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법성포 굴비 소개 (황금굴비 황제원 씀)
굴비하면 영광을 생각하고 영광하면 법성포가 유명하다
법성포는 삼국시대 백제 침류왕 원년 384년에 파키스탄(당시 인도)에서
마라난타 성인이 불법을 전래하기 위해 중국 동진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왔다해서 법법(法),성인성(聖),자를 써서
고려 문종때 부용포 부용항을 법성포 법성항으로 개칭하면서
법성포라는 최종 지명이 됐다
영광에서도 서쪽으로 12키로 서해 칠산바다와 접하고 있는 법성포가
산지인 영광 법성포굴비를 알려면 우선 조기를 알아야 한다
민어과에 속하는 조기는 참조기,부세,수조기,흑조기,보구치등
13종에 달하고 있다
이중 굴비로 만드는 조기는 황금색을 띠는 참조기로 만든다
영광 법성포 굴비는 오래전 냉동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는
참조기를 오래 보관하여 먹고 팔기 위해서 간수가 빠진 소금에 염장해서
자연 해풍에 2~3개월 완전히 말린 것을 굴비로 판매하였다
굴비란 명칭은 고려 16대 예종에게 둘째딸을 17대 인종에게 셋째 넷째딸을
시집보내 왕족과의 외척관계를 유지하며 수십년간 그 권력으로 왕권을
유린하던 장인 겸 외할아버지 이자겸의 전횡을 견디다 못한 인종이
이자겸의 반대세력과 힘을 합쳐 이자겸 제거에 나서자
이자겸의 세력들 척준경(이자겸의 아들 이지원의 장인)과 이자겸의 아들들에 의해
싸움에서 패한 인종세력들은 오히려 역적으로 죽임과 유배를 당하고
인종은 이자겸에게 신병을 확보당하고 만다
가택연금으로 이자겸의 감시를 당하면서도 인종은 계속 기회를 엿보던중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들간의 싸움이
두집안의 감정싸움으로 사이가 벌어지는 사건이 생긴다
척준경의 노비가 이지언의 노비에게 욕을 하자 이지언의 노비가
“너의 주인(척준경)이 임금있는 쪽으로 활을 쏘고 궁을 불태웠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고 너도 역시 몰수당하여 관노가 될것이니
어찌 나를 욕하리오”하였다
척준경이 노비에게 이를 전해 듣고 대노하여 이자겸을 찾아가 옷을 벗고
관을 벗으며 말하기를
“내 죄가 큽니다 마땅히 소사에 나아가 스스로 변명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버리니 이자겸이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어 화해를 청하니
척준경이 꾸짖어 말하기를
“전일의 난은 다 너희들이 한 바이니 어찌 홀로 나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느냐”하고 끝내 다시 보지 않고 말을 이으며
“나의 고향에 돌아가 늙고자 한다”하였다
그 틈을 타서 인종이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조용히 보내어
안심을시키고 하던일을 보게하고 안마(안장을 얹은 말)를 하사하고
지난일은 잊고 이번에 이자겸을 잡아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주라는
간곡한 교서를 비밀리에 보낸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확고한 척준경은 잘못을 깨닫고
임금을 독살하려 했던 이자겸을 반역으로 생각하고 방심한 이자겸이
자택에 있을때 야밤에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이자겸을 생포한다
이로서 이자겸의 경원이씨가문은 고려11대 문종때부터 17대 인종때까지
7대에 걸쳐 80년동안의 왕실과의 정략결혼으로 막강한 권력을 앞세워
전횡를 일삼던 세도정치의 막을 내린다
인종은 왕비들을 폐위시키고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을
선정의 여지을 담아 부인 최씨와 아들 이지윤을 함께 경치좋고 물좋고
인심좋은 영광스런 정주(지금의 영광)땅으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온 이자겸이 산란을 위해 칠산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부근으로
올라가는 알밴 참조기의 맛이 최고로 알아주는 칠산바다에서 잡힌
영광 법성포 참조기를 염장해서 말린 것을 먹어보고 그 맛이 너무 좋아
사위이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본인이 대신들에게 전횡은 했지만
임금을 위한 일이었고 임금자리를 탐한 반역은 아니었다
지금도 임금을 모시는 충정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진상품을 올리면서 그 뜻만큼은 굽히지 않으니 알아달라는 것을
두글자로 표현한 것이 “굴비(屈非)”(굽을굴,아닐비)라는
이름으로 지어 보내면서 유명하게 된 것이다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품을 보낸 이자겸은 그 해 1126년(인종4년)
12월 정주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는 이자겸에게 후환이 두려운 반대세력들이 굴비를 진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한 나머지 알아서 처리했는지 아파서 죽었는지는
필자가 아는바 기록에 나오지 않았다
이자겸이 죽은지 3년만에 그의 처는 한양으로 소환되고
모두 세상을 떠난뒤 후대왕이 이자겸을 대신들에게 전횡은 했지만
반역은 아니었기에 겸교태사한양공으로 추증하고
그의 처는 변한국대부인으로 봉해져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또한 왕이 반대세력으로 하여금 자기를 제거하려 했던것에 화가난 이자겸은
인종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독살을 시도하였지만
왕비인 넷째딸이 사전에 알아채고 두 번이나 독살음모를 저지해준
그 공을 인정받아 폐비는 궁주시호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정권에서 이긴사람이 역사를 자기들 위주로 쓰기
때문에 이자겸의 난이 왕이 되고 싶어서 난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인종이 먼저 이자겸 반대세력을 앞세워 이자겸을 제거하려 한것을
이자겸이 알아차리고 오히려 그 반대세력을 잡아 숙청한것 뿐이다
그래서 이자겸이 죽어서도 후대왕이 다시 직위을 하사하여 복원시킨것을
보면 이자겸이 처음부터 왕이 되려는 목적이 아니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자겸의 조상들이 80년동안 정권 중심에 있으면서 많은 전횡를 저질렀고
이자겸의 전횡은 더했다 모든 백관의 우두머리로 문신과무신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자기의 처와 아들 최측근 수하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정권을 좌지우지 했다
오랜세월동안 이자겸의 조상들도 왕위를 넘보지 않았지만
자신도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없는데 왕이 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겸이 왕을 독살하려 했던것도 인종이 자기를 제거하여
죽이려했기에 더는 필요가 없어졌고 자기가 마음대로 조종해야 할
다른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자겸이 화가 난것도 16대 예종에게 둘째딸을 시집보낸 이자겸이
장인이 되면서부터 1115년 예종10년에 예종의 맏아들 인종을 7세에 태자로
책봉시켰다
1122년 예종이 죽고 다른 왕실 세력들간의 왕권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질때
이자겸이 목숨을 걸고 왕궁을 먼저 장악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인종을
14세에 왕으로 보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렇게 왕이된 인종이 18세 되던해 본인을 왕으로 만들어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를 제거하여 죽이려 했던 것에 분노하여 독살하려 했던것이다
결국 자신의 최측근 척준경의 배신으로 역적으로 붙잡히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
이후에도 인종(1109~1146)은 20년 동안 왕위를 지키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