이 거룩한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에서 미사전례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런 희망이 백절불굴의 믿음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이런면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희망의 주님께 인도하는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가나안 여자가 바로 빛나는 믿음의 표지요 모범입니다. 주님을 희망하십시오. 이사야 예언자가 바로 빛나는 희망의 표지요 모법입니다. 다음은 사랑하십시오. 제2독서 바오로가 그 사랑의 표지요 모범입니다. 바오로의 영적 시야와 지평이 참 웅대합니다. 타민족들의 구원에 이어 재차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결국은 모두의 구원입니다. 결론같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가 빛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마음 너머에는 신비가 있고 신비 너머에는 자비가, 하느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없는 이어지는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를 소개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신비에 압도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환히 드러내는 예수님의 궁극의 답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언제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아가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빛, 주님의 길, 주님의 희망, 주님의 눈이 될 것이며 저절로 영육의 건강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합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유일하게 없는 단어 하나가 “절망”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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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군대 제대 후 복학 전까지 택배를 시작한 것이 이맘때, 8월이 아닌가 합니다. 전국에서 제가 맡은 구역으로 배달될 물건들이 밤새 큰 트럭으로 운송됩니다. 주로 6시면 물건이 나오기 때문에 늦어도 5시에는 일어나서 준비하고 택배차를 몰고 물건을 받으러 갔어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벽 5시에 저처럼 일터로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새벽에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나서는 모습은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라는 깊고 강한 에너지가 있음을, 그 사랑의 에너지가 새벽이슬 속에서 반짝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새벽같이 움직일까요? 온종일 일하면 땀을 흘리면서도 즐겁게 또 희망을 품고 살아갈까요?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켜 내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새벽이슬을 맞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러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여인은 자기 자녀를 지켜 내려고 합니다. 죽어가는 자녀를 살려내려 합니다.
여인은 말합니다. ‘개가 되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아픔도 상처도 주지 못합니다. 개보다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참지 못할 만큼 큰 아픔이 있습니다. 내 사랑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는 참지 못할 고통이고 아픔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매달립니다. 정말 개가 된 것처럼 구걸합니다. 보다보다 처절해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로 매달립니다. 사랑이 이렇게 힘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이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힘센 것이고 사랑이 이렇게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사랑이 강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인의 사랑이 마침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여인의 마음이 하느님의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음악을 조리하다.
가끔 들르는 한옥 카페가 있습니다.
사장님과 부모님이
옛날 살았던 집이랍니다.
그 카페 작은 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 음악이 이곳, 한옥 카페만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집을 위해 음악을 만든다?
사실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집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집 안에 있을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든 음악이었습니다.
음악도 조리할 수 있습니다.
조리된 음악은 우리 하루의 한 부분을 맛깔스레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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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하는데, 자기 생각이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심리를 말합니다. 이런 심리를 유튜브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이용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시청했던 콘텐츠와 유사한 내용의 영상을 자동으로 추천 콘텐츠로 뜨게 합니다. 이렇게 보다 보면 다른 사람 모두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생각과 신념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면, 보기 싫은 것은 당연히 보기 싫어집니다. 이 역시 확증 편향 심리에 따라, 보기 싫은 것을 봐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이 계속해서 왜곡되고 조작되고 있는데 말이지요.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친한 초등학교 친구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놀았던 일을 이야기해줍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설명이 너무 자세합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있었겠지만, 제가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왜곡되고 조작될 수 있는 기억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겸손의 삶이고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하는 주님과도 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여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가나안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된 청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모욕적인 말씀까지 하시지요.
이런 모욕에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겸손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상대방의 모욕으로 틀렸다면서 거부하고 포기하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인정과 지지를 통해 굳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믿음에 주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고 싶은 것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고 화내는 것이 아닌, 굳은 믿음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이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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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은 믿고, 소망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인디라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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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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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0. 연중 제20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십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오직
사랑 때문에
기꺼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오직
사랑 때문에
기꺼이
개가 되려는
사람에게서
당신을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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