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But strong meat belongeth to them that are of full age, even those who by reason of use have their senses exercised to discern both good and evil. —히브리 5:14. 반스의 성경 노트 단단한 고기 -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나이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더 높은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기독교 경험이 풍부한 사람만이 이해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자 - 마진, “완전한”. 이 표현은 어른이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용 이유에 따른 사람 - 여백, 또는 “습관” 또는 “완전”. 커버데일과 틴데일은 “관습을 통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어 단어는 “습관, 연습”을 의미합니다. 즉, 오랜 사용과 습관을 통해 기독교의 더 높은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사용에서 언급된 것은 “음식을 먹는” 사람들, 즉 오랫동안 사용함으로써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에서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가장 빛과 위로를 주는 교리에 대해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취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험은 무엇이 인간의 영혼에 적합한지, 무엇이 정서를 고양하고 정화하는지, 무엇이 마음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끄는 경향이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분별력을 가지라 -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인 감각의 자리, 후각, 미각 등과 같은 “감각”을 올바르게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인 “내적 감각”을 의미하며,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아이디어입니다. 그 의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더 고상한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게 되며, 오류와 구별할 수 있는 신중하고 정확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17의 메모를 비교해 보세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 즉, 교리에서. 그들은 참된 것을 감사하고 이해할 것이며 거짓된 것은 거부할 것이다. 비고 1. 그 위대한 직분을 감당하도록 정식으로 부름을 받으시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심을 기뻐합시다( 히브리서 5:1). 사실, 그는 레위 지파가 아니었고 아론의 후손도 아니었지만 더 고귀한 신분과 더 고귀한 지위를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특별한 신적 지명에 의해 그의 직분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부당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 직접 그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유대인 대제사장들이 조상들의 긴 계보를 돌아보고 아론까지의 계승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대제사장의 힘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아론보다 더 오래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즉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관으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던 고대 모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 명과 그 직분에 연관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5:7). 하나님의 아들은 강한 간구로 기도와 간구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에서 우셨습니다. 구속주께서 우셨다면 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 아니며, 우리도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은 슬픔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종종 짐을 진 영혼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우리는 슬픔의 순간이 있을 때 우는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그를 존경합니다. 우리는 그의 슬픔에 공감하고 그를 더욱 사랑합니다. 대포의 총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딸의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아버지를 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그를 존경합니다. 그는 사랑하고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워싱턴은 안드레 소령의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 눈물을 흘렸고, 그 감동적인 기록을 읽으면서 그의 인격이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세상에는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질병, 재난, 죽음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 집에 들어오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애정의 대상이 빼앗기고, 우리가 깊이 느끼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흘리는 눈물은 천국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 것이며, 땅에서의 우리의 슬픔은 “모든 눈물을 모든 얼굴에서 닦아 주실” 그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3.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기도의 타당성을 봅니다( 히브리서 5:7). 구속주께서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느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처럼 고통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죽어가는 사람도 겪지 못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죽음의 시간은 두려운 시간입니다. 사람이 죽는 장면은 우울한 장면입니다. 움푹 들어간 눈, 창백한 뺨, 축축한 땀, 굳어버린 시신, 관, 수의, 무덤 등 모든 것이 슬프고 우울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어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특히 두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죽음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아, 그 슬픈 시간을 대비하여 기도하고, 그 때 불평하고 반항하고 원망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평온하고 평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기도하고, “죽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4.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5:7). 구속주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분의 인간 본성은 완벽하게 거룩하셨지만 죽음의 두려운 고통 앞에서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죽음의 전망에 대해 그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온함을 갖지 못하고, 죽음의 고통에서 본성이 위축되기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감정이 종교와 일치하지 않으며 그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구속자와 그분의 슬픔을 잊고, 그분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던 간절함을 잊어버립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부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부이며,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때가 되어 하나님이 “죽음의 은총”을 주실 때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신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는 죽음에 대한 준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끝없는 존재의 입구이며, 가장 중대하고 엄숙한 사건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소, 양, 수탉, 비둘기는 불멸의 본성이 없고, 양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으며, 죽음을 준비할 필요도 없으므로 아주 약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의 주된 사업은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므로, 죽음의 고통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무덤의 모든 공포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의 관심을 가장 중대한 사건인 자신의 죽음에 고정시키고, 죽음의 공포를 적절히 제거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는 불멸의 희망을 추구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다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인간은 죽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은 그에게 가장 깊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재난과 슬픔에 눌려도 일반적인 법칙으로 “알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자신이 가진 병을 견디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위험이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전갈이 아닌 이상 야수적인 피조물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잘 압니다. 삶에 지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실망하고 상심하여 자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습니다. 이를 막는 수단 중 하나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셔서 죽기를 두려워하게 하셨고, 다른 어떤 것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때 이 두려움으로 수천 명이 이 엄청난 범죄로부터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자비이며, 죽어가는 투쟁의 모든 고통과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를 창백 해지고 떨게 만드는 죽음에 관한 모든 것에는 어떤 식 으로든 인류에게 선의 표현이 있습니다. 5. 우리는 구속자의 모범을 바라봄으로써 죽음의 전망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7).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 그리고 그 후에 고통을 당할 만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은 고통 속에서 우리를 뛰어넘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의 슬픔은 결코 그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그런 장면을 결코 겪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견뎌냈고, 우리의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뛰어넘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덜어주시고, “생명과 불멸을 빛나게 하셔서” 우리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시고, 그분의 고난의 결과로 우리의 죽음의 순간이 평온하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의 원천이자 가장 높은 종류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6.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종교의 기본 원리 중 몇 가지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히브리서 5:12). 이는 다음과 같은 것들, 즉 조기 종교 교육의 결핍, 교인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잘못, 기독교인들의 탐구심 결핍, 종교에서 느끼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등이 그 이유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요점에 대해 얼마나 모호하고 불안정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의견을 변호할 자격이 얼마나 부족한지 종종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원칙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 자기 부인, 기도, 선행, 영성에 관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 중 일부에 대해 그들은 완전히 낯선 사람입니다. 상처에 대한 용서, 자선, 죽어가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기독교의 '요소들', 즉 의로운 아이들이 배워야 할 기초이지만, 많은 무리가 배우지 않습니다. 상처에 대한 용서, 자선, 죽어가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의 '요소'로서 의로운 자녀들이 배워야 할 기초이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배우지 않습니다. 7.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5:12). 나는 그들이 모두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의 참된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본보기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계급의 하인이 주인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칠 수 있으며, 자녀의 매일의 행보는 부모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가치의 교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웃은 이웃을 가르치고, 낯선 사람은 낯선 사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하고 교만하며 배운 죄인에게 자신과 인간의 최종 운명에 대해 현재 전적으로 무지한 죄인에게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또한 세상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공언하는 친구들의 삶과 행동에서 도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기독교가 무엇인지 배우는 것은 성경이나 강단이나 책에서가 아니라 그 친구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매일의 행보에서이며, 우리가 사는 날마다 아내, 자녀, 이웃 또는 낯선 사람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