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원년조
위 사료는 개로왕대 문주의 활동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문주의 개로왕 말년 무렵의 지위는 상좌평이었다. 상좌평이란 전지왕대 신설된 백제내부의 최고직책이다. 따라서 개로왕 재위 시 아니 적어도 개로왕 말년 무렵 문주는 도성에 있었다. 그런데도 한성함락 때 왕을 비롯한 왕족이 몰살당했음에도 문주왕의 장자인 삼근왕은 살아남았다. 그 당시 10세에 불과한 삼근이 부친인 문주와 함께 도성에 있었는데도 다른 왕족들은 죽거나 끌려갔지만 삼근은 살아남았다. 혹시 문주가 신라로 구원군을 요청하러 갈 때 데리고 갔을까? 아니면 고구려가 쳐들어올 것을 눈치 채고 안전한 곳에 피신한 것일까?
그리고 본래 문주는 왕위계승서열에서 동생인 곤지보다 뒤였다. 곤지는 좌현왕이었다. 좌현왕은 흉노에서 선우 다음 서열이다. 475년 비록 한성이 함락되었지만 곤지가 귀국한다면 충분히 왕위를 이을 개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남은 왕족들 가운데 서열이 수위였던 문주가 즉위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475년 백제의 패전으로 가장 수혜를 입은 사람은 바로 문주왕이다. 또한 문주왕이 즉위한 후 백제에서는 개로왕대 기록에 나타나지 않던 해씨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해구가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해씨세력은 고구려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표방한 집단이었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상좌평직까지 오른 문주를 개로왕의 친위세력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주왕 즉위 이후 백제내부를 보면 개로왕 말년에 등장하는 목씨의 목협만치나 조미걸취 등은 보이지 않고 개로왕대 배제되었던 해씨를 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개로왕의 친위세력이라면 그 지지 세력이 문주왕의 지지 세력도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전혀 생뚱맞은 친고구려적 성향을 가진 해씨를 중용하고 있다. 즉, 문주왕의 즉위자체가 개로왕 지지 세력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475년 한성함락 때 문주는 고구려의 침입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한성함락 이후 문주왕의 행보는 병관좌평 해구와 같은 친고구려 성향의 인물을 중용하였다. 476년 2월에는 대두산성을 수리하면서 한북(漢北)의 민호를 옮기고 있는데, 잘 아시다시피 고구려의 한성함락 이후 한북지역에는 고구려 보루 등이 보인다. 이는 한북지역을 고구려군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토기로 볼 때 일정기간 고구려군이 주둔하였다고 본다면 어떻게 한북의 민호를 옮길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이는 고구려군의 공격목적이나 조기철수를 다른 시각에서 봐야한다. 즉, 475년 고구려군의 공격은 고구려의 천하관에 도전하는 개로왕 정권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백제내부에 친고구려 성향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군의 조기철수나 한성함락 이후 백제에 대한 방조는 그러한 친고구려 정권의 성립이라는 목적 달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