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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도 - 서경덕과 황진이
hanjy9713
2024.01.05. 04:45조회 4
서경덕과 황진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화담 서경덕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나물을 뜯으러 내보내면 서경덕은 매일 빈 바구니만 가지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왜 나물을 한 줌도 뜯어오지 않느냐?” 하고 묻자, “나물을 뜯으러 들판으로 나가니 종달새가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달새가 그제는 땅에서 1치쯤 날아오르더니 어제는 2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3치쯤 날아올랐습니다. 새가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서경덕은 늦은 나이인 14세에야 개성의 어느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16세에는 『대학』을 읽은 뒤 그 뜻을 깨닫고는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 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다음에는 제자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아갔다가 남명(南冥) 조식을 만나게 된다.
서경덕은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 즉 ‘꽃 피는 연못’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연유하였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서당에서 겨우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서경덕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과 책이었다. “스스로 깨달아 얻는 즐거움은 결코 다른 사람이 짐작할 바가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서경덕은 그런 연유로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송악산
개성시과 개풍군의 경계로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되어 있으며, 기암괴석 활엽수림의 조화가 뛰어나다.
그 후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개성 일대와 서울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제자들 중에 빼어난 여류 시인이자 절세미인이었던 황진이1)가 있다. 황진이는 대제학을 지냈던 소세양과 1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정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한 뒤 화담 서경덕을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황진이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오성(이항복)과 한음’으로 알려진 이덕형이 지은 「송도기이(松都奇異)」다. 다음의 인용문은 선조 37년 개성에 부임하게 된 이덕형이 진복이라는 서리의 아버지에게서 황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글이다.
진이(진랑)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娼妓)다. 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18세 때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에 기대서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며 돌려주면서 “너도 시험 삼아 마셔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은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마침 절일(節日)을 당하였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진이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는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잡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한 여인이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된 잔치에서 손님들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그의 첩이 발 안에서 엿보고 전과 같은 변을 벌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를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때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하였다.
악공 엄수는 나이가 일흔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 안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하였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하였다.
이때 조사(詔使, 중국에서 오던 사신)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 선비와 부인)들과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길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우두머리 사신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천하절색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이긴 했지만 성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화담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니, 화담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어찌 절대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의 어사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 진복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랬던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다.
이덕형의 글과 더불어 이능화가 지은 『조선해어화사』도 참조해볼 만하다.
황진이는 한때 이름을 떨쳤다. 종실인 벽계수가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다 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이 한 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이가 이 말을 뜨고 사람을 시켜 벽계수를 유인해왔다. 때는 늦가을이었다. 달밤에 만월대에 오르니 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진이가 문득 소복단장으로 나와 맞이하며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은 자신의 자를 인용한 것이며, 수(守)는 수(水)로 대신했으니, 즉경(卽景)을 그대로 노래로 옮긴 것이다. 벽계수는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가 마치 꾀꼬리가 봄 수풀에서 지저귀고 봉황이 구소(九霄)에서 우는 것 같음을 들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해서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하니,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히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백호(白湖) 임제의 「청초 우거진 골에」의 치제설(致祭設)이 있으나 그는 훨씬 후세의 사람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시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고, 지금도 그녀를 일컬어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시를 잘 쓴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황진이를 개성의 3절(三絶, 박연폭포ㆍ서경덕ㆍ황진이)의 하나로 부르는 것이다. 황진이의 시 몇 수를 소개한다.
어저 내일이면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내 언제 신이 없이 임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화담에서 북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개성시 장풍군 원고리에 있는 현화사(玄化寺) 옛터에 이른다. 지금은 비석과 탑 그리고 높이가 4.73미터인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고, 석등은 서울 용산 중앙박물관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다. 현화사는 언제 창건되었고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종 11년(1020)에 임금이 안서도에게 명하여 둔전 1240결을 주게 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그 뒤로도 무종, 헌종, 덕종, 숙종, 의종 등 고려 임금들의 행차가 잦았을 정도로 큰 규모였으며, 특히 의종은 이 절에 자주 행차하여 반승과 무차대회, 나한재 등을 자주 베풀었고, 과시(科試)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유희를 위하여 청령재(淸寧齋)라는 별관을 건립하였는데, 청령재를 지을 때 가슴 아픈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온다.
현화사 7층석탑
화담에서 북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개성시 장풍군 원고리에 있는 현화사 옛터에 이른다. 지금은 비석과 탑 그리고 그 높이가 4.73미터인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한 역졸이 너무 가난하여 밥을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먹으며 일을 하였는데, 그의 부인이 어느 날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판 뒤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신세진 사람들에게 대접하였다. 그 사실을 안 동료들은 목이 메어 아무도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종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의민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처럼 번성했던 현화사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폐사되고 말았다. 그 서쪽은 대흥동이며, 숙종 때 여기에 산성을 쌓았는데, 바깥쪽은 험하고 안쪽은 평탄하여 참으로 천작(天作)으로 된 요새지다. 관에서 양곡과 병기를 쌓아두고 큰 절을 세워 승려들에게 지키게 하여 갑작스러운 변고에 대비하였다.
한편 천마산은 암벽이 높고 웅장하며 시냇물 또한 넓고 깊게 감돌아 흐르며 그 밑에는 큰 폭포를 이루었는데, 이곳이 바로 개성의 명물인 박연폭포다. 『고려사』「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설명을 보자.
우봉군에 박연이 있는데 그 상하 못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다. 날이 가물 때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면 곧 응하여 비가 내렸다. 위에 있는 못 가운데에는 올라가서 구경도 할 수 있는 넓고 편편한 큰 돌이 있다. 문종이 한번은 그 위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바람과 비가 크게 몰아치며 돌이 진동하였다. 문종이 놀라서 겁에 질렸는데 이때 왕을 모시고 왔던 이영간이 용의 죄를 꾸짖는 글을 지어서 못에 던지니 용이 즉시 그 등을 내어놓았다. 이어 용을 때렸더니 못의 물이 전부 시뻘겋게 되었다.
박연을 들여다보면 그 물빛이 시커멓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옛날에 박 진사란 사람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용녀가 이에 감동하여 박 진사를 데려다가 남편을 삼았다. 그 때문에 이 못의 이름을 박연이라고 불렀고,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통곡하며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그만 이 못의 이름을 고모담이라고 불렀다.
박연폭포 © 권태균
송도3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는 남쪽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선 층암절벽에 안기어 절경을 이룬다.
박연폭포는 개풍군 영북면 천마산 기슭에 있는 폭포로 높이는 약 20미터이며, 금강산의 구룡폭포 및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린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범사정에 앉아서 한잔을 기울이니 단풍 든 수목도 박연의 정취로다.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천기 청랑한 양춘가절에 개성 명승고적을 순례하여보세.
에헤 에헤야 에헤 에루화 좋구 좋다. 어럴엄마 디여라 내 사랑아
구만장천 걸린 폭포 은하수를 기울인 듯 신비로운 풍경에 심신이 맑아지누나.
에헤 에헤 폭포에 흘러내리는 물은 용바위 감돌아 범사정이로다.
「개성난봉가」에도 등장하는 박연폭포를 사랑했던 화담 서경덕의 묘는 개성시 용흥리의 화계계곡에 있고, 판문점에서 조금 떨어진 전재리 황토고개에는 조선 실학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의 묘가 황폐한 채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경덕과 황진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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