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잉크로 쓴 분홍 / 강미정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어 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곽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을 보여줄 때
그 분홍문장 내게 고여 반짝이던 시간이
그 분홍문장 당신 입술에 고여 노래하던 시간이
이미 다 지나가고 허물어져
병 깊은 여자가 바라보던 수십 겹 물결무늬와
그 여자 바라보던 남자의 수십 겹 눈물무늬엔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문장에 엎질러진 먹물,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문장이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문장을 탁본한다
- 시집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북인, 20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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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미정 시인
1962년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월간『시문학』 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 『물 속 마을』 『상처가 스민다는 것』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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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주 오랜만에 나온 강미정 시인의 신작 시집이지요.
유월 첫째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은 시집 『검은 잉크로 쓴 분홍』의 표제시를 띄웁니다.
- 검은 잉크로 쓴 분홍
제 감상을 읽기 전에 다음과 같이 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은 눈으로 읽고
한 번은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보세요.
한 번는 모데라토로 읽고
한 번은 안단테로 읽어보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다지오로 한 연씩 끊어서 읽어보세요.
다 읽었나요?
그럼 되었습니다. 이 시는 그렇게 읽는 것으로 다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검은 잉크로 쓴 분홍문장"에 젖었을 테지요.
당신의 마음에는 이미 분홍문장이 탁본되었을 테지요.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이
이미 당신의 마음 한 켠에 가라앉았을 테지요.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이 사라지면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
그러한 당신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묵직했던 분홍문장이 한순간 무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분홍문장을 고백하세요.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으니까요.
사랑을 고백하기에 내일은 너무 늦을지 모릅니다.
2024. 6. 3.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